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서 내 수명은 한 2~3년쯤은 족히 줄었을 거야. 내가 종종 떠들고 다니는 말이다. 실제로 이곳에서 받은 정신적 스트레스는 1년 8개월이 지난 마지막날까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는 매일 시간과 싸움을 하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한 후배는 우리는 정말 매일 시투(時鬪)한다고 정리한 적도 있다. 시간과의 싸움 과정에서 생방송에서 벌어질 법한 실수가 벌어지기도 하고, 그런 날이면 수명이 한 5~6개월씩은 팍팍 줄어들고 있음을 느낀다. 방송 들어가기 1시간 전. 지하 1층 시사투나잇 방송 부조 주변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지하 1층에서 밤늦은 시간까지 편집을 하는 선배의 말을 빌리자면 준비된 한 편의 연극이 진행되고 있을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하는데, 실제로 그곳에선 다양한 무대가 연출되고 있다. KBS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의 원조라고나 할까?

▲ KBS <시사투나잇> 홈페이지.
(전화로) “야. 왜 아직까지 안 내려와. 이제 방송 30분 남았어. 그만 편집하고 테이프 뽑아와!”
“지금 가요. 10분만요!”

(미친 듯이 뛰어오며) “선배 지금 저 더빙할 수 있어요?”
“지금이 몇신데! 안 돼. 저기 간이 더빙실에서 빨리 해! 지금 시간 없으니까 마무리 제작은 하지 말고 일단 자막은 라이브로 가!”

(방송10분전) “선배 지금 1번 테이프가 아직 안 왔어요.”
“뭐? 지금 뭐하는데? 10분 전에 뭔 소리야? 아휴~ (부조 마이크에 대고) 자. MC들. 순서 바꿔 갑니다. 일단 2번 먼저 갈게요.”

이 외에도 지하를 뒤흔드는 발소리의 굉음들과 “야!” “했어?” “뭐해 지금?” 등 짧은 괴성들이 쥐죽은 듯 조용한 방송국 지하1층의 심야를 뒤흔든다. 방송이 끝나면 약 새벽 1시. 방송에 대한 평가회의를 마치고 나면 새벽 2시가 넘는다. 하지만 잠이 들 생각은 안 든다. 심장은 여전히 쿵쾅거리고, ‘방송 사고를 내는구나’라는 생각에 모든 신경이 바짝 선 몸은 여전히 흥분상태다. 다음 날 방송을 위해 일찍 들어가야 하지만 놀란 몸과 여전히 흥분 아드레날린을 뿜어내는 뇌의 진정을 위해 가끔은 맥주나 폭탄주를 마시고 들어간다.

그렇게 1년 8개월을 살았다. 일반적인 PD의 생활과는 조금 다른 삶이었다. 하지만 매 순간 최선을 다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실수도 있었고, 가끔은 방송의 중립성을 지키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방송이 끝난 후, 회의에서 수없이 반성하고 좀 더 깔끔하고 완벽한 방송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자고 다짐했다. 다만 기계적 중립이란 이름아래 벌어지는 편파적인 방송은 어떻게 서든 피하고자 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집회 현장에 나가 가급적 그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담아내려고 했지, 절대로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찬성하는 사람 목소리 50, 반대 목소리 50을 담아내는 기계적 균형을 (그게 과연 균형인지도 의심스럽지만) 유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방송의 자유를 심대하게 침해하는 검찰의 PD수첩 조사에 대해서도 검찰의 입장은 듣되, 이번 조사의 이례성과 부당성을 하나씩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러한 우리의 노력에 대해 일부에선 ‘편향적’이란 이름으로 비판했다. 기계적인 중립을 근거로 들고 나온 비판이었다. 그러한 비판이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덩이처럼 커진 비판은 결국 시사투나잇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프로그램이 지나치게 편향적이고 논란을 일으킨다는 이유로 소위 프로그램 이름이 변경되어 버린 것이다.

