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앞둔 사람이 마지막으로 찾은 기자. 어떤 억울함에 대한 증명으로 죽음을 택하는 사람이 그 억울함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선택한 기자라면 평소에 그 기자는 취재원과 상당한 신뢰 관계를 쌓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 억울함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말이다. 고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을 인터뷰한 경향신문 이기수 기자는 그런 분이라고 한다.

경향신문은 훌륭한 기자를 두었고, 십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한 중요한 인터뷰를 했으며, 이를 잘 벼려서 보도했다. 경향신문은 50분 동안의 인터뷰 가운데 핵심적인 사안을 하나씩 꺼내 보도했고, 사실관계를 단계적으로 드러냈다. 이 과정에서 이완구 총리와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 '성완종 리스트' 거론 인사들의 거짓말과 비윤리성이 더 명징하게 부각됐다. 한꺼번에 전문을 공개했다면, 해명 과정에서의 오류로 리스트 거론 인사들의 거짓을 확인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발언의 진실 공방만 뜨거워졌을 것이고, 늘 그렇듯 사안을 보는 시선만 둘로 갈라져 소모적인 갈등이 이어졌을 것이다.

문제는 엉뚱한 데서 터졌다. JTBC가 15일 밤 경향신문의 고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 인터뷰 음성 녹취파일을 입수해 보도했다. 경향신문이 검찰에 녹취파일을 전달하고, 16일치 신문으로 녹취록 전문을 공개하기 위해 초판 신문 인쇄를 모두 마친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먼저 사건 경위를 살펴보자. 경향신문은 10일 첫 보도부터 15일 보도까지 성 전 회장 인터뷰의 기본적인 사안들에 대한 보도를 마쳤다. 경향신문은 이 녹음 파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성 전 회장의 유족과 상의했다. 유족들은 진실 규명과 수사 협조 차원에서 녹음파일을 검찰에 제공하는 것에 동의했고, 전문을 싣는 데도 동의했다. 이에 경향신문은 15일 오후 수사를 위해 검찰에 녹취 파일을 제공하고, 16일치 지면에 녹취록 전문을 공개하기로 했다.

이때 디지털 포렌식(증거 추출) 전문가 김인성 소장이 등장했다. 그는 자진해서 경향신문에 찾아와 파일이 훼손되지 않도록 하는 원본 추출 작업에 동참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검찰에 휴대전화 녹음 파일을 넘기기 전에 보안을 위한 작업이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경향신문은 이에 응했고, 김 소장의 컴퓨터로 원본 추출 작업을 했다. 이후 경향신문 기자가 김 소장과 함께 검찰청에 녹음 파일을 전달했다. 이 과정에서 김 소장은 컴퓨터에 녹취 파일을 확보했다. 김 소장은 해당 파일을 오후 6시쯤 JTBC 기자에게 넘겼다.

JTBC가 15일 밤 보도한 '성완종 녹음 파일'은 바로 이것이었다.

▲ 4월 15일 JTBC <뉴스룸> 화면 캡처

우선 전제해야 할 것이 있다. 나는 경향신문이 인터뷰 전문을 모두 공개하기 전까지 검찰에 녹음 파일을 제출하지 않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검찰은 수사 진행 속도상 경향신문이 지금까지 공개한 인터뷰 내용을 확인 수사하는 일정도 벅찰 것이다. 만약 생각보다 수사 속도가 빨랐다 하더라도 경향신문의 인터뷰 내용 이외의 정치자금 관련 확인 사항들이 충분히 있었다. 제출을 한다해도 굳이 15일에 급하게 할 필요도 없었다. 무엇보다 언론은 검찰에 취재 내용을 제출할 의무가 없다. 경향신문은 피의자 신분도 아니다. 하지만 경향신문은 제출을 선택했고, 나는 그 선택에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며, 선택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전제를 두고 앞의 사건 경위에 대해 말해본다면, 김 소장과 JTBC의 녹음 파일 입수 경위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먼저 김 소장은 보안이 생명인 디지털포렌식 업체 소장이다. 그는 블로그에 "디지털포렌식은 신의와 성실, 보안을 생명으로 한다"고 써놨다. 하지만 그는 경향신문의 고유한 취재 기록을 경향신문 기자 몰래 자신의 컴퓨터에 복사했다. 일종의 절도 행위다. 심지어 절도 행위를 통해 확보한 '장물'을 평소 친분이 있는 JTBC 기자에게 건넸다. 김 소장은 이런 행동을 할 아무런 권리가 없다. 이 행동에는 어떤 공익성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 행동에 공익성이 있으려면 경향신문이 취재 기록을 은폐할 것이라는 전제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만약에 절도성 취재 기록 훔치기라고 하더라도, 일정 부분 양해할 수 있는 지점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경향신문은 15일까지 녹음 파일의 핵심들을 보도해왔고, 16일치에는 전문까지 공개할 예정이었다. 김 소장은 경향신문 쪽에 "경향신문이 보도하고 나면 활용하라고 JTBC 기자에게 준 것이다. 책임을 통감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미 그런 정도의 말로 돌이킬 수 없는 사안이 되었다.

