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SK에게 우승팀이라는 수식어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시즌내내 압도적인 전력으로 단 한순간도 반란을 꿈꿀 수 없게 만든 그들의 성적은 아무리 올라가도 1등 밖에는 안 되는, 순위싸움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1등이라는 순위는 그냥 하다보면 따라오는 덤같은 것일지도…. 그런 의미에서 2008년의 SK는 ‘우승팀’보다는 ‘최강팀’이라는 이름이 더 잘어울린다. 일전에 한 포털사이트(네이버 2008년 7월 7일~7월 20일)에서 역대 프로야구 최강팀을 뽑는 인터넷투표가 있었다. 후보는 총 다섯 팀이었다.

결과는 총 투표자의 61.44%인 3만4845명이 93년의 해태를 프로야구 역대 최강팀으로 꼽았다. 단순 기록만 본다면 다섯팀 중에서 승률이 가장 낮은 팀이 93년의 해태 타이거즈다. 물론 팬들의 숫자나 ‘해태’라는 이름이 가지는 특별한 의미가 투표에 영향을 끼쳤겠지만 그래도 뭔가 의미심장한 결과다. 우승팀은 그 해 승률이 제일 높은팀 혹은 한국시리즈에서 이긴 팀이겠지만, 최강의 팀은 숫자로 환산될 수 없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팀일 것이다.

▲ 93년 한국 시리즈에서 우승한 해태타이거즈 ⓒ기아타이거즈 홈페이지
개인적으로 해태타이거즈의 열성팬이기도 했었고, 본격적으로 프로야구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 때가 바로 1993년이었으니, 나에게도 질문을 한다면 역시 프로야구 역대 최강의 팀은 93년의 해태다. 1993년은 그야말로 대어급, 아니 레전드급 신인들이 벌떼처럼 출현한 해였다. 국가대표 왼손투수 김홍집(태평양), 송진우 장종훈과 더불어 한화의 전설인 구대성(빙그레), 당시 최고 대우 신인계약금(연봉 포함 2억원)을 받았던 이상훈(LG), 성격만큼이나 불같았던 광속구 투수로 주목받았던 노장진(빙그레), 고교 때는 거포로 이름 날리던 이대진(해태), 한국시리즈 15이닝 완투의 주인공 박충식(삼성), 선동열과 맞짱 뜬 마무리 김경원(OB), 그리고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이종범과 양준혁.

결국 신인왕은 방위 복무를 하면서 106경기밖에 안 치르고도(다른 선수들은 시즌 126경기) 홈런과 타점에서 2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던 양준혁에게 돌아갔지만, 한 경기 최다인 6도루를 하고도 아쉽게 전준호에게 도루 타이틀을 빼앗겨버린 이종범, 지금의 오승환보다도 훨씬 무서운 기록을 남긴 김경원, 그리고 이대진이나 박충식 등도 93년이 아닌 다른 해였다면 충분히 신인왕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성적이었다. 참고로 올시즌 압도적인(?) 신인왕 최형우의 기록은 0.276의 타율에 106안타, 19홈런, 71타점이다. 하지만 이런 대단한 아이들도 이종범과 양준혁을 제외하고는 선배들 앞에서 무릎 꿇었으니(이종범-득점·골든글러브·한국시리즈 MVP, 양준혁-타율· 출루율·장타율) 그 해 프로야구가 남긴 풍성한 기록들과 이야기들은 팬들의 머리와 가슴에 깊은 흔적을 남겼던 것이다. 전설이 탄생하기에 최적의 조건, 수많은 영웅들이 그라운드에 즐비해 있었다. 아마도 93년도 해태가 유난히 빛난다면 그것은 해태타이거즈의 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해태와 맞섰던 그 수많은 영웅들이 뿜어낸 눈부심도 한 몫 할 것이다.

2008년의 SK는 정말이지 공포의 대상이었다. 특히나 SK에게 유독 약했던 기아의 팬인 나에게는 기아가 SK와 경기를 할 때면 3연전 중 과연 1경기라도 이길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어쩌면 2008년의 SK가 93년의 해태보다 더 강한 팀일 수 있다. 두 팀이 함께 시즌을 치른다면 SK의 승수가 더 높이 쌓여있을 것만 같다. SK의 강점은 알다시피 주전과 비주전의 실력차가 가장 작다는 것이다. 풍부한 선수층이 도대체 약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해태는 언제나 선수층이 풍부하지 못했다. 물론 연고지인 전라도 지역에서 우수한 신인들이 끊임없이 발굴됐지만, 그들을 모두 가져갈 재정적인 여유가 없었다. 김성한이 타점왕에 10승 투수까지 해야 했던 원년부터 선동열 이종범 임창용 등을 팔아가며 연명했던 말년까지 주전 한 명이라도 다치면 큰일나는 팀이 해태였다. 이호준이 부상으로 빠지고 1년 내내 용병 덕 못 보면서도 1위하는 SK하고는 비교가 될 수 없었다.

