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원외교 관련 비리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던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금품 메모'가 발견되면서 정국이 대혼란에 빠졌다.

<경향신문> '단독' 인터뷰 반나절 만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커져버린 사건

성완종 전 회장은 세상을 떠나기 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김기춘·허태열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에게 금품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금품을 전달한 시점은 2006년 박근혜 대통령이 독일에 방문했을때와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했을 때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고 나서, <경향신문>이 녹취 파일 공개를 예고하자 검찰 관계자는 성완종 전 회장의 주머니에 금품 전달 내역 등으로 추정되는 내용이 적혀진 쪽지가 발견됐다고 밝혔다. 그리곤 곧장 일부 매체를 통해 메모의 상세 내용이 다시 밝혀졌다. <경향신문>의 단독 보도 이후 반나절만에 혼란이 도저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너무 갑작스런 사태 전개에 언론마저도 황당해하는 기류가 느껴진다. 애초 자원외교 검찰수사는 전임 정권을 겨냥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전 정권의 관계자들에 대한 사법처리는 매 정권마다 반복되는 것인데, 이명박 전 대통령 역시 이를 예상했는지 ‘회고록’ 발간을 통한 일정한 반격을 할 수 있음을 시사해 주목받았던 바 있다. 그러나 정작