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를 지향하는 오바마 후보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진보와 보수를 망라한 대다수 신문은 이를 대서특필하고, ‘오바마 시대’를 적극 환영하고 있다.

오바마의 승리는 일방주의 외교정책과 감세 위주의 경제정책을 추진해왔던 미 보수주의 세력의 ‘패배’를 의미한다. 하지만 미 보수주의와 어깨를 같이 해왔던 대한민국 보수 세력들은 이들의 패배를 애써 외면하고 동질성을 강조하고 있다. 오바마와 정책적으로 너무도 다른 이명박 대통령이 오바마 후보 당선 축사에서 “‘변화와 개혁’을 국정운영의 중요 가치로 삼아왔다는 점에서 두 정상은 공통된 철학을 공유하고 있다”고 밝힌 것이 대표적이다.

보수신문들도 대선 결과가 발표된 다음날인 6일, 1면 톱 제목을 ‘미국, 변화를 택하다’(조선), ‘미국 새로 태어나다’(중앙), ‘인종의 벽 허물고 ‘변화의 신대륙’ 문 열다’(동아)로 뽑으며 “역사의 신새벽이 열렸다”고 대대적으로 환영하고 나섰다.

▲ 중앙일보 6일자 1면 톱
이라크 파병을 찬성해왔던 보수신문들은 이제 와서 “미국은 국제사회와의 충분한 소통·공감 없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에 뛰어들었고 그 후유증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 등 그동안의 보도와 어긋난 주장을 하기도 했다. 이밖에 오바마의 대북정책, 한미FTA에 대한 강한 비판 없이 “미국의 변화에 차분하게 대처하면서 한미관계를 국익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자”고 원론적으로 언급하는 데 그치고 있다

이들의 행태는 마치 중국 고전 ‘아큐정전(阿Q正傳)’에서 주인공 아큐가 자신이 굴욕적 패배를 당했음에도 이를 인정하지 않고 정신적으로 자신이 패배하지 않았다고 자위하는, ‘아큐의 정신승리법’을 연상케 한다.

▷중앙 “오바마는 고민 털어놓고 싶은 정치인” = 조중동 3사 중 가장 무비판적으로 오바마를 환영하고 나선 것은 중앙일보다. 6일자 지면 1면부터 16면까지를 ‘오바마’로 채운 중앙일보는 1면 톱 ‘미국 새로 태어나다’에서 “오바마는 민주주의 확산으로 평화를 실현한다는 부시의 중동 민주평화론과 거리를 둘 것”이라며 “민주평화론은 종교색 짙고 독선적인 십자군 평화론, 메시아 평화론의 다른 이름”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과거에 중앙일보야말로 ‘종교색 짙고 독선적인 십자군 평화론, 메시화 평화론의 다른 이름’인 이라크 파병에 찬성을 하지 않았던가.

“자이툰 부대 파병의 가장 큰 배경은 한·미 동맹 차원이었다. 북한의 핵 위협 해소 등 미국의 협조가 현실적으로 필요한 우리의 안보환경을 무시할 수 없는 데 따른 불가피한 조치였다. 그러나 애초부터 용병으로서의 성격은 전혀 없었다. (중략) 부대원들은 태극마크를 붙이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긍심을 갖고 근무를 해 왔다. 파병에 반대한 국회의원들조차 부대원의 활약상을 보고는 눈시울을 적셨다고 한다. 이런 군대가 어떻게 ‘세계 용병’이 되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2007년 10월 26일 사설 ‘한국군이 세계 용병 공급원이라니…’)

중앙일보 배명복 논설위원이 쓴 6일 30면 ‘오바마가 보여준 지성의 힘’은 보기 낯뜨거울 정도다. 대한민국 대표 보수세력으로서 ‘진보’ 오바마를 논리적으로 비판하기는커녕 거의 ‘찬양’ 수준의 글을 썼다.

“오바마의 글은 침착·배려·깊이·균형·솔직성 등의 단어가 어울린다.…적어도 화제가 스포츠와 아이들 문제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부시는 사귀면 좋을 사람이라는 게 오바마의 평가다. 함께 맥주잔을 기울이며 부담없이 얘기를 나누기엔 제격이란 뜻일 것이다.…내게 오바마는 진지하게 고민을 털어놓고 싶은 정치인이다. 개인적 삶의 문제에서, 국가와 세계의 온갖 모순과 갈등에 대해 함께 얘기를 나눠보고 싶은 정치인이다. 함께 맥주잔을 기울이기에 좋은 정치인(부시)보다 적어도 나은 결과를 낳을 것은 확실해 보인다.”

중앙일보는 6일 사설 ‘역사를 바꾼 미국의 선택’에서도 “우리는 미국과 세계를 위해 변화가 필요한 시점에 과감하게 변화를 택한 미 국민의 용기있는 선택에 경의를 표한다”며 “좌우와 흑백을 아우르는 통합의 정치로 미국이 필요로 하는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동아 “MB와 오바마, 금융위기 해법은 비슷” = 동아일보도 오바마 당선을 ‘흑과 백이 손잡고 만든 감동의 ‘미드’’(4면)라고 평가하며, 오바마가 걸어온 길 등 오바마 관련 기사를 1면부터 14면까지 배치했다.

▲ 동아일보 6일자 1면 톱
동아일보는 6일 사설 ‘오바마 새 역사를 쓰다’에서 “미국은 물론이고 세계사적 의미가 자못 크다. 미국 건국 232년 만의 첫 흑인 대통령이거니와 이 젊은 지도자가 약속한 ‘변화와 희망’에 세계가 목말라있기 때문”이라며 “미국은 국제사회와의 충분한 소통·공감 없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에 뛰어들었고 그 후유증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이 새로운 리더십을 보여주는 게 현실적으로 최선의 대안”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동아일보 역시 중앙일보과 마찬가지로 과거에 이라크 파병을 적극 찬성했던 신문 가운데 하나다.

