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몇몇 직업에 있어서는, 특히 화류계는 나이를 먹는 게 치명적인 타격이 된다. 김혜경(전도연 분) 역시 그렇다. 젊었을 적에는 텐프로에서 인기 만점이었지만 지금은 퇴물이 되어 텐프로의 영광을 누리기는커녕 억대의 빚만 쌓이는 현실을 감당해야 한다. 이런 그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는 한 사내가 있다. 그의 이름은 정재곤(김남길 분). 박준길(박성웅 분)을 체포하기 위해 그의 애인인 김혜경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김혜경을 향한 정재곤의 이러한 접근법은 일찍이 칸트가 설파한 <실천이성비판>과 정면으로 배치(背馳)된다.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을 통해 사람을 대할 때에는 목적으로 대우해야 하지, 수단으로는 대하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정재곤은 인간 김혜경에게 끌려서라기보다는 박준길을 잡기 위한 ‘수단’으로 김혜경에게 접근한다. 박준길을 체포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김혜경을 수단으로 삼을 수 있다는 정재곤의 마인드는, 사람을 수단으로 대하지 말라는 칸트의 가르침과는 정반대가 된다.

하지만 정재곤이 김혜경에게 다가서는 목적이 박준길을 체포하기 위해서라는 의미는 시간이 지나면서 탈색하기 시작한다. 범인을 잡기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하던 김혜경에게 정재곤은 서서히 감정을 이입하기 시작한다. 수단으로 대하는 사람이라면 이성적인 감정이 싹이 틀 까닭이 없겠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김혜경을 향한 묘한 감정이 발아하기 시작한다.

수단으로 대하던 처음의 태도와는 상반되는 태도, 사람을 목적으로 대하는 태도를 정재곤이 갖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는 사람을 대할 때 인격적으로 대하라고 하는 칸트의 가르침을 정재곤이 받아들이기 시작한다는 의미와도 일맥상통한다. 정재곤은 김혜경에게 감정을 이입함으로 인해 사람을 목적으로 대하는 칸트의 가르침을 내면화하게 된다.

하지만 정재곤의 처음 태도, 즉 김혜경을 박준길을 잡기 위한 연결 고리로 대하고자 했던 정재곤의 이러한 태도의 이면에는 사람을 목적으로 대했을 때의 버거움을 감수하지 않겠다는 의지도 작용했다고 읽어볼 수 있다.

정재곤은 사랑에 탁월한 태도를 보이는 남자가 아니다. 아픈 사랑의 기억이 있는 남자이기에 김혜경과 같은 이성을 대할 때 처음부터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해야 나중에 감정이입할 일이 없지, 만에 하나 감정이입하게 되어 사랑이라는 감정이 발아한다면 정재곤이 겪었던 사랑의 아픔을 또다시 겪을 수도 있다. 이 때문에 김혜경을 대할 때 처음부터 수단으로 대했을 가능성도 높다.

그렇다면 정재곤은 보기와는 다른 순정남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즉, 사랑에 또 한 번 다치는 것이 싫어 일부러 이성에게 거리를 두는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다. 정재곤이 사랑에 다치기 쉬운 순정남이라는 사실은 영화 끝부분을 보면 능히 짐작할 수 있다.(스포일러가 되기에 상술하지는 않겠다) 정재곤은 박준길을 체포하기 위해 김혜경을 수단으로 대한 게 다가 아니라, 다시금 사랑에 상처받기 싫어 김혜경을 수단으로 대했다는 관점으로도 읽어볼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의 감정이라는 게 조절한다고 해서 조절되는 게 아니지 않은가. 정재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김혜경을 향한 사랑이 싹트게 되니 말이다. 정재곤의 김혜경을 향한 미묘한 감정의 변화는, 사랑에 다시금 상처받는 걸 두려워하는 순정남의 방어기제가 무장해제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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