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특집’을 시작하며

주말은 이틀뿐이지만, 주말의 ‘꺼리’를 찾는 것은 일주일의 가장 중요한 즐거움이다. 이제 한 살이 된 <미디어스>는 52주를 살아냈다. 그리고 거진 절반의 주말을 ‘촛불’과 함께 보냈다. 그것은 주말마다 시대의 이행을 목격한 행운이었지만, 또 어쩌면 ‘꺼리’를 찾지 않아도 되는 게으름이 합리화되는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스스로의 한 살을 자축하며, 미디어 비평지 본연의 색깔을 제법 내보려고 한다. 주말마다 미디어와 사회의 관계, 미디어와 문화의 함수를 고민하는 ‘꺼리’를 제공하고자 한다. 내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란 소박한 믿음으로 독자 여러분의 주말 클릭을 조금이라도 풍성하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많은 관심과 열화와 같은 댓글 부탁드린다.

2008 프로야구는 SK와이번스의 우승으로 끝났다. 특히, 2008 한국시리즈는 주옥같은 승자와 목지 않은 패자의 눈물로 점철된 잊지 못할 명승부였다. 이번 주의 키워드는 야구이다. 108개의 실밥을 지닌 공이 만들어내는 승부의 세계는 그 자체로 '꿈의 공장'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9회말 2아웃 역전홈런을 날리는 타자를 꿈꿔보고, 퍼펙트 게임을 수행하는 투수와 같은 인생을 바라본다.

▲ 11월 1일자 한겨레 신문 22면.
지금으로부터 81년 전, 그러니까 1927년 1월 22일의 아스날(Arsenal)과 셰필드유나이티드(Sheffield United)의 경기는 오늘날 미디어 스포츠 시대가 기억해야 할 기념비적인 승부이다. 그 경기는 <BBC>에 의해 처음으로 생중계된 축구 경기이다. 물론, 그 경기가 최초의 중계 경기는 아니다. 기록에 따르면, 최초의 스포츠 중계방송은 1921년 미국에서 열린 잭 뎀프시(Jack Dempsy)와 조지 카르펜티에르(Georges Carpentier)의 경기라고 한다.(물론, 당시 기술 여건상 라디오 중계였다.) 스포츠를 거실에서 즐기는 것이 상식이 된 오늘에는 스포츠 없는 방송을 상상할 수 없지만 그것은 채 100년도 되지 않은 ‘근대의 풍경’이다.

그렇다면, 미디어와 가장 먼저 ‘거래’한 스포츠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야구이다. 야구와 미디어의 거래는 189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의 웨스턴 유니언이 야구 경기 상황을 술집과 일부 도박장에 전송해 주는 권한을 갖는 대가로 내셔날리그에 돈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부 구단들은 경기내용을 생중계 할 경우 팬들이 야구장에 오지 않을 것이라 심각하게 우려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송 관행은 계속되었고, 1913년에는 전신 중계권료로 5년 동안 각 팀에 매년 1만7000달러를 지급하는 계약을 맺었다고 한다. (전신 중계 시대를 지나 최초로 야구 텔레비전 중계 시대를 연 것은 1939년이다.)

한국의 스포츠 중계 역사도 결코 짧다고 할 수 없는데, 1928년 8월 전국 중등학교 조선야구 예선전이 최초로 라디오 중계 되었다. 이후 오랫동안은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부운을~”을 부르던 정겨운 추억의 시대였다. 운명은 어느날 벼락처럼 바뀐다고, 1982년 3월 27일 프로야구가 출범을 맞이하면서 국내의 스포츠 중계 역사도 비약적인 지평의 확장을 이루게 됐다.

국내 프로야구의 성장과 TV의 관계는 뭐라고 설명해도 부족할 만큼의 불가분한 관계이다. 단적인 예로, 불과 몇 년 전 그러니깐 케이블TV가 활성화되기 전까지만 해도 원래 오후 6시30분에 시작하던 프로야구는 방송사가 중계하기로 하면 30분을 앞당겨 6시에 시작했었다. 9시 뉴스 시간을 맞춰주기 위해서였다.(이는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이렇듯 ‘언제나 이미’ 스포츠는 방송되어 왔다. 복잡한 담론과 투쟁이 이어지던 시대에도 해태와 삼성이 맞붙으면 서울역 TV 수상기 앞은 만원이었고, 당장 다음의 끼니를 걱정해야 했던 IMF 시절에도 박찬호의 아찔한 강속구는 가슴을 울렸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야구는 우리들의 한 시대를 화려하게 장식한 영웅이었다. 그리고 그 현장에는 언제나 카메라가 있었다.

시대의 불균형을 위로하던 해태, 국가대표가 모여도 우승이라는 운명은 하늘의 뜻이라는 것을 일러준 삼성, 다가올 미래의 모습을 앞서 보여 줬던 LG의 신바람 3인방, 이 모든 것은 ‘놀음’임을 설명했던 투수왕국 현대의 극강함, 잡을 수 없는 것은 잡지 않는 것이 인생의 진리임을 성적으로 웅변했던 삼미슈퍼스타즈까지. Oh my life, Oh my baseball, Oh my TV~!

오랜 야구팬인 내게 2008년은 만족스런 분기점으로 기억될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는 해이다. 근래 들어 축구가 만들어냈던 ‘2002년의 기적’과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했던 야구였다. 그런데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전승 우승은 ‘Again 2002’를 넘어 ‘Miracle 2008’이라고 불러 마땅할 신화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신화의 끝자락은 가을에도 야구하자던 꿈을 이룬 롯데 팬들을 비롯한 500만 관중에 의해 한층 풍요로워 졌고, 야신(야구의 신) 김성근 감독에 이르러 절정을 이뤘다.

프로야구 전경기가 TV를 통해 방송된 첫해였던 올해 야구는 정말 고무적이었다. 80년대 후반에 태어난 선수들이 리그 투타의 간판(김광현, 김현수)으로 성장하기까지 하였으니 앞으로의 미래 역시 장밋빛이다. 다가올 WBC에서 마저 선전한다면… 야구는 그야말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시대를 열어젖힐 것이다.

프로야구는 컬러TV 이후의 한국대중문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장르 가운데 하나이다. 야구는 극복해야 할 유산이 있고, 그것을 극복하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의미를 지니는 흔치않은 텍스트이다.

어떠한가? 스포츠 없는 방송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이번 주말 글러브와 배트를 챙겨들고 공원으로 달려 나갈 용기가 있는가? 나는 차라리, 리모컨을 움켜쥘 당신들과 함께 2009 프로야구 중계를 기다리련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