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확산 사태가 걷잡을 수 없는 형국으로 흘러가고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직접 메르스 확진 환자가 다수의 사람들이 밀집해있는 장소 등을 돌아다녔다고 발표한 문제가 ‘진실게임’ 양상이 되면서 상황이 혼란스러워지고 있다.

5일 청와대는 전날 박원순 시장의 주장에 대해 불안감과 오해가 확산될까 우려된다는 내용의 입장을 발표했다. 박원순 시장 발표와 이에 대한 보건복지부의 입장, 환자의 언론인터뷰 내용 등이 서로 상충돼 좀 더 자세하고 정확한 사실이 확인돼야 한다는 얘기다. 청와대가 이 판국에 내놓은 입장 치고 소극적인 내용이지만 결국 서울시와 박원순 시장에 일종의 ‘경고’를 날린 것이 본질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청와대가 언급한 보건복지부 입장은 해당 환자에 대한 정보를 중앙정부로부터 받지 못했다는 서울시의 주장을 반박하는 내용이다. 어찌됐건 해당 환자를 통제하고 정보를 공유해온 것이 사실이며 환자가 참석했던 모임에서 전염이 이뤄지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해 대규모 격리조치를 내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 박원순 서울시장이 5일 서울시청에서 열린 메르스 관련 대책회의에서 굳은 표정으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환자 본인의 주장은 <프레시안>의 인터뷰 기사에 잘 드러나 있다. ‘35번 환자’로 특정되고 있는 A씨는 이 인터뷰에서 박원순 시장이 틀렸다고 주장하며 강력하게 항의하고 있다. 박원순 시장의 브리핑과 A씨의 주장을 비교해보면 결국 메르스 감염 증상이 29일부터 나타났는지 31일부터 나타났는지가 문제가 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약 1천5백명 가량의 사람들이 참석한 재건축 조합원 총회가 30일에 있었기 때문이다. A씨는 29일의 경우 평소 앓던 알레르기성 비염 증상 외의 이상을 느끼지 못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서울시가 이를 메르스 감염의 ‘경미한 증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과연 진실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엄밀한 의학적 조사가 시행될 필요가 있겠지만 이로써 박원순 시장이 곤란한 지경에 빠졌다는 점은 분명하다. 사실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섣불리 민감한 내용을 담고 있는 입장을 발표해 혼란을 초래한 것이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이를 박원순 시장의 ‘대권행보’로 보는 시선도 있다. 정부가 메르스 확산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과정에서 박원순 시장이 선제적 조치를 취하며 전면에 나섬으로써 차기 대권을 노린 경쟁구도에서 우위를 차지하려고 했던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런 분석에 일리가 없지 않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박원순 시장의 ‘의도’를 논하는 것이 아니다. 메르스 문제가 왜 이 지경이 되었는지, 그것을 되짚어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전문가들은 메르스에 대한 공포가 과장돼있다는 지적을 연일 내놓고 있다. 평소 호흡기 질환을 갖고 있는 고령의 환자 등에는 치명적일 수 있지만 건강한 사람의 경우는 제대로 관리하기만 하면 며칠 내로 완치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박원순 시장의 입장 발표가 불러온 파장에 대해 비판이 제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서울시장이 나서서 과장된 공포를 확산시키려 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밀히 따져 볼 때 공포를 확산시키고 있는 주범은 서울시가 아니라 오히려 정부의 무능한 대응이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은 이날 브리핑을 통해 “병원 내 모든 접촉자를 관리하기 위해 환자가 집중적으로 늘어나는 의료기관을 공개하기로 했다”면서 “지난달 15~25일 사이 평택성모병원을 방문했던 사람들의 신고를 부탁드린다”고 발표했다. 메르스 확진 환자의 다수가 평택성모병원에서 해당 기간 동안 어떤 이유로든 진료를 받은 이력이 있다는 것이다. 보건복지부 중앙메르스관리대책본부는 평택성모병원에 대한 역학조사 결과 해당 병동 에어컨 5대 가운데 3대의 필터에서 메르스 바이러스가 검출됐고 심지어 병실 문 손잡이, 화장실 가드레일에서도 바이러스가 검출됐다고 발표했다.

▲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이 5일 오전 정부세종청사 공용브리핑룸에서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결국 평택성모병원이 그야말로 바이러스 감염의 온상이었다는 사실이 2주 이상의 기간이 지나서야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두 가지 두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된다. 첫째,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바이러스를 옮기는 신세가 됐을지 아무도 모른다. 해당 기간 동안 평택성모병원에 방문한 환자 중 이러한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걸 정부가 증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평택성모병원과 같은 일이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발생하고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혼란이 증폭되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공포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는 정부가 그야말로 모든 것을 걸고 국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전면에 나선다는 것을 시사할 수 있는 조치가 필요하다. 시기를 놓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제라도 획기적인 조치를 통해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면 혼란을 수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뒤늦게 이런 저런 조치를 취하면서 ‘혼란을 조장하지 말라’며 박원순 시장을 비판하고, 메르스 바이러스 관련 유언비어에 대한 수사를 강화하겠다는 내용의 대응만을 반복하고 있다.

상황이 이러니 박근혜 정부를 지지하는 보수언론도 답답한 마음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조선일보는 5일자 1면 <메르스 공포 차단, 대통령이 前面에 나서야>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사태 해결을 진두지휘하고 국민을 안심시켜야 한다는 각계의 주장을 보도했다. 이날 조선일보 김철중 의학전문기자는 박근혜 대통령이나 보건복지부 장관이 병원을 찾아가 환자와 의료진을 격려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이들이 이런 훈수까지 두는 것은 메르스 사태를 박근혜 대통령이 정공법으로 풀지 못하면 세월호 참사 이후부터 제기되는 리더십 부재 논란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진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기 때문이다. 비록 이러한 위기의식에서 제기된 주장일지 몰라도 이날 조선일보가 핵심적으로 주장한 바는 설득력이 없는 것이 아니다. 대통령이 평론가처럼 남일 말하듯 하지 말고 직접 나서서 무언가를 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일부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14일부터 5일간 방미일정을 포기하지 않는 것에 대한 비판이 나오고 있는데, 이쯤되면 대통령이 전향적 판단을 해야 한다.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이날 경보단계를 ‘경계’로 격상시키는 것에 대해 “득보다 실이 많다”고 주장했는데, 대통령이 나서서 국민을 지키기 위해 모든 손해를 감수하겠다고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이날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서울 시민의 안전을 위해 직접 나서서 서울시 자체 방역대책을 마련하듯 박근혜 대통령도 직접 나서서 중심을 잡고 진두지휘하는 모습을 보여주길 바란다”고 발언했다. 정치인의 발언이니 박원순 시장 문제에 대한 정치적 고려가 분명히 포함돼있는 것으로 봐야겠지만 주장 자체에 틀린 말이 없다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주장에 호응해서 박근혜 대통령과 여야가 메르스 확산에 대한 대책을 함께 마련하고 논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국민들의 정부와 정치권에 대한 신뢰도 제고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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