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02년 병역 기피 의혹으로 입국 금지 명령을 받은 유승준이 19일 아프리카TV를 통해 논란 당시의 상황과 현재까지의 심경을 밝히는 모습.

‘아름다운 청년’에서 ‘위험한 외국인’으로 전락한 해외파 가수

2000년 전후로 힙합이 조금씩 유행하기 시작했다. 드렁큰타이거가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를 들고 나온 것이 1999년이었다. <힙합>이란 제목을 달고 나온 만화도 있었다. 김수용 작가가 <아이큐점프>에 연재했던 이 작품은 2000년에 문화관광부에서 <오늘의 우리만화>로 선정됐다. 지자체들은 청소년축제를 열었다하면 청소년들이 건전하게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도록 장려하겠다며 힙합 댄스 경연대회를 열었다. 2000년 총선 당시에는 로고송에 맞춰 자원봉사자들이 힙합 댄스를 선보이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해외파 가수들이 많아진 것이 이즈음이다. 재미교포 2세들이 가져온 ‘본토’ 흑인음악은 곧바로 대중적인 상품이 되진 못했지만 댄스음악이나 발라드로 포화가 됐던 음악시장에 새로운 물꼬를 열었다. 그러나 해외파 가수들은 어디까지나 낯선 존재였다. 이들에겐 그래서 마약 복용 혐의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힙합 1세대라고 불릴 만큼 일찍부터 활동했던 업타운, 드렁큰 타이거 같은 팀들이 히로뽕 흡입으로 소환되거나 지명수배를 당했다. 당시 이 사건을 보도한 신문은 ‘교포출신들 죄의식 거의 없어’ 같은 표현으로 해외파 가수들을 싸잡아 비판했다. (동아일보, 2000년 5월 3일) 드렁큰 타이거의 JK는 구속되기도 했지만 결국 무죄로 밝혀졌으며, 마찬가지 투약 혐의로 지명수배까지 받았던 윤미래 역시 무죄를 입증했지만 소속사에게 5억 원의 위약금이 걸린 소송을 당했다. 이들에 대한 무죄 선고는 해외파 가수들에 대한 ‘공포’가 팽배해진 뒤에서야 나왔다.

연예 자본의 입장에서 해외파 가수들은 포기할 수 없는 상품이었다. 한국말도 못하고 태도도 뭔가 많이 다른 듯이 보여서 다루기가 까다롭지만, 잘만 다듬으면 대중적인 상품이 될 수 있었다. 새로운 상품에 대한 잠재적인 수요와 이질성에 대한 공포 사이에서 적응할 수 있을 대체재가 필요했다. ‘아름다운 청년’ 유승준이야말로 대체재로 적격인 가수였다. 어린 시절 뒷골목에서 주먹질도 하다가 회개해서 독실한 크리스챤이 된 청년, 격렬한 춤을 추지만 신앙 때문에 담배를 끊어서 늘어난 폐활량 덕분에 열정이 넘친다는 청년… 해외파 가수들을 볼 때면 느껴지던 어떤 불안감이 그에겐 없었다. 유승준이 금연홍보대사까지 맡으며 해외파 가수의 모범으로 주목받게 된 것은 역설적으로 해외파 가수들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다.

LA 뒷골목에서 방황했다던 모범적인 해외파 가수가 지금 다시 한 번 회개를 말하고 있다. 유승준은 입국금지 외국인으로 추방된 지 13년 만에 자신을 받아달라며 대한민국을 향해 무릎을 꿇고 용서를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그를 ‘아름다운 청년’이라며 추켜세웠던 언론매체들의 시선은 차갑기만 하다. 그의 진심이 의심된다며 호되게 심문 중이다.

13년 전, 유승준이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직후에 병무청은 그의 입국을 막아달라고 법무부에 요청했다. 병무청이 밝힌 법적 근거는 간단했다. “대한민국의 이익이나 공공의 안전을 해하는 행동을 할 염려가 있다고 인정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자에 대해 입국을 금지할 수 있다는 출입국관리법 제11조 8항을 적용할 수 있다.” ‘아름다운 청년’이 어느새 대한민국의 이익과 안전을 해칠 ‘위험한 외국인’이 돼버린 것이다.

