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뭘 어떻게 해야할지 알려주는 사람도 별로 없긴 매한가지다. 그래서 활동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각자 제일 잘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세상을 뒤흔들고자 한다. 난 사실 활동가라고 하기엔 내세울만한 능력이 그닥 없다. 그래서 난 내가 가장 잘한다고 믿는 단 한 가지 방법으로 세상을 뒤흔들고자 한다.

2015년 4월16일 아침, 난 어느 때와 다름 없이 북적이는 2호선 지하철을 탔다. 주머니 속에 꼬깃꼬깃 넣어둔 A4용지 하나를 들고 마치 물건을 파는 장사꾼마냥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인사를 건넸다.

“지하철을 타신 시민 여러분, 한 구간만 양해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30살 박진우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오늘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지 만 1년이 지났습니다. 이 사건만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친구, 가족 어쩌면 이렇게 함께 지하철을 타고 갔을지도 모르는 304명의 생명이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지난 1년 간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오늘만큼은 세월호를 기억했으면 합니다. 제가 봤던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대구지하철 그리고 세월호 참사로 인해 우리 곁을 떠났던 사람들을 기억해야 바뀔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 가족 곁으로 돌아오지 못한 실종자 9명에 대해서 한번 더 기억하고 마음을 모아주시길 바랍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 가장 인상깊었던 순간은 있었다. 그건 약 8년 전 일이었다.

2007년 4월1일, 그날은 만우절이었다. 친구와 영화를 보러 갔는데 학교 선배로부터 “한미FTA 협상장 앞에서 택시기사 분신“이라는 짤막한 문자가 왔다. 만우절 거짓말 치곤 참 고약한 문자다 싶어서 답장을 하지 않고 영화에 집중했다. 영화관을 나와서 우연히 TV 뉴스를 봤는데 선배의 문자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당시 FTA 협상이 열리고 있던 하얏트호텔 앞에서 ”한미FTA협상 폐기하라“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故 허세욱 열사가 분신을 했고 한강성심병원으로 급히 이송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어느 새 난 지하철을 타고 있었고 전혀 준비되지 않은 지하철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 8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대략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1970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일하는 기계가 아니다!’ 외쳤던 전태일 노동자가 분신했고 여러분이 믿으실지 모르겠으나 오늘 바로 몇 시간 전 ‘한미FTA를 반대한다, 졸속협상을 중단하라!’며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인 한 택시노동자가 있습니다. 여러분! 21세기에 민주주의가 실현되었다는 그리고 참여정부라는 지금 바로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날에 목숨을 걸고 분신을 하신 분이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평범한 택시를 몰던 노동자이던 분이었습니다. 여러분 함께 7시에 촛불을 듭시다. 저 뻔뻔한 노무현 대통령에게 사람의 목숨을 위헙하게 하고 있는 한미FTA를 반대한다는 우리의 목소리를 제발 외칩시다….”

사실 발언을 다 하지도 못하고 제 분에 못이겨서 지하철 바닥에 주저 앉아 펑펑 울었다. 만우절에 너무나 거짓말 같은 현실이 분노스러웠고 내가 여기서 이렇게 떠들어본들 누가 귀기울여줄까 하는 무기력함에 소리내어 울었던 것 같다. 그때 음악을 듣던 한 사람이 헤드폰을 벗고 내게 다가와 손수건을 건네주면서 울지말라고 무슨 말인지 충분히 알겠다고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그 이후부터였다. 이랜드 여성비정규직 투쟁, 철도 민영화 반대 투쟁, 포천 아프리카 박물관 투쟁 등 이건 정말 알려야겠다라는 생각이 들면 나도 모르게 지하철을 타고 이야기를 하게 된다. 그러다 이랜드 사측 직원을 만나 논쟁을 한 적도 있고 처음 보는 할아버지에게 빨갱이 소리를 듣기도 하고 지하철 방송으로 하차해달라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물론 수고한다면서 음료수를 주는 사람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주는 사람도, 힘차게 박수를 쳐주는 사람들이 더 많긴 했다. 무엇보다도 그 찰나의 순간에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눈빛으로 응원을 해주는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을 때 더욱 용기가 난다. 그리고 정말 드물지만 이렇게 직접 댓글로나마 행동으로 옮겨주는 사람도 있으니 이것은 해보지 않은 사람은 정말 모른다. 나름 짜릿하다.

그렇게 8년 가까이 1년에 한두번은 꼭 지하철을 타고 모르는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를 건네왔다. 하지만 여전히 모르는 사람들에게 짧은 2~3분안에 내 이야기를 건넨다는건 쉽지 않은 일이다. 앞으로 또 어떤 상황에서 내가 지하철을 타고 이야기를 하게 될지는 모른다. 분명한 것은 내가 좋아하는 Chumbawamba(첨바왐바)의 대표적인 곡 Tubthumping(텁썸핑)의 노랫말처럼 세상이 답답하면 답답할수록 난 내가 가장 잘한다고 믿는 방법으로 이 세상을 뒤흔들 작정이다.

I get knocked down, but I get up again
험한 일이 닥쳐 무너지는 날이오더라도,
나는 당당하게 싸워 일어설꺼야
You're never going to keep me down
아무도 날 무너뜨릴 수는 없다구

2012년부터 이주노동조합의 상근자로 일을 하고 있다. 어릴때부터 대안학교 선생님을 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꾸고 있어서 언젠가는 이주아동 대안학교 선생님을 하겠다는 나름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일을 한지 3년이 되어가지만 외국어를 못해서 무조건 한국어로만 상담을 하고 있다. 이주노조가 반드시 합법화되서 한국에서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이주노동자들의 튼튼한 조직으로 우뚝 설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개인적으로 몸무게가 계속 늘어서 movement(운동)가 아닌 exercise(운동)를 심각히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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