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어렵다. 점점 더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일례를 들자면 남미 순방을 마치고 돌아와 자리에 드러누운 게 대표적이다. 위경련과 인두염의 원인이 된 그 어떤 ‘병’은 정확히 4월 28일부터 대통령의 직무를 사실상 정지시켰다. 대통령은 거의 일주일이 지난 5일에서야 자리를 털고 일어나 국민들의 시야에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는 이제 앓을 것은 다 앓았다는 듯 기세등등하게 현안에 대한 입장을 쏟아냈다. 공무원연금 개혁에 대한 여야의 합의안에 국민연금의 명목소득대체율 인상이 포함된 것에 대해 사실상 여당을 질타하고 정국을 뒤흔든 ‘성완종 리스트’ 사건에 대해서는 특별사면에 대한 무슨 문제를 언급하는 것으로 ‘퉁쳤다’. 이 일련의 과정에 정치적 계산과 이를 통한 어떤 고려가 반영됐다는 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일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렇다. 첫 번째로 공무원연금 개혁을 위한 여야 합의안에 대한 대통령의 발언은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를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 읽힌다. 김무성 대표는 ‘성완종 리스트’ 사건에서 불법정치자금 수수 의혹을 받은 이완구 국무총리를 사퇴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4·29 재보궐선거를 승리로 이끈 주역으로 평가받고 있다. 일부 여론조사에서는 차기 대권주자로서 부동의 1위를 거의 항상 지키고 있던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를 제치기도 했다. 이제 명실상부한 여권의 구심점은 누가 뭐래도 김무성 대표다.

▲ 남미 순방 이후 건강 악화로 안정을 취해온 박근혜 대통령이 4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대통령 주재 수석비서관회의에 참석,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아직 2년 9개월의 임기가 남아있는 박근혜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반환점도 돌지 않은 상태에서 차기 대권주자가 벌써부터 두각을 드러내는 것은 곤란하다. 박근혜 정권이 야심차게 내세웠던 ‘4대개혁’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공무원연금 개혁의 공까지 김무성 대표가 차지하는 것은 곤란하다. 이렇게 되면 남은 임기의 국정 운영 주도권을 청와대가 아닌 여당이 가져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될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스스로 이명박 정부 시기 그러한 활동을 해보기도 하였으므로 그게 어떤 의미가 될지에 대해서도 아마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김무성 대표를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물론 이것은 순전히 정치적인 판단의 차원이다.