국적 포기 과정에 관해선 소문만 무성하다. 공익근무 중에 연예활동을 병행할 수 있을 혜택을 약속받았다는 소문, 국방부 홍보대사였다는 소문, 해병대 자원입대를 하겠다고 공언했다는 소문 등등. 유승준은 13년 만에 입을 열었다. 자신을 둘러싼 소문들이 상당수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청년’이 위험한 외국인이 될 때까지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 징병검사를 받던 당시 유승준의 심경을 보도한 화면 캡처.

병역비리수사의 불똥이 애꿎은 해외파 가수들에게

2001년 3월까지 유승준은 여느 해외파 가수들처럼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까지 해외 영주권자들은 1년간 국내에서 체류하더라도 병역이 부과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해외파 가수들은 6개월 정도 활동을 한 뒤에 미국으로 건너가 휴식기를 가졌다. 하지만 2001년 3월 27일부터 개정된 병역법 시행령에 따라 영리 활동을 하는 경우 국내 체류 기간이 기존 1년에서 60일로 대폭 축소돼버렸다. 두 달 활동을 하면 6개월 이상은 나가있어야만 입영 연기를 인정받을 수 있게 됐다. 입영을 미루고 활동을 계속할 수 있을 방법이 사실상 사라진 셈이다.

변화는 급작스러웠다. 오점록 당시 병무청장이 연예인 병역비리를 언급하기 시작한 것은 개정 시행령이 시행되기 한 달 전이었던 2월 22일이었다. 오 병무청장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최근 연예계에 `해외파' 연예인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이들이 해외영주권을 이용, 편법으로 병역의무를 교묘히 회피하는 사례가 있는 것으로 안다"면서, 병역면제를 받거나 대상에 있는 연예인 100여명에 대한 집중 조사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까지 해외파 가수들이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입대를 미루고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병무청이 급작스럽게 단호해진 까닭이 무엇일까?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들이 드물지만 한때 박노항이라는 이름이 온 나라를 뒤흔든 적이 있었다. 2001년 4월 25일 동부이촌동의 아파트에서 검거될 당시 그는 35개월 간 도피생활 중이었다. 박노항 원사는 병무청 파견 수사관으로 있으면서 약 100여 건의 병무비리로 100억 원대 수수료를 챙겼다. 한때 ‘대한민국 병역면제 전문가’로 이름을 날릴 정도로 화려한 그의 비리는 병무청 전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법했다. 1998년 국방부 감찰단이 카투사 입대 청탁비리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박 원사가 당시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소속 원용수 준위에게서 1억 7천만 원을 받아 12명을 면제시켜준 혐의가 드러나면서 이 사건이 세상에 공개됐다.

군과 검찰은 병무사범 합동수사부를 꾸려서 수사를 진행했다. 합동수사부는 “국민이 납득할 때까지 수사를 계속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그러나 사상최대규모 수사라는 말이 무색하게 고위공직자, 재벌, 군장성 자녀, 국회의원 자제 등이 포함되지 않아 ‘돈 있고 힘 있는 사람은 다 빠져나갔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합동수사부는 이와 같은 지적을 의식해서 국회의원 자제들에 대한 조사도 시작했지만,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은 소환 조사에 응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정하고 ‘병역음해대책 특별위원회’를 만들어 항의하기까지 했다.

빠져나갈 사람들은 다 빠져나가고 나니 불똥은 연예인들에게 튀었다. 가뜩이나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이던 해외파 가수들이 수사 대상으로 지목됐다. 2001년 2월 13일 합동수사반의 사회지도층에 대한 수사가 일단락나자마자 병무청에서 바로 연예인들의 불법 병역면제 의혹을 대대적으로 조사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병무청이 당시 수사대상으로 파악한 해외파 연예인은 12명은 역시 모두 가수였다. 이 중 ‘H.O.T.’의 토니안, ‘신화’의 에릭, ‘원타임’의 테디, ‘지누션’의 션, ‘코요태’의 김구, ‘터보’의 마이키는 가족이 해외에 있어서 당시까지 병역이 면제됐다. 유승준, ‘태사자’의 이동윤, ‘지누션’의 지누는 신체검사가, 이현도, 정석원, ‘구피’의 신동욱은 입영이 연기된 상황이었다. 병역이 면제된 이들을 제외하고 당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던 해외파 가수가 유승준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관심이 쏠렸다.

