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차이나타운>은 엄마(김혜수 분)에게 쓸모 있는 이들만 자녀로, 엄마의 패밀리로 인정받을 수 있는 적자생존의 세계관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아마조네스’의 세계관을 내포한다. 아마조네스의 세계는 남자가 들어설 수 없는 금남의 세계다. 남자 아기가 태어나면 어른이 되기 전에 죽이거나 거세를 시켜, 인위적으로 여성이라는 젠더에 편입하는 식으로 일부러 남성성을 탈색하게 만드는 세계다.

다시 차이나타운으로 돌아가 보자. 차이나타운에서 엄마가 건사하는 자식들은 일영(김고운 분) 하나가 아니다. 딸 일영 이외에도 우곤(엄태구 분)이나 치도(고경표 분) 같은 아들이 엄연히 자리하고 있지만, 이들이 엄마에게 일영만큼 인정받는 아들인가에 대해서는 물음표가 남는다.

한 예로 치도는 엄마에게 한쪽 눈을 잃은 대가를 보상받기를 바란다. 하지만 엄마는 그동안 아들인 치도를 양육하고 길러준 비용이 한쪽 눈을 잃은 치도에게 보상할 비용보다 크다는 걸 계산기의 숫자로 보여준다. 엄마에게 치도나 우곤과 같은 아들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인 자식이라는 걸 보여주는 시퀀스 가운데 하나다.

엄마가 다스리는 세상의 후계자는 아들이 아닌 딸이다. 대개의 왕국은 시집갈 딸이 아닌 아들이 물려받는 게 대부분이다. 하지만 엄마가 지배하고 다스리는 세상의 지배권은 아들이 아니라 딸이 물려받는다. 치도가 엄마의 세상에서 독립해서 활동하는 건, 보통의 왕국에서 딸이 출가한 것처럼 지배자인 엄마의 영향력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의미한다. 엄마가 다스리는 세상은 우곤이나 치도와 같은 아들이 아니라 일영과 같은 딸이 물려받는다. 아마조네스와 마찬가지로 차이나타운의 세계가 남성의 세상이 아닌 여성의 세상이라는 건 지배권을 누가 물려받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엄마가 다스리는 세상은 엄마가 자연사함으로써 후계자인 딸이 자연스럽게 물려받는 왕국이 아니다. 딸이 엄마를 정적으로 생각하고 엄마를 제거해야 지배자에 올라설 수 있는 세상이다. 이 지점은 차이나타운의 적자생존의 세계관이 모든 구성원에게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즉 자식들만이 엄마에게 쓸모 있음을 보여주어야 하는 게 아니라, 엄마의 자리를 노리는 딸에게 아직도 엄마가 지배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후계자를 제압하고 다스릴 수 있을 때에야 엄마는 지배자의 자리에 눌러앉을 수 있지만, 반대로 엄마의 지배력이 수명을 다하면 언제든지 후계자인 딸이 엄마를 제거하고 치고 올라올 수 있는 적자생존의 치열한 경쟁 구도를 엄마와 일영의 갈등 구조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엄마는 이전의 엄마를 제거하고 엄마의 위치에 올라섰다. 지금의 엄마 역시 지도자의 능력을 갖출 딸이 나타나면 그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일영이 향불을 피우는 건 이전 엄마들에 대한 명복을 기리는 것이자, 동시에 언젠가는 다른 딸에게 엄마의 자리를 물려주어야 한다는 걸 암시하는 일영 자신을 위한 향불이기도 하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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