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9박 12일의 긴 남미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27일, 일간지들은 ‘성완종 리스트’ 사건에 대한 나름의 관점을 드러내는 지면 편집을 선보였다. 일부 보수언론의 경우 박근혜 대통령의 입장 표명을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입장을 표명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서로 결이 다른 주장을 내놓았다.

<조선일보>는 이날 <귀국 박 대통령 어떤 각오로 이 난제들 앞에 설 건가>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박근혜 대통령이 ‘성완종 리스트’ 사태, 이완구 총리 후임 인선, 공공 개혁 문제 등에 대해 어떤 입장을 밝힐지 주목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조선일보>는 그러면서 몇 가지 제안을 내놓았는데 ‘성완종 리스트’ 사건을 수사하는 검찰에 청와대 비서실장과 민정수석 등이 수사에 간여하지 못하도록 해 특검 수준의 독립성을 보장하고 이완구 총리 후임에 대해서는 ‘내 사람’, ‘우리 편’을 넘는 인선이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 조선일보 27일자 사설.

또, <조선일보>는 “박 대통령은 공무원연금 개혁, 노동 개혁 등 공공분야 개혁을 올해 안에 매듭짓겠다고 국민 앞에 약속했다”면서 “이 막중한 과제가 검찰 수사나 정치 소란에 묻힌다면 누구보다 대통령의 책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조선일보>는 “대통령의 국정 추진력은 철 지난 사정(司正) 캠페인 같은 것이 아니라 그런 정치력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결국 <조선일보> 사설의 내용을 해설하면 ‘성완종 리스트’에 대한 수사는 검찰에 맡기도록 하고 더 이상 정치권에서 이를 두고 대립하지 않도록 국면의 전환을 시도해야 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공무원연금 및 공공부문 개혁 등을 흔들림 없이 추진하도록 입장을 밝혀야 한다는 얘기다. 그간의 보도 성향으로 볼때 <조선일보>는 ‘성완종 리스트’의 기폭제가 된 검찰의 자원외교 관련 수사 자체가 불필요한 것이었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런 전후맥락을 볼때 <조선일보>에게 필요한 것은 ‘성완종 리스트’ 사건 자체를 광범위한 정경유착의 결과물로 만들어 박근혜 정권에 대한 타격을 최소화시키는 것이다.

▲ 조선일보 27일자 3면.

<조선일보>의 이날 지면 편집은 이러한 의도에 상당히 걸맞게 이뤄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일보>는 이날 1면에 ‘정치와 돈, 검은 고리 끊자’라는 제하의 기획 기사를 배치했다. 사업체를 보유하거나 운영하는 기업인 출신 인사가 국회의원에 당선되면 소유하고 있는 회사의 매출과 순익이 두 배 이상 늘어나는 것으로 밝혀졌다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철강 도소매업 사업과 관련있는 새누리당 주영순 의원과 항공사의 대주주이자 회장으로 활동했던 새정치민주연합 이상직 의원, 물류 및 건설회사의 실질적 소유주인 새누리당 강석호 의원 등을 이러한 사례의 대표적 예로 꼽았다.

<조선일보>는 이어지는 3면 하단 기사에서 새누리당 박덕흠, 윤명희, 정우택, 주영순 의원 및 새정치민주연합 김영환, 이상직, 주승용 의원 등이 주식을 소유한 기업과 관련 업무를 취급하는 상임위에서 활동하면서 주식의 백지신탁을 결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회사 주식을 소유하고 있다고 보도했고, 새누리당 김세연 의원과 새정치민주연합 안철수 의원을 ‘재벌급 정치인’으로 지칭하면서 이들이 사외이사 등을 고리로 하여 유력 정치인들을 포섭한다는 얘기가 나온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이날 4면에서는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선거에 출마해야 할 때는 정권 실세들에 로비를 하고 재판에서 유리한 입장을 취해야 할 때는 법조계 인사들을 집중 접촉하는 등 ‘맞춤형 로비’를 해왔다고도 보도했다. 이는 성완종 전 회장의 지난 30개월간 일정표를 분석한 결과다. 또, <조선일보>는 5면에 성완종 전 회장이 참여정부 시절 자신의 특별사면을 위해 여야를 가리지 않는 로비를 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내용의 기사를 배치했다. 결국 성완종 전 회장이 친박 실세 뿐만이 아니라 계파와 정당, 영역을 가리지 않는 광범위한 로비를 통해 이득을 챙겨왔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 중앙일보 27일자 사설.