▲ 유승준의 인터뷰가 나간 후, 이재명 성남시장은 '조국을 버린자', '배반하고 버린 대한민국' 등 강도 높은 표현으로 그를 맹비난했다.

모두가 외면했던 현실적인 어려움

이때까지만 해도 언론들은 유승준을 ‘아름다운 청년’으로 칭송해마지 않았다. 그는 2001년 초에 허리디스크(척추 2번과 5번) 수술을 받았지만 징집 면제를 장담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병무비리 사건 여파가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관심이 온통 그의 신체검사 결과에 쏠려있었기 때문이었다. 허리를 사용하는 것이 크게 무리가 없다면 공익요원 근무 판정을 받을 수 있었다.

유승준의 소속사는 군 입대를 장담했다. “국내 체류기간 60일이 지나기 전 미국으로 갈 수도 있었으나 신체검사에 응하겠다는 팬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음악작업을 하면서 국내에 머물러 왔다. 만약 징집 면제가 되지 않더라도 당당히 한국 남자의 의무를 다하겠다.” (한국일보, 2001년 8월 6일) 언론들이 관심을 집중하고 있으니 다르게 말할 별다른 방도도 없었을 것이다. 유승준 역시 입대를 약속했다. 그러나 해병대에 가겠다고 말했다는 소문과 달리 그는 주저하는 내색을 보였다. “솔직히 무대에 올라 노래 부르고 싶다. 하지만 신검에서 징병 대상자로 분류된다면 국방의 의무를 다하겠다”고 말했다. (한국일보, 2001년 8월 8일) 그는 8월 7일 대구 병무청에서 징병검사를 받고 4급 판정을 받았지만, 재검을 요구하며 13일 국군수도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았다. 이날 검사는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이어졌지만 담당관들이 합의하지 못하고 판정 보류를 결정했다. 대구 경북 지방 병무청은 보름간의 내부 논의를 거친 뒤에야 공익근무 처분을 발표했다. 28개월간의 의무복무 기간 동안, 병적지인 대구 대신 출퇴근 가능한 서울에서 공익요원 복무가 가능하다는 결정도 덧붙였다.

병무청의 발표가 나오자 병무청 게시판은 시끄러워졌다. 팬들은 유승준이 억울한 희생양이라고 감쌌고, 비판자들은 유승준이 춤추는 모습을 보면 공익판정도 이해가 안 된다며 당장 현역으로 보내야 한다고 팽팽히 맞섰다. 유승준은 국외 이주자 연예인에 대한 새 병역법 시행령의 적용을 받게 된 첫 케이스였기 때문에 인기만큼이나 논란이 컸다.

언론들은 유승준을 ‘아름다운 청년’으로 띄우며 논란에 더욱 불을 붙였다. 그가 검사를 받는 자리엔 어김없이 리포터들이 찾아가서 검사 결과와 상관없이 입대할 의사가 있냐고 물었다. 카메라 앞에서 입대하겠다는 의지 표명 말고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그가 지난 19일 아프리카 TV 생방송에서 ‘해병대 홍보대사’ 루머에 대해 해명했던 내용도 그의 처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1999년 집 근처에서 기자를 만났는데, 그가 “군대 가야지? 몸도 좋은데 해병대 어때?”라고 물어봐서 “해병대 좋죠”라고 답했더니, 다음날 1면에 박찬호와 함께 해병대 자진입대 기사가 나왔다는 것이다. 오보로 정정되었지만, 사람들은 ‘해병대 홍보대사’로만 기억할 뿐이었다.