두 번째로 ‘성완종 리스트’ 사건을 특별사면의 문제로 몰고 가는 것은 당연히 야권의 가장 유력한 대권주자인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를 겨냥한 것이다. 문재인 대표는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민정수석과 비서실장으로 일했기 때문에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에 대한 특별사면이 어떻게 진행됐는지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사람이라는 세간의 인식을 이용하겠다는 것이다. 여권과 보수언론이 똘똘 뭉쳐 뜬금없는 사면 얘기를 꺼내는 것은 결국 야당에 대한 물귀신 작전으로 보일 뿐이라는 것은 수차례 논한 바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정치개혁에 대한 의지를 다지면서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한 것은 결국 4·29 재보궐선거로 하나의 국면이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하던대로 하겠다는 의지를 다시 표명한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것들은 사실 어떤 면에서 보면 ‘뻔히 보이는 수’라고 말할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아닌 다른 사람이 대통령직에 앉아 있었다면 애초에 병으로 국정을 돌보지 못한다고 말할 때부터 온갖 구설수에 시달렸을 것이다. 국정을 돌보지 못할 정도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과연 국가 안보의 총책임자 역할까지 해야 하는 대통령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겠느냐는 진지한 의문이나 정치적 이득을 위해 ‘꾀병’을 연기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핀잔까지 모든 신문이 물어뜯었을 것이다. 특별사면 타령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성완종 리스트’에 적혀있는 이름들은 대통령의 핵심 측근들이며 이 상황은 사실상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자금 문제를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참여정부 시절의 특별사면에 대한 의문을 말하는 것은 객관적으로 봤을 땐 그저 한가한 소리다. 그러나 문제는 대중적 차원에서 이러한 문제의식들이 전혀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병에 대해서도 다수 언론이 어떤 불편한 감정이나 의구심을 숨기지 못하긴 했으나 이에 대한 전면적 문제제기를 내놓는 경우는 보기 어려웠다. 국민들의 경우도 박근혜 대통령의 ‘병’을 냉소적으로 다루는 경우가 있었지만 어떤 큰 문제로 인식하지 않고 그러려니 하는 분위기가 다수였다. 이는 일부 여론조사 등에서 4·29 재보궐선거를 전후해 박근혜 정권과 새누리당의 지지율이 안정적으로 상승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결국 여론조사의 수치만 보면 국민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실제로 병에 걸려 국정을 거의 일주일간 방치했든, 꾀병을 부렸든, 논점을 일탈하든 거의 상관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박근혜 대통령 특유의 캐릭터에서 비롯된 어떤 맥락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정치인으로서 박근혜 대통령을 대표하는 키워드는 ‘신뢰와 원칙’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정부에서 특히 세종시 수정안 문제를 두고 대통령과 대립해 정국에 큰 충격을 안긴 바 있다. 당시 상황에서 친이계과 친박계가 마치 여당과 야당의 역할을 떠맡은 모양새가 됐고 이 덕분에 야당은 존재감이 없는 상태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래서 신뢰와 원칙의 정치인 박근혜가 대중들에게 무언가 능력을 보여준 사례로 이 문제를 꼽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따져보면 박근혜 대통령이 한 일이라고는 말 몇 마디 한 게 전부다. 이외의 문제에 대해서도 박근혜 대통령은 다른 정치인들과는 달리 유별나게 말수가 없거나 현안에 대한 입장 표명의 횟수가 적다. 즉, 박근혜 대통령의 이러한 소극적 대처방식이 오히려 정치인답지 않은 ‘색깔’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하고 있고 이 색깔이 대중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정치적 냉소주의와 조응해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적 에너지로 전화되고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그저 가만히 있으면 이득을 보는 사람인 셈이다.

2012년 대선 국면에서 토론에 취약하다는 점에 드러났음에도 지지율 관리에 별반 문제가 없었다는 점 역시 비슷한 측면을 보여준다. 오히려 박근혜 대통령의 어휘는 서민의 그것에 가까운 측면이 있다. “통일은 대박”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이는 유능하고 강단 있는 정치인의 언어가 아니라 동네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는 범인(凡人)의 언어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이러한 언어관은 그의 고귀한(?) 출신과 아이러니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다. 유사한 모습을 우리는 박정희 대통령을 통해 경험한 바 있다. 독재자로서 모든 권력을 누리지만 검소한 생활을 유지하며 막걸리를 즐겨 마시는 양면성이 바로 그것이다. 바로 이 양면성을 통해 대중들은 정치적 냉소주의를 우회한다. 대통령은 ‘어차피 다 똑같은 정치인’의 분류에 속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무제한적 권력을 갖고 있는 존재여야 하는 것이다.

▲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가 4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연합뉴스)

즉, 박근혜 대통령의 전략적 빈곤함이 ‘대세’에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는 것은 대중의 정치적 냉소주의가 박근혜 대통령의 양면적 리더십과 결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해를 거듭할수록 더 강화돼 여권의 정치적 이익 기반이 되고 있다. 따라서 이를 돌파해야 하는 야권의 전략은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을 ‘어차피 다 똑같은 정치인’의 범주에 밀어 넣거나 대중의 정치적 냉소주의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뿐이다. 전자는 2012년의 ‘나는 꼼수다’와 같은 전략을 반복하는 것이 될 테고 후자는 야권의 유력 대권주자들이 대안적 정치를 펼칠 수 있는 인재들이라는 점을 충분히 어필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2012년의 실패를 돌이켜봤을 때 보다 긍정적인 것은 후자이나 제1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이 갈팡질팡하고 있는 상황에서 제대로 일이 될지 의문스럽다. 계파 갈등의 함정에 빠지거나 때 아닌 비선 논란에 계속 흔들려서는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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