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김강우 분)이 팔도 전국 각지에서 미인 1만여 명을 색출해 궁으로 오게 만든 건 다름 아닌 ‘결핍’ 때문이다. 어머니를 잃은 데서 생긴 트라우마, 어머니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장본인들을 잔혹하게 처형함으로써 복수에는 성공하지만, 복수를 성취했다고 해서 결핍이 채워지는 건 아니다. 때문에 연산군은 ‘대리 엄마’를 필요로 한다. 차지연이 연기하는 장녹수는 바로 연산군의 대리 엄마가 된다.

뮤지컬계에서는 꽤나 지명도가 있지만 영화에 처음으로 데뷔하는 차지연은 <간신>에서 연산군의 정신적인 지주를 담당하는 장녹수를 선보인다. 연산군이 어머니의 품이 그리울 때면 언제든지 품 안으로 들어오게 만드는 장녹수는 아내 이전에 대리 엄마의 기능을 담당한다. <간신>에서 차지연의 역할은 장녹수만 연기하는 것이 아니다.

차지연이 누구인가. 뮤지컬 <서편제>의 마지막 피날레 ‘심청가’를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게 만드는, 한의 정서를 무대에서 극적으로 승화시킬 줄 아는 뮤지컬 배우 아닌가. 뮤지컬 <서편제>에서 발휘하던 역량을, 영화 <간신>에서 차지연은 힘 있는 창의 울림으로 영화의 내레이션을 맛깔나게 소화하고 있었다.

<간신>에는 ‘운평’이라는 제도가 등장한다. 전국 팔도에서 빼어난 미인을 뽑는 제도를 운평이라 하는데, 단희(임지연 분)와 설중매(이유영 분) 두 여인은 가장 실력이 출중한 이들이다. 보통의 서사 구도라면 연산군의 눈에 들어 총애를 받기 위해 단희와 설중매 두 사람이 대결 구도를 펼쳐야 하겠지만, 영화 <간신>에서는 단희와 설중매의 대결이 개인적 차원의 대결 구도를 넘어선다.

설중매의 뒤에는 장녹수가, 단희의 뒤에는 임숭재(주지훈 분)가 존재한다. 연산군의 간택을 받기 위한 뛰어난 두 운평, 단희와 설중매의 뒤에 임숭재와 장녹수가 있다는 것은 단희와 설중매라는 개인적인 층위를 넘어 연산군 권력의 최고 실세 두 사람의 대결이라는 층위도 포함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즉, 연산군의 총애를 받는 신하와 후궁 두 최고 실세가 서로에게 지지 않기 위해 단희와 설중매라는 뛰어난 운평 두 사람을 매개로 삼아 대결 구도를 펼친다.

이런 대립각 안에서 단희와 설중매가 연산군의 총애를 받는 최고의 기녀 ‘흥청’으로 올라서는 것이 다가 아니다. 어느 누가 빨리 흥청으로 올라서느냐에 따라 장녹수와 임숭재가 승부를 종결 지을 수 있게 된다. 임숭재와 장녹수의 대결은 단희와 설중매 중 어떤 이가 ‘흥청’으로 간택되느냐에 따라 판가름 나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런 구도 안에서 단희와 설중매는 임숭재와 장녹수라는 실세를 대신하여 대립각을 펼치는 대리 대결의 ‘도구’가 될 따름이다.

즉 단희와 설중매는 연산군의 아랫도리를 즐겁게 만들어줄 성적 도구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다가 아니라, 장녹수와 임숭재라는 두 권력 실세를 대신하여 대결을 펼쳐야 하는 ‘대리 대결’의 기능도 수행해야 한다는 의미다. 연산군의 총애를 받아야 한다는 강박도 모자라, 임숭재와 장녹수를 대신하여 대결해야 하는 이중의 부담을 단희와 설중매는 감당해야 했던 것이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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