유승준에 대한 여러 소문들과 달리 당시 신문 구석에서 그의 고민을 발견할 수 있다. 2001년 9월 6일자 <소년한국일보>는 ‘공익근무 판정에 속타는 유승준’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유승준이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곤란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우선, 그가 2001년 초에 서울음반과 37억짜리 대형 계약을 체결하고 정규 앨범 2장과 베스트앨범 1장을 내기로 했기 때문에 입대를 하게 되면 계약 이행이 어렵다는 것이다. 두 달 남짓 앞으로 다가온 입대일 전까지 정규앨범 1장과 베스트 앨범을 만들기가 불가능하지만, 위약금도 물 수가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영주권 문제인데, 부모를 비롯한 가족이 모두 미국에 살고 있기 때문에 영주권을 포기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영주권을 포기하면 은퇴한 뒤에 가족들과 함께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청년'이 경험한 “참 무서운 사회”

2002년 1월 20일 유승준은 ‘아름다운 청년’이란 이름을 버리고 한국 국적을 끝내 포기했다. 일본 공연 때문에 나간다고 해놓곤 미국으로 날아가 시민권을 취득했다. 2001년 11월 15일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하기로 예정되어있었지만 ‘가사’ 사유로 다음해 2월 14일까지 입영연기 허락을 받은 뒤였다. 입영연기 당시에 병무청 공보실에서는 “누구든 입대 전 가사사유로 3개월까지 연기가 가능하다”라고 말했다. 소문과 달리 특혜는 없었다.

한국 국적 포기와 함께 그가 이미 2년 전에 시민권 신청을 해두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그는 주위에서 시민권 취득을 원했을 뿐 자신은 고민하고 있었다고 해명했다. 다만 부모를 만나서 마음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당시 소속사에서는 "가수생활을 오래 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해 가족이 살고 있는 미국의 국적을 선택한 것 같다"고 전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한 명의 해외파 가수로서 유승준은 ‘아름다운 청년’도 아니고 ‘위험한 외국인’도 아니다. 한국과 미국의 경계가 만들어낸 잘 먹히는 대중상품이었을 뿐이다. 다만 그는 떠날 수 있었고, 떠났다.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힘든 이 나라에서 그처럼 휙 떠날 수 있는 능력은 부럽고도 미운 것이다. 하지만 한 때 ‘아름다운 청년’으로 칭송 받던 사람이 1년 새에 대한민국의 이익과 안전을 해칠 ‘위험한 외국인’으로 배척당하게된 과정을 이 땅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똑똑히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병무비리가 드러나자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은 잡아내지도 못하고 애먼 해외파 가수들에게 화살을 돌렸던 병무청, 상품성이 있을 때는 한껏 칭송하다가 바닥에 있는 대로 내리꽂은 언론과 연예 자본, 그리고 이제는 추방된 외국인이라고 이런저런 소문만 가지고 비난했던 우리는 이 사회를 건강하게 지키고 있는 걸까?

유승준이 ‘위험한 외국인’이 되고나자 언론들은 ‘아름다운 청년’이란 이름을 줄 연예인으로 탤런트 차인표를 찾아냈다. 그가 미국 영주권을 포기하고 군 복무를 자원한 유일한 해외파 연예인이었기 때문이다. 유승준의 국적 포기에 대한 비난 여론이 한참이던 때, ‘아름다운 청년’ 차인표는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참 무서운 사회라는 생각이 듭니다. 유승준씨를 두둔할 생각은 아닙니다만, ‘비난’이 ‘매도’로 변하가는 과정을 보면서 씁쓸했죠.”(동아일보, 2002년 4월 7일)

백승덕_ 징병제 연구자.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생연합회에서 부의장과 교육위원장을 맡았다. 2009년 9월 병역거부를 선언했다. 용산참사, 쌍용차파업 진압에서 국가폭력이 맹위를 떨쳤던 해였다. 출소 후 징병제 연구를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한양대 트랜스내셔널 인문학과에서 ‘이승만 정권기 국민개병 담론’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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