더 큰 문제는 JTBC다. 손석희 JTBC 보도부문 사장은 15일 밤 보도를 하면서 이런 오프닝 멘트를 했다.

"성완종 전 회장이 목숨을 던지던 날 새벽, 경향신문 기자와 통화한 녹취록 전체를 입수했습니다. 1부에서 예고해드렸지만 경향신문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다른 곳에서 입수했습니다. 특히 대부분의 분량을 공개해드리는 이유는··(중략)··시민의 알권리와 관련된 부분이니까요."

이 오프닝 멘트에는 여러가지 문제가 존재한다.

첫째, 녹취록 입수 경위에 대한 문제다. 손 사장은 "경향신문과는 상관없이 다른 곳에서 입수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위에서 밝혀진 입수 경위를 보면 이 말은 사실과 달랐다. 경향신문과 상관이 없지 않았다. 분명히 경향신문의 녹음 파일이었고, 김 소장이 경향신문을 통해 확보한 녹음 파일이었다. JTBC 기자가 이를 몰랐을 리 없다. 만약 손 사장이 이를 몰랐다면, JTBC의 보고 체계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이 된다.

둘째, '시민의 알권리' 부분이다. 언론사가 구체적인 설명없이 '시민의 알권리'를 거론할 때는 자신들의 취재 경위가 떳떳하지 못할 때인 경우가 많다. 취재 경위가 떳떳하지 못하니, 이에 대해 어떤 윤리적 포장을 해야하고, 이때 틀림없이 등장하는 수사가 바로 '시민(국민)의 알권리'다. 이번 경우도 그랬다. 음성 파일을 입수한 JTBC의 녹음 파일 입수 경위는 떳떳하지 못했다. 심지어 어떤 공익성도 없었다. 왜냐하면 경향신문이 이미 16일치 신문에 전문을 공개하겠다고 예고를 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JTBC가 신문이 공개되는 16일 아침보다 몇 시간 더 일찍 방송에서 이를 공개해야 할 급박한 사정같은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게다가 경향신문은 이 파일을 검찰에 제출하기도 했다. 경향신문이 이 파일을 독점하려고 하지도 않았다는 근거다.

'시민의 알권리'가 필요한 영역은 따로 있다. 공공기관이나 기업 등에서 사회가 공익적으로 공유해야 할 사실을 은폐하려 할 때다. 이를 취재하는 경우는 다소 취재 경위가 떳떳하지 못한 문제가 있더라도 보도의 공익성에 따라 문제의 책임을 경감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때도 '시민의 알권리'라는 두루뭉술한 개념보다는 보도로 인해 어떤 공익성이 있는지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이 옳다. '시민의 알 권리'는 '개인의 일탈'만큼이나 무책임한 개념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손 사장이 16일 밤 JTBC '뉴스룸' 클로징 멘트로 이 문제에 대해 해명했다. 먼저 해명 전문을 보자.

