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만 되면 흡혈귀와 요조숙녀를 오가는 배우가 있다. 그의 이름은 김선경. 뮤지컬 <쿠거>에서는 혼자가 된다는 부담감에 눈물 짓는 요조숙녀 릴리를 연기하지만, 드라마 <오렌지 마말레이드> 촬영장에서는 송곳니를 끼우고 눈에는 빨간 렌즈를 낀 채 릴리와는 180도 다른, 흡혈귀를 연기하고 있는 중이다.

<쿠거> 속 릴리는 클래리티와 메리-마리에 비해 수동적인 캐릭터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릴리는 클래리티와 메리-마리를 보며 자기주체성에 대해 진지하게 배우기 시작하는 성장형 캐릭터다. 동시에 뮤지컬을 이끌어가는, 그 어느 캐릭터보다 중요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쿠거>에서 <릴리>를 연기하는 <오렌지 마말레이드>의 흡혈귀, 김선경을 만났다. 참고로 김선경은 6월 <불후의 명곡> 방영분에서 가창력을 마음껏 뽐낼 예정이라고도 한다.

▲ 배우 김선경 ⓒ쇼플레이
- 뮤지컬을 하면서 드라마를 촬영 중이다. 부담이 많을 법한데?

“뮤지컬을 하고 드라마를 찍으면서 느낀 바가 있다. 그건 내가 이렇게나 공연을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다는 점이다. 밤새 드라마를 찍으면서 와이어를 타고 무대에 오르는데, 무대에 오를 때에는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무대에 설 때 육체적으로는 힘들지만 정신적으로는 위안을 받는다. 드라마를 찍고 나서 잠을 자는 것보다, 무대에 서는 게 스스로에게 위안이 된다.

관객이 배우를 쳐다볼 때 관객의 눈빛에서 따뜻한 기운을 받는다. 극장 규모가 크지 않다. 그러다 보니 관객이 배우를 본다기보다 배우가 관객을 보는 느낌도 상당하다. 관객을 보며 ‘관객이 위로를 받는구나’ ‘관객도 배우와 함께 감정선을 따라가는구나’하는 걸 느낀다. 그런데 저만 이런 걸 느끼는 게 아니다. 지금 (박)해미 언니도 드라마를 촬영하고 있다. 그런데 해미 언니도 <쿠거> 무대에 오를 때에는 스트레스가 저절로 풀린다고 한다.”

- 김선경씨가 연기하는 릴리가 보기에 클래리티와 메리-마리는 어떤 여자인가.

“클래리티와 메리-마리를 자신감이 넘치는 여자로 보았다. 그리고 사회에 대한 생존력도 강하다고 보았다. 사실 릴리는 이들보다 사회에 대한 생존력이 떨어진다. 릴리 옆에는 옆에 항상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클래리티는 주위에 사람이 없어도 충분히 생존할 수 있는 여자다. 메리-마리 역시 아들이 있어도 의식하지 않고 자신만의 생활을 충분히 즐길 줄 아는 여성이다.

클래리티는 릴리에게 없는, 똑 부러지는 자신감도 가지고 있다. 릴리는 이혼을 앞두고 갈팡질팡하지만, 클래리티라면 이혼 서류를 먼저 보냈을 것이다. 메리-마리도 아들과 함께 사는 쪽을 택하고 이혼을 하면 이혼했지, 릴리처럼 갈팡질팡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늘 제대로 된 선택을 하느라 주저했던 릴리는 클래리티와 메리-마리를 보면서 선택의 자율성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느꼈을 것이다.”

▲ 뮤지컬 <쿠거> ⓒ쇼플레이
- <오렌지 마말레이드>에서는 흡혈귀처럼 강한 캐릭터지만 뮤지컬 속 릴리는 한없이 여린 여성을 연기하니, 드라마와 뮤지컬이 정반대의 캐릭터다.

“<오렌지 마말레이드> 감독님에게 (저를) 사람이 아니라 흡혈귀로 캐스팅한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감독님은 ‘잠깐 나와도 강한 인상을 주는 배우가 필요한데 그 역할에 선경씨가 딱이다. <동방불패>의 임청하 같은 이미지에 선경씨가 맞다고 생각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오렌지 마말레이드>의 흡혈귀는 무섭기만 해서는 안 된다. 섹시하면서도 중성적인 이미지가 필요했다. <오렌지 마말레이드>에서는 대사 처리를 할 때 건조하게 말한다. 건조하게 해야 카리스마가 있다고 한다.

흡혈귀를 연기하려면 빨간색 렌즈를 끼어야 한다. 그런데 렌즈를 끼워본 적이 없어서 눈물을 많이 흘렸다. 흡혈족으로 안길강 선생님이 출연한다. 흡혈족은 짐승의 피를 먹고 살고, 제가 연기하는 흡혈귀는 사람의 피를 먹어야 한다. 그런 차이로 흡혈귀는 흡혈족과 싸움을 해야 하는데 싸움 장면을 찍으려면 와이어를 타야만 한다.

그런데 와이어를 타본 적이 없다. 와이어를 타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타야만 했다. 와이어를 처음 탔을 때 하늘로 올라가는 느낌이 들어서 너무나도 재미있었다. 흡혈귀에서 표현하지 못한 감정을 뮤지컬에서 마음껏 표현하는 중이다.”

- <쿠거>를 보며 우는 남성 관객도 있다고 들었다.

“미국 관객은 여성보다 남성 관객이 많이 보았다고 한다. 남성은 40대를 넘어가면 여성 호르몬이 많아져서 눈물이 많아진다고 한다. <쿠거>에는 부모님을 생각하며 부르는 노래가 있다. 부모님에게 잘 해드리고 싶어도 잘 해드리지 못하는 게 자식이다. 그러다 보니 부모님을 생각하는 자장가를 부르는 장면에서 남성 관객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

<쿠거>는 마지막 장면이 예쁘게 묘사되었다.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과거에 남성 관객이 예전에 사랑했던 여성이 생각이 나서 가슴이 뭉클할 수도 있다. 50대 된 남성 관객이 웃다가 울다가를 반복하는 걸 보면서 <쿠거>가 괜찮은 공연이라는 걸 확신하게 되었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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