이렇듯 <조선일보>가 ‘성완종 리스트’ 문제가 여야 정치권을 넘어선 전사회적 문제라는 것을 강조하며 사실상 ‘물타기’에 나선 가운데 <중앙일보>는 이와는 약간 다른 스탠스를 취했다. <중앙일보>는 이날 사설에서 “박 대통령은 누에고치처럼 웅크리지 말고 국민 앞에 나서야 한다. 자신의 핵심 측근들이 연루된 의혹이 있는 성완종 사건이 터졌는데도 그는 국민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면서 “이제라도 그는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밝혀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근혜 대통령에 사실상 ‘대국민 사과’ 수준의 대응을 요구한 것이다.

<중앙일보>는 또 “세월호 사태가 터지자 박 대통령은 국가 개조를 얘기했다. 성완종 사태가 터지자 정치개혁을 말하기도 했다”면서 “그러나 적잖은 국민은 이 못지않게 ‘대통령 개조’도 중요하다고 믿는다”라고 강조했다. <중앙일보>는 “밀폐된 본관에서 나와 버락 오바마처럼 비서실에 합류해야 한다”면서 박근혜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을 비판하기도 했다. 결국 <중앙일보>는 박근혜 대통령이 먼저 변화의 의지를 보여줘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 방점을 찍고 있는 셈이다.

다만 <중앙일보>는 “총리의 공백을 최단으로 줄이고 정권 분위기를 일신하려면 대통령은 신속하게 탕평책을 써야 할 것”이라고 제안하는가 하면 “국민이 보는 앞에서 대통령 비서실장·민정수석, 법무부 장관 등이 검찰수사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지시하는 게 필요하다”고도 썼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조선일보>와 비슷한 상황인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동아일보 27일자 사설.

이런 가운데 <동아일보>는 다소 특이한 포지션을 택했다. <동아일보>는 이날 사설에서 검찰의 중립적 수사 보장과 공무원연금개혁 등 민생법안 처리 등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방미외교를 시작했다는 점을 언급했다. <동아일보>의 이와 같은 주장은 박근혜 대통령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중남미순방에 신경쓰느라 동아시아의 정세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인식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의 중남미순방 과정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아베 신조 총리는 반둥회의 60주년 기념 자리에서 정상회담을 갖는 등 관계의 변화 가능성을 시사한 바 있다.

▲ 동아일보 27일자 1면 기사.

그러면서도 <동아일보>는 이날 1면에 계약 과정 등의 대화나 통화 내용을 녹음한 ‘녹취파일’이 대한민국을 뒤흔들고 있다는 기사를 배치했다. ‘성완종 리스트’ 사건은 말할 것도 없고 이완구 총리의 인사청문회 과정이나 최근 방산비리로 구석된 일광공영 이규태 회장 사건 등에서 공통적으로 ‘녹취파일’의 존재가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 기사다. 그러면서 <동아일보>는 “감시가 일상화된 사회”라면서 다른나라보다 한국이 녹취에 너그러운 편이며 이는 사회적 신뢰가 형성되지 않는 상황에서 가속화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결국 ‘녹취파일’의 법적 효력 등에 대한 에 대한 새로운 사회적 기준이 필요하다는 결론이다.

<동아일보>의 이러한 문제의식은 따로 다뤄볼만한 문제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친박 실세’들이 연루된 ‘성완종 리스트’ 사건이 정국의 중심에 놓이고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자금 문제 까지 거론되며 이에 대한 보수언론의 ‘물타기’가 횡행하는 상황에서 이런 기획을 했어야 했는지는 의문이다. 성완종 전 회장의 폭로나 이완구 총리의 언론에 대한 외압 행사 발언 등이 담긴 녹취파일은 오히려 일정 부분 사회적 순기능을 수행한 것인데 이런 시점에 녹취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오히려 정략적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보수언론들이 이렇게까지 발벗고 나서고 있는데도 박근혜 대통령이 정치적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는 점은 안타깝다. 박근혜 대통령이 중남미 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27일 청와대는 위경련과 인후염으로 박근혜 대통령이 하루 이틀간의 절대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설명을 내놓았다. 보수언론도 이를 미리 알았던지 박근혜 대통령이 귀국 직후 바로 업무를 재개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전망을 일부 내놓았다. 4월 29일 재보궐선거가 예정돼있는 시점에서 결국 이완구 총리의 사표 수리와 ‘성완종 리스트’에 대한 대통령의 입장 표명은 언제 이루어질지 알 수 없게 됐다. 대통령의 이러한 행보는 당장의 선거에는 득이 될지 모르겠지만 장기적으로는 권력 누수를 앞당길 가능성만 키울 뿐이다. 이를 알면서도 ‘물타기’를 계속해야 하는 보수언론의 노력이 눈물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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