"당초 검찰로 이 녹음파일이 넘어간 뒤에 이 녹음 파일을 가능하면 편집없이 진술의 흐름에 따라서 공개하는 것이 공익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봤습니다. 또한 이 파일이 검찰의 손에 넘어간 이상 공적 대상물이라고 판단하기도 했습니다. 저희들은 경향신문이 전문을 공개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글자로 전문이 공개된다 해도 육성이 전하는 분위기는 다를 수밖에 없다고 봤고, 육성이 갖고 있는 현장성에 의해서 시청자가 사실을 넘어서 진실에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굳이 경쟁하듯 보도를 했느냐, 라는 점에 있어서는 그것이 때론 언론의 속성이라는 점만으로 양해되지 않는다는 점을 잘 인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부분에 대한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감당해나가겠습니다. 저희들은 고심 끝에 궁극적으로는 이 보도가 고인과 그 가족들의 입장, 그리고 시청자들의 진실 찾기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을 내렸지만, 그 과정에서 입수경위라든가 저희들이 되돌아봐야할 부분은 냉정하게 되돌아보겠습니다. 저나 저희 기자들이나 완벽할 순 없습니다만 저희 나름대로의 진정성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앞으로도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이 해명 역시 여러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첫째, "녹음 파일을 가능하면 편집없이 진술의 흐름에 따라서 공개하는 것" 자체는 공익에 부합하지만, 그것이 경향신문이 아니라 JTBC여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경향신문이 이미 15일까지 핵심 녹취를 공개해왔고, 16일에 전문을 공개하겠다고 예고했으며, 이를 지켰기 때문이다.

둘째, 경향신문의 녹취가 검찰로 넘어갔다고 해서 그것이 "공적 대상물"이 되는 건 아니다. 경향신문은 어디까지나 수사 협조와 법정 증거를 위해 녹음 파일을 제출했다. 그것은 다른 언론사의 보도를 위한 대상물이 될 수 없다. 특히 "경향신문의 전문 공개가 그것(그들도 공적 대상물이 됐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면 더더욱 JTBC가 몇 시간 앞서 이런 보도를 경쟁적으로 할 필요가 없었다. 앞뒤가 맞지 않는 논리다.

셋째, 글자로 공개되는 녹취와 육성 녹취는 느낌이 다를 수는 있다. 하지만 그 다름이 "시청자가 사실을 넘어서 진실에 가까이 갈 수 있을"만한 차이가 될 수는 없다. 심지어 경향신문은 15일까지 성 전 회장의 육성 녹취로 유튜브를 통해 공개해왔다. JTBC가 공개한 내용과 별 차이도 없었다. 되레 JTBC가 '뉴스룸' 방송 시간에 쫓겨 어설프게 녹취한 자막이 사실 관계를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됐다.

넷째, 무엇보다 핵심적인 문제는 입수경위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미 JTBC가 김 소장을 통해 음성 파일을 입수했다는 사실은 15일 밤 이후 몇 시간 만에 공론화되어 있다. 그렇다면 JTBC가 16일 '뉴스룸'에서 이 경위를 직접 밝히고, 입수경위의 비윤리성에 대해 사과를 해야 했다. "냉정하게 되돌아보겠습니다"는 말은 두루뭉술한 자기중심적 변명일 뿐이다. 이런 해명은 아니함만 못하다. 기자협회의 윤리강령 4조 '정당한 정보수집'을 보면, '우리는 취재과정에서 항상 정당한 방법으로 정보를 취득하며, 기록과 자료를 조작하지 않는다'고 적혀 있다. 이 강령을 문자 그대로 따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면 적어도 그러지 못했던 이유라도 분명하게 밝혔어야 하지 않을까.

그동안 손석희 사장과 JTBC가 보여온 보도는 분명히 다른 어떤 방송사 뉴스보다 탁월했다. 그런데 탁월함이란 어떤 성과를 올렸을 때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탁월함이 역설적으로 가장 빛날 때는 어떤 문제를 일으켰을 때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고, 어떻게 사과하며, 어떤 과정을 통해 성찰하느냐를 고민할 때다. 언론사의 성찰과 고민은 보도를 공유하는 사람들과 함께 공유되어야 한다. 그 성찰과 고민이 공유될 때 언론사는 비로소 이익만을 좇는 사기업이 아니라 공공성을 가진 미디어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손석희 사장과 JTBC는 탁월한 공공성을 가진 미디어가 될 기회를 그렇게 한 번 놓쳤다. 그저 한 차례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한 번 벌어진 틈은 벌어질 때보다 봉합할 때가 훨씬 어렵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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