촛불 집회가 한창이던 지난 5월, 현장에 나가면 KBS는 그래도 MBC 다음으로 환영을 받았다. 다들 고봉순, 김봉숙이라고 외치며 응원해줬다. 하지만 최근 우리는 고봉순, 김봉숙이란 이름을 잃어버렸다. 대신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캐병신’ 캐병신은 병신의 강조형인 개병신보다도 훨씬 강도 높은 욕이란다. 아마 회사 사장이 바뀌고, 외부에서 높은 평가를 받던 프로그램이 사라진다는 말이 나옴에도 침묵하고 있는 직원들에 대한 실망에서 나온 말일 게다. 하지만 시사투나잇의 폐지 앞에서 우린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너무 억울했다. 시사투나잇을 폐지한다는 그들의 명분은 어설펐다. 논리로 이해가 가지 않는 변명들이었다. 그래서 폐지가 결정된 후 2주 동안 최선을 다해 저항했다. 매일 새벽 방송을 끝내고 다음날 아침 8시까지 신관 로비로 모였다. 피케팅을 하고 구호를 외치며 시사투나잇 폐지의 부당성을 알리려 노력했다. 며칠 후, 미디어 포커스 제작진이 합류했고, 많은 사원들이 제작진의 싸움을 이해해주기 시작했다. 비록 우린 시사투나잇의 이름이 사라지는 것을 막지는 못했지만, 시투 폐지의 부당성은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었다. 동시에 우리가 ‘캐병신’이 아님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었다.

시사투나잇이 마지막 방송을 하기 전 날까지도 머리로 분노했지, 가슴으로 울진 않았다. 아마도 1년 8개월간 이곳에서 고생을 하면서 프로그램에 대한 원망도 많이 쌓였기 때문이지 않았나 싶었다. 그래서 시사투나잇을 떠나면 가슴 한 편에 시원한 구석도 없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지막 방송을 하던 날. 제1회 노근리 평화상 언론부분 수상식이 있었다. 시사투나잇이 제1회 수상자로 결정됐고, 방송이 없던 나는 선배들과 수상을 축하해주러 시상식장으로 향했다. 우리가 상을 받는 차례가 되었고, 잠시 뒤 선배가 수상소감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한창 이어지던 수상 소감. 그 때 선배의 입에서 이런 멘트가 흘러나왔다. “공교롭게도 오늘 밤으로 시사투나잇은 마지막 방송을 하게 됩니다.” 가슴이 갑자기 먹먹했다. 누군가가 주먹으로 세게 가슴을 때린 것 같았다. 수상 멘트를 하는 선배는 울먹거렸고, 옆자리에 앉아있던 선배는 닭똥 같은 눈물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 때서야 알 수 있었다. 정말로 시사투나잇이 사라진다는 것을. 가슴이 너무 답답했다. 가슴에 잔뜩 끼어있는 먹구름을 몰아내기 위해 연방 한숨을 쉬어댔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시투를 지키기 위해 함께 싸우던 선배의 책상이 비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새롭게 발령이 난 사무실로 이사를 한 것이었다. 그 때서야 가슴의 답답함이 슬픔이란 것을 알게 됐다. 날 너무나 고생시켜서, 때로는 미웠던 시사투나잇이 이제 없어진다는 사실에 내 가슴은 이미 펑펑 울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새 프로그램에 가게 된다. 분명 그곳의 바쁜 생활에 매몰되고 하면 시사투나잇 폐지에 화내고 울었던 지난 두 달간의 기억도 흑백영화의 추억으로 뇌의 깊은 창고에 파묻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먼지가 수북한 창고에서 오래된 앨범을 꺼내보는 것처럼 10년 뒤, 나의 지난 1년 8개월을 돌이켜 보면 감회가 참 새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촬영을 나가면 시사투나잇을 대하는 태도가 극명히 갈리는 경우가 많다. 일부는 “시사투나잇, 저리 가세요. 아무 말도 안 할겁니다” “우리는 할 얘기 없으니 가세요!” “……” 등등으로 반응한다. 시사투나잇에 매우 적대적이다. 또 다른 일부는 “시사투나잇만 오늘도 왔네요” “고마워요” “우리 방송은 언제 나가요? 등등의 말로 대한다. 전자는 대부분 국회의원, 시의원을 비롯한 정치인, 그리고 대기업 홍보실 등이다. 반면 후자는 비정규직 노동자, 집을 잃은 철거민, 장애인, 이주 노동자 등이다. 이것이야 말로 난 시사투나잇의 분명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확실히 우리는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자 했으며 언제나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고자 했다. 그게 내가 1년 8개월간 시사투나잇에 있으면서 접한 가치였고, 나 역시 구성원으로써 그러한 가치에 충실하고자 노력했다. 이제 시사투나잇은 사라지지만 시사투나잇이 지키려고 했던 가치들은 계속해서 남아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런 가치의 씨앗을 뿌린 것, 그것이 바로 5년간의 시사투나잇이 했던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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