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럿 프로그램이라는 것이 있다. 보통 설날이나 추석 명절 특집으로 새로운 형태의 프로그램을 제작해 방송하고, 시청자의 반응을 살피기 위한 프로그램이다. 여기서 시청자의 사랑을 받게 되면, 이 프로그램은 정규 프로그램으로 편성되고 보통 일주일에 한 번씩 시청자를 만나게 된다. 이런 파일럿 프로그램은 예능 프로그램인 경우가 많다. 이는 예능 프로그램에 대한 시청자의 취향이 매우 빠르게 변하며, 시청자의 예민한 입맛을 맞추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롭게 기획한 예능 프로그램을 바로 정규 방송으로 편성하기에 방송국은 상당한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즉, 대중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예능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므로 사전 평가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한 프로그램이 매번 새로운 형태를 들고 나와 꾸준히 시청자에게 사랑받는다고 가정해보자. 한 번은 콩트를 한 번은 리얼 버라이어티를, 때로는 토크쇼를, 심지어는 레슬링을 하기도 한다. 시청자에게 사랑받는 것이 그 어느 장르보다 힘겨운 예능에서, 고정된 형태 없이 매번 다른 형식의 방송을 제작하고 꾸준히 사랑받는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일단 제작 자체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 데다가 파일럿 프로그램이 제작되어야 할 만큼 치열한 예능계에서 매번 다른 포맷을 들고 나와 사랑까지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불가능을 현실로 바꾸어 놓은 것이 바로 <무한도전>이다.

기본적으로 어떤 프로그램도 고정 형식을 피할 수는 없다. 포맷이 바뀌면, 매번 새로운 팀을 꾸리고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추격전을 할 때와 음악제를 할 때, 제작진이 해야 하는 일은 완전히 다르다. 즉, 매주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제작진에게 일주일에 혹은 이주에 새로운 예능 프로그램을 하나씩 만들어내라고 하면, 아마 모두가 두 손 들고 포기했을 것이다.

최근 SBS의 <웃찾사>에서 인기를 끌었던 '배우고 싶어요'라는 코너가 있다. '테니스'를 가지고 반복적인 개그를 하는 코너인데, 처음에는 코너의 형태만 그대로고 매번 운동이 바뀔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계속해서 '테니스'가 반복됐다. 이 반복은 시청자를 익숙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인기 상승의 요인이기도 하지만 반복으로 인한 피로도가 증가한다는 점에서 코너의 수명에는 치명적인 악수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프로그램은 기본 틀을 고정한다. 그래야 정기적으로 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1박 2일>의 여행과 복불복 콘셉트, 과거 <패밀리가 떴다>의 게임과 요리 콘셉트, <런닝맨>의 이름표 떼기 콘셉트들은 프로그램이 가진 아주 기본적인 틀이다. 이 기본적인 틀 덕분에 프로그램은 안정적으로 제작될 수 있다. 또한, 이 반복되는 틀은 시청자가 프로그램을 익숙하고 친숙하게 받아들이도록 한다. 이 익숙함과 친숙함은 프로그램의 대중적 인기를 증가시키는 것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이 기본 틀의 고정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성공한 프로그램들은 이에 멈추지 않는다. <웃찾사> '배우고 싶어요'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익숙함으로 인한 지루함을 피하기 위해 그 안에서 다양한 변주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1박 2일>이 스텝들을 적극적으로 방송 안으로 끌어들이고, <런닝맨>이 다양한 스토리라인을 추격전에 집어넣는 것은 기본 틀 안에서 다양한 변주를 만들어내, 반복으로 인한 프로그램의 수명저하를 막는 역할을 했다. 따라서 기본 틀 안에서의 변주를 만들어 낸 프로그램은 오랫동안 시청자의 사랑을 받는 장수 예능이 될 수 있었다.

<무한도전>의 초창기에는 '무모한 도전'이나 '쿵쿵따' 같은 기본 틀이 있었다. 그리고 이 안에서의 변주를 찾았다. 이는 일반적인 프로그램이 지니는 형태와 비슷했다. 하지만 이후에 <무한도전>은 완전히 다른 길을 걷는다. 매번 새로운 형태의 포맷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굉장한 모험이었음이 분명하다. 제작진의 피로도는 증가하고, 출연진은 프로그램에 적응하기 힘들다. 무엇보다 시청자가 프로그램에 익숙해지기가 어렵다. 위에 말한 것처럼 익숙함은 대중성의 바탕이 된다. 따라서 어떤 프로그램도 쉽사리 이런 결정을 내릴 수가 없다. 그러나 <무한도전>은 그 길을 간다.