“설익은 반미(反美) 잣대로 이라크 파병의 의미를 훼손하는 일이 반복돼서는 안 된다. 우리는 6·25전쟁 때 국제사회의 도움으로 나라를 구하고 전화(戰禍)를 이겨 냈다. 그런 빚이 없더라도 세계 평화에 대한 기여는 문명국의 책무에 해당한다. 더구나 이라크는 50, 60년 전 우리처럼 국가 존망이 위태로운 상태다. 베나지르 부토 전 파키스탄 총리를 암살한 국제테러범들이 아직도 이라크를 휘젓고 있다. 국군이 이라크를 돕는 일은 값지다.”(2007년 12월 29일 사설 ‘국군의 세계평화 기여 자랑스러워해야’)

동아일보는 6일 13면 ‘MB노믹스 VS 오바마노믹스’에서 부자감세 반대 정책 등 오바마와 이명박 대통령 경제정책의 많은 차이점은 축소하고 경제위기 국면시 재정지출을 확대한다는 기조가 같다는 것을 확대시켜 애써 ‘우리는 서로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동아일보는 여기서 더 나아가 ‘규제 완화의 정당성’까지 끌어들인다.

“MB노믹스가 규제완화와 감세를 통한 ‘작은 정부, 큰 시장’을 지향하고 있다면 오바마노믹스는 ‘규제강화와 부자에 대한 증세, 재정확대를 통한 정부의 시장개입 확대’로 요약된다.…다만 금융위기 국면에서 한국도 재정지출 확대 등 정부의 역할 확대를 지향한다는 점은 오바마 당선인과 같은 방향. 육동한 기획재정부 경제정책국장은 ‘무조건 양국 간 차이점을 부각시키기보다는 미국과 한국이 처한 현실에 차이가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은 아직 규제가 너무 많다는 얘기다.”

▷조선 “오바마 당선은 혁명적 사건” = 앞선 신문들과 마찬가지로 조선일보 역시 1면부터 12면까지 오바마 이력, 미 현지 상황, 승리 요인 등을 자세하게 보도하며 ‘오바마는 결점을 자산으로 바꾸는 스타일이라 적을 만들지 않고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5면)고 오바마를 한껏 띄웠다.

▲ 조선일보 6일자 1면 톱
조선일보는 3면 ‘스스로 고치며 진화하는 미국…화합의 시대로’에서 “부시 대통령 재임기간을 ‘잃어버린 8년’으로 비판하고 미국의 근본적 변화를 추구하는 오바마 후보의 당선은 미국 사회에 획을 긋는 혁명적인 사건”이라며 “국제사회는 47세의 젊고 똑똑하지만 연방 상원의 초선의원이라는 짧은 경력의 오바마가 최악의 경제 위기 속에서 어떻게 제한된 자원을 활용해 새로운 미국의 시스템을 만들어갈지, 국제사회에 어떤 리더십을 발휘할지에 주목하고 있다”고 전했다.

조선일보는 6일 사설 ‘오바마의 미국, 오바마와 세계’에서도 오바마식 정책에 대한 비판이나 쓴소리보다는 ‘앞으로 잘 대처하자’는 원론적인 수준의 언급만 했다.

“오바마 당선자의 등장은 한국에도 새로운 도전이다. 상원의원 3년10개월이 국정을 다뤄본 경험의 전부인 그는 한국과 한반도 문제를 다뤄본 경험이 없다. 우리 정부는 한미동맹에 대한 종합적 재검토 과정과 미·북 대화와 6자회담의 재조정 과정에서 한국의 역할, 그리고 한·미FTA의 완결 문제 등에 대한 한미논의의 대비를 서둘러야 할 것이다.”

이라크 미군 철수를 비롯해 △5% 부유층 세금 강화 △전국민건강보험 등을 주요 정책으로 하는 오바마 후보의 당선은 그동안 친미노선을 걸어왔던 대한민국 보수 세력들에게 ‘위협’과도 같다. 정부와 보수신문이 ‘세금폭탄’이라며 무력화하려 하는 ‘종합부동산세’의 경우, 오바마 시대에는 권장할 만한 정책이 될 테니 말이다.

그런데도 보수신문이 그간 표방해왔던 ‘보수주의 노선’과 완전히 반대되는 ‘진보’ 오바마의 등장을 적극 환영하고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대세를 거역할 수 없어서인가, 아니면 대한민국의 보수는 ‘진정한 보수’가 아니기 때문인가.

뉴라이트 진영의 대표적 이론가인 이상돈 중앙대 교수가 지난 3일 쓴 ‘오바마의 미국을 보는 한국의 보수 진영’에 그 해답이 숨어있을지도 모르겠다(독립신문(http://www.independent.co.kr/). 이 교수는 이 글에서 오바마에 대한 보수신문들의 태도를 아프게 꼬집고 있지만, 이 진영에서 이런 류의 글을 보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한국 보수진영이) 미국의 급진적 정치세력에 대해서 이렇게 너그러운 이유를 나는 이해하기 어렵다. 이들이 제대로 알지를 못해서 그러는 것일까 ? 아니면 또다시 대세(大勢)에 순응(順應)하는 것인가?…폭스뉴스의 빌 오라일리는 ‘미국의 유권자들은 공포(fear)에 몰려 무조건 새로운 사람(new guy)을 지지하고 있다’고 했다. 워싱턴포스트의 보수성향 칼럼니스트 조지 윌(George Will)은 ‘이번 선거에 진다고 해서 공화당이 완전히 무너지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오바마를 칭찬하는 한국의 ‘보수’가 진정한 ‘보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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