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드라마 <미생>(원작 윤태호) 이후 ‘장그래’는 한국사회 비정규직 상징하는 말이 됐다. 원 인터내셔널 영업3팀의 한 일원으로서 뛰어난 업무역량을 발휘했지만 그는 영원한 을, 비정규직일 뿐이었다. ‘더 열심히 일하면 정규직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놓지 않았지만 그는 인턴생활 끝에 회사에서 해고(계약종료)됐다.

<미생>의 선풍적인 인기는 현실을 그대로 대변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좁디좁은 취업문을 뚫고 들어가 봐야 ‘비정규직’(대졸 첫 일자리 비정규직 38.7%)의 박봉과 비인간적 처우, 그것이 오늘날 20대의 현실, 장그래들의 모습이다. 장그래가 명절선물로 정규직과 다른 식용류 세트를 받은 것이 현실을 잘 대변했다며 화제가 됐었는데, 노동현장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하도급 포함)은 때론 옷 색깔조차 다르다.

▲ tvN <미생>에서 장그래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

“시급으로 따지면 300~400원 수준…PD·기자 갑질에 사표내기도”

KBS <1박2일>에서 차태현·김주혁·김종민·김준호·데프콘·정준영 등 출연자들과 운명을 같이 해 새벽 조업을 나가거나 때로는 상대편으로 야외취침 대결을 하면서 화면에 등장하는 카메라팀, 조명팀, 음향팀, 차량팀, 작가팀(팀은 아니지만)은 100% 비정규직이라고 보면 거의 틀림이 없다. 조연출(FD) 또한 마찬가지다. 고용형태 또한 ‘파견’과 ‘프리랜서’, ‘직접고용 계약직’ 등으로 다양하다. <1박2일> 촬영을 위해 70명의 스텝이 이동한다면 그 중 대다수는 비정규직이라는 얘기다.

<미디어스>가 한 지상파방송사에서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A씨를 만났다. ‘방송일’이 꿈이었다는 A씨는 “방송경력 10년차로 이제 프리랜서 작가로 입봉한지 2년 정도 됐다”며 “‘자발적 프리랜서’라고 스스로 위안하고 있지만, 휴가는 없다. 프리랜서 작가에게 휴가는 그만둬야 쓸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작가의 일이라는 게 회사에서도 일하지만 노트북으로 집에 가서도 일을 하게 되는 시스템”이라며 “종편에서 일하는 작가들의 경우는 더욱 심각한 상황”이라고 말한다. 2명이 해야 할 일을 1명을 쓰면서 돈을 절약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A씨는 ‘구성작가’의 경우 “막내작가, 조연출의 페이가 10년이 지났지만 변한 게 없다”라면서 “120만원을 받으면 많이 받는 것이다. 고되지만 돈의 여유가 있어서 취미 생활로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구성작가”라고 설명했다. “방송사 내 비정규직의 노동을 따져보면 사실상 시급 300~400원이나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 KBS 보도에서 비정규직 관련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문제는 적은 페이도 문제지만 방송사 정규직 PD와 기자들로부터 받는 반인권적인 대우다. 그는 “물론, 안 그런 사람들도 많지만 PD·기자들이 갑질을 한다. ‘이 따위밖에 못 쓰냐’, ‘알고나 쓴 거냐’라는 인격적인 비하가 종종 있다”며 “PD의 무시와 폭언으로 그만두는 사례도 있다”고 말했다. tvN <미생>의 이야기를 꺼내자 그는 파견회사에 소속돼 조연출로 일했던 때의 일을 꺼냈다.

“파견회사에 있을 때 생각이 많이 났다. 추석 선물이라고 받았는데 정말 창피할 정도로 이상한 걸 쥐어 주더라. 정말 버리고 싶었다. ‘이런 게 비정규직의 서러움이구나’라고 제대로 느꼈다. (지금도)정규직 PD들끼리는 같은 일을 하는 동료로 대하면서 일도 잘 가르쳐주고 한다. 후배라는 것이다. 옆에서 보면 아끼는 마음이 그대로 보인다. 그런데 파견직은 동료나 후배가 아니라 그냥 부리는 사람이다. 그럴 때마다 밖에 나가 담배를 피우고 그랬었다. 80%의 노동력이 비정규직을 통해 발현되지만 정규직 공채 PD들을 중심으로 일이 진행되면서 나머지 사람들은 유령취급이다. 그들에게 우리는 ‘너희는 그냥 쓰다 버릴 수 있는’ 그런 존재들”_방송작가 A씨

유명 스타 작가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KBS <1박2일>과 tvN <꽃보다 시리즈>, <응답하라 시리즈> 이우정 작가 같은 이는 대표적이다. 하지만 매우 드문 일이다. A씨는 “40대 이상 작가들은 드라마 밖에 거의 없을 것”이라며 “그렇다고 메인 작가는 소수일 뿐이다.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그런 생각이 드니 착잡하다”고 토로했다. 그럼에도 그는 “일은 계속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작가’들만의 일은 아니다. 예능의 중심축이 스튜디오에서 야외 리얼 버라이어티로 옮겨가면서 비정규직의 노동환경은 더욱 열악해졌다. ‘KBS <1박2일>이나 MBC <무한도전>을 보면 일반 사람들과 다른 생각을 가질 것 같다’는 질문에 A씨는 “밤새는 것이 기본이라서 ‘난 저거 못하겠다’는 생각부터 든다”며 웃었다. 조연출(FD)의 경우, 밤샘하며 심부름꾼 노릇을 한다는 설명이다.