이 당시 부족했던 익숙함은 <무한도전> 내의 통일된 '자막' 스타일이나 출연진이 채워나가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성의 한계는 있었다. 몇 년 전만 해도 <무한도전>의 약점으로 항상 지적받던 것이 바로 '어렵다'는 것이었다. 익숙함의 결여가 만들어낸 어쩔 수 없는 부산물이었다. 그러나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무한도전>은 계속해서 새로운 시도를 했고, 시청자들이 좋아하는 그리고 시청자들이 사랑하는 다양한 <무한도전>의 포맷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 같은 말도 안 되는 시도가 가능했던 이유는 아마 <무한도전>이 기존의 고정틀로는 아주 큰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김태호 PD가 출연진의 능력을 알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가 출연진 한명 한명이 너무 재밌는데 방송에 제대로 잡히질 않아서 출연진마다 따로 카메라를 두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유명한 일화다. 결국, 출연진에 대한 신뢰가 '무정형'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었던 바탕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무정형의 프로그램은 계속해서 발전하게 되는데, 특히 <무한도전> 최초의 장기프로젝트인 '쉘 위 댄스'는 무정형 프로그램의 가장 큰 약점이었던 '익숙함'을 해결할 실마리를 만들어줬다. 장기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이를 계속 보여주자 시청자들이 프로젝트 자체에 대해 익숙함을 느낄 수 있게 됐고, 결국 마지막 공연 날에는 사람들이 길거리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장기 프로젝트는 무정형 프로그램인 <무한도전>이 대중성을 확보하는 데 아주 큰 역할을 했다.

또한 <무한도전>의 시간 역시 '무정형' 프로그램의 약점을 해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랫동안 방송이 이어지다 보니 '무정형' 안에서 고정된 포맷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추격전이나 무한상사 같은 콩트, 그리고 가요제 같은 것들이 <무한도전> 내의 고정적인 포맷이 되어 주었고, 이를 통해 모자랐던 익숙함은 거의 해소됐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가요제와 추격전, 무한상사가 큰 역할을 했으며, 이 고정 포맷의 발생으로 인해 '어렵다'는 평가는 서서히 사라지게 됐다.

출연진의 성장 또한 같은 역할을 했다. 유재석, 박명수, 정준하, 정형돈, 하하 그리고 그 녀석이 모두 대한민국 예능의 중요한 인물로 떠오르면서 이들의 모습만으로도 시청자들이 익숙함을 느낄 수 있게 됐으며, 이 모든 결과가 어우러져 결국 <무한도전>은 국민적인 사랑을 받는 프로그램이 될 수 있었다.

'무정형' 프로그램으로서 <무한도전>이 갖는 의의는 상당하다. 매번 새로운 방식의 예능을 만들어야 했기에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의 원류가 될 수 있었다. <무한도전>을 따라 했다고 평가할 수는 없지만, <무한도전>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볼 수 있는 프로그램들은 상당히 많다. 최근 사랑을 받고 있는 <크라임씬> 또한 3개월 전에 먼저 방영된 <무한도전> 탐정특집으로부터 영감을 얻었을 가능성이 있다. 만약 <무한도전>이 고정된 틀을 지니고 있었다면 이렇게 다양한 형태의 포맷을 실험해 보지 못했을 것이고, 지금처럼 많은 영감을 예능 제작진에게 주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무정형'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생긴 제작의 노하우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매번 바뀌는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서 제작진이 쌓아놓은 노하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대단한 것일 수 있다. 심지어 여러 개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촬영하기도 하는 <무한도전>의 제작은 주먹구구식으로 될 일이 아니다. <무한도전> 덕분에 쌓인 제작 노하우는 분명히 대한민국 예능 전반에 퍼져 나갔을 가능성이 높다. 출연자마다 별도의 카메라를 두는 것부터가 <무한도전>이 만들어낸 꽤 의미 있는 제작 노하우다. 최근 중국이 자본을 통해 적극적으로 한국의 예능 제작 노하우를 사가려고 애쓰는 것만 봐도 <무한도전>이 지니고 있는 제작 노하우의 값어치가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정형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은 부분적으로 이미 정형화됐다. 반복되는 특집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포맷을 만들어 나간다. 오히려 정형화된 포맷이 생기면서 더욱 부담 없이 새로운 시도들을 할 수 있게 됐다고 평해도 괜찮을 것 같다. '대선특집' 같은 새로운 방송을 여전히 만들어내고 있고, 앞으로도 '생태계 생생생'이나 '우주 특집'처럼 전혀 새로운 포맷으로 프로그램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여겨진다.

10년 동안 새로운 것을 해왔던 것처럼 앞으로의 10년 동안에도 이들은 새로운 것을 시도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이들이 해왔던 시도들이 시청자들에게도 방송계에도 다 좋은 경험이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무한도전>이 만들어갈 앞으로의 10년 또한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이라 확신할 수 있을 것 같다.


문화칼럼니스트, 블로그 http://trjsee.tistory.com/를 운영하고 있다. 문화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화 예찬론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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