▲ 93년 골든 글러브 시상식ⓒ기아타이거즈 홈페이지
하지만 ‘최강의 팀’이라는 호칭은 아무래도 아직까지는 SK보다는 해태에게 어울린다. 93년 해태가 2008년의 SK와 한국시리즈에서 만난다면? 해태가 진다는 생각은 도통 들지 않는다. SK가 풍부한 선수층을 바탕으로 한 조직력의 팀이지만 93년의 해태 또한 자기만의 완벽한 조화를 자랑하는 팀이었다. 팀타율(0.282)과 팀방어율(3.22) 모두에서 1위를 차지한 SK와는 달리 해태는 팀타율(0.251)과 팀방어율(2.92)에서 각각 4위와 2위에 그쳤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빈약한 공격력을 타선의 집중력으로 상쇄하고 압도적인 마운드로 상대방을 질리게 해버리는 것이 해태의 전통적인 스타일임을 감안한다면 다소 일그러져 보이는 투타의 조화가 오히려 상대방에게 두려움을 줬을 수도 있다. 다승왕을 차지한 조계현을 필두로 이강철, 이대진, 김정수, 송유석 등의 10승 투수와 역시 마무리로도 10승을 올린 선동열이 버티고 있는 마운드에 질리지 않을 상대팀이 있다면 오만하거나 바보이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SK가 리그 방어율 1위임에도 해태만큼 압도하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아마도 김광현을 빼고는 압도적인 선발진이 없는 이유일 텐데, 이는 중간계투가 중요해진 최근의 야구 추세와도 연관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야구는 투수놀음이라는 말이 있듯이 선발투수 하나가 미쳐버리면 아무리 약팀도 강팀을 이길 수 있는 것이 야구다. SK가 압도적인 전설로 남기 위해서는 타팀을 압도하는 선발진이 필요하다.(SK가 그런 선발진을 가진다면 야구 재미없겠다. 그건 사기다. ㅠㅠ) 또한 SK가 전설로 남기 위해서는 ‘전설적인 선수’가 필요하다. 물론 스타급 플레이어 하나 없는 팀이 엄청난 노력과 조직력으로 우승팀이 되는 드라마도 충분히 재미있고 스펙터클하다. 하지만 순간의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사람들의 뇌리에 추억처럼 남겨진 전설이 되기 위해서는 외인구단처럼 시작한 팀이라도 그 안에서 전설이 되는 선수가 나와 줘야 한다. 93년의 해태가 가지는 막강한 이미지는 팀전력 뿐만 아니라 선동열과 이종범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의미심장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성장 중인 김광현 최정 등 젊은 선수들이 프로야구사에 자신의 이름을 굵직한 필체로 써 넣을 수 있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SK가 전설의 강팀으로 남기 위해선 SK만 잘해서는 안된다. 93년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선동열과 송유석 김정수에 맞서 홀로 15이닝 완투했던 박충식이 없었다면, 부상을 딛고 일어서 당당히 홈런왕과 타점왕에 오른 김성래가 없었다면, 그야말로 괴물이라는 표현밖에 사용할 수 없는 양준혁이 없었다면, 93년 해태의 한국시리즈 우승이 그처럼 빛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장종훈, 구대성, 이정훈, 이강동, 송진우가 없었다면 혹은 이상훈, 유지현, 송구홍, 김용수가 없었다면 그래서 90년대 야구가 재미가 없었다면 사람들이 해태를 기억이나 했을까? 비록 2008년 신인왕 후보들의 성적은 약간 처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무섭게 성장 중인 젊은 선수들이 미래를 밝히고 있다. 최고의 반열에 올라선 김태균과 이대호, 이미 최고지만 그 끝을 아직도 알 수 없는 류현진, 김광현, 윤석민, 세상을 깜작 놀라게 했던 김현수… 어쩌면 SK는 전설로 남겨지기 좋은 여건을 가지고 있는지도.

기아의 팬으로서 물론 2009년의 우승은 기아이기를 바라지만, SK가 전설이 되어간다면 그 또한 한 명의 야구팬으로서 즐거운 일이다. 먼 미래에 2000년대 전설의 팀 SK가 반짝 반짝 빛나는 데 나의 기아타이거즈가 한 조각 눈부신 빛을 더하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 SK가 전설로 한걸음 더 다가가기를 바라며….

PS) 전설이 될 수 없다면 그냥 내려와라. 기아가 드디어 10번째 우승을 할 수 있도록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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