▲ 언론노조 미로찾기

“제발 파견직으로 뽑지 말라”…언론노조, 미로찾기 출범

“제발 파견직으로 뽑지 말라. 직접고용 하고 임금을 올려달라” A씨의 작은 바람이었다. 외주 프로덕션에서 조연출로 일해보기도 했었다는 그는 ‘끔찍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때는 방송일은 너무 하고 싶었으니까 박봉이나 바쁜 것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다. 아, 당시 100만원을 수령해 이것저것 떼이고 손에 남는 돈은 80만원에 불과했다. 너무 적은 금액이었지만 페이 이야기를 꺼내면 ‘열정이 부족하다’는 이야기가 돌아왔다. 주말에 지방촬영을 갔다가 새벽에 올라와 일을 하다보니 집에 거의 들어가지 못했었다. 고시원에서 살았었는데, 결국 집을 빼서 사무실에 짐을 놓고 살았다. 일주일에 한번 하루 짬이 되는 날에는 찜질방에서 잠을 자는 생활을 계속했다. 방송일 초반이라 아무 것도 몰랐을 때였는데, 프로덕션 사장은 ‘자른다’는 말을 자주 했었다. 그 당시에는 그게 부당한지도 모르고 잘해야겠다는 생각만 했었다. 노동자들의 집회를 접하게 됐는데, ‘저 사람들은 자기가 부당하다고 이야기를 하는 구나. 나는 이게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다”_방송작가 A씨

A씨는 외주 프로덕션에 대해 “깡패들”이라고 격앙된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조폭들처럼 일은 밤새 부리면서 돈을 떼어먹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일부이지만 조신해야 한다. 돈을 못 받을 경우 사무실에 있던 A4용지를 들고 나왔다는 얘기도 들었다”고 심각성을 지적했다. 물론, 그 같은 경험이 A씨의 삶이 변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그는 현재 “방송가 비정규직들의 문제 개선을 위해 1인 시위라도 하겠다”는 입장이다.

방송가 비정규직의 문제와 관련해 A씨는 “KBS와 MBC 시사프로그램에서 파견직 등 비정규직에 대한 많은 문제들을 이야기하는데 사실 웃긴 이야기”라고 꼬집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같은 시사프로그램 역시 비정규직의 손길을 거쳐 만들어진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앞서 언급했듯, 방송가 비정규직의 고용형태는 매우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만큼 개선하는 것 또한 쉽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가운데,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전국언론노동조합에서 ‘미로찾기’ 출범이 그것이다. 풀네임은 ‘미디어 비정규 노동자 권리찾기 사업단’이다. 언론노조 김환균 위원장은 “당장 가시적인 조직을 만들고 성과를 내는 것은 힘들더라도 비정규직에 접근해서 고민을 상담하는 기초적인 일을 시작할 것”이라고 밝혔다.

“여기에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열정 페이에 신음하면서, 열정 페이를 비판하는 방송을 만드는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파견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2년이 되면 자동으로 해고되는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하루 꼬박 컴퓨터 앞에서 어뷰징 기사를 올리며 ‘기레기’라고 손가락질 당하는 알바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20미터 높이의 광고탑 위에 올라야만 했던 하청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프리랜서라는 허울 좋은 명분으로 프리하게 해고되는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징그러운 밑바닥에서 희망의 끝자락이라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써도 결국은 밑바닥인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마주해야 할 미디어 비정규 노동자들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미로찾기 출범선언문 중>

언론노조가 미디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권리찾기를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로 ‘실태조사’를 꼽았다. 2011년도에 나온 박정호 KBS기자의 <방송산업 비정규직 근로실태 연구-K방송사를 중심으로> 고려대 석사 학위논문이 관련 마지막 조사결과라고 한다. 그에 따르면, K방송사의 정규직은 4964명(2010년 말 기준)이었으며 비정규직(파견/프리랜서/도급 등, 2011년 6월 기준) 합계는 3056명으로 전체의 38.1%를 차지했다. 고용형태별 임금 차이 또한 컸다. 정규직 전체의 임금은 파견노동자의 5.82배 높았다.

지난 28일 고용노동부가 공개한 고용형태별 근로실태조사 결과는 참담했다. 비정규직 임금수준은 정규직의 62.2%에 불과했다. 금액으로 따지면, 정규직 시간당 임금은 1만8426원(2014년 기준)이었으며 비정규직은 1만1463원에 그쳤다. 정규직의 62.2%수준이었다. 하지만 방송가 비정규직의 현황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현재 언론노조 산하에 비정규직 지부가 별도로 존재하지만 어디까지나 차량 운전기사들 뿐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언론노조 미로찾기 출범에 대한 기대감은 큰 상황이다. A씨는 “저와 비슷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모아보고 싶다”며 “그래서 미로찾기에 문의를 하게 됐다. 그런데, 가장 큰 걸림돌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시간과 마음적인 여유가 없다는 점”이라고 한숨을 지었다.

2015년 미생 모든 장그래들을 응원합니다. “욕심도 허락받아야 하는 겁니까?”

▲ 4월 22일 언론노조 '미로찾기'가 출범했다(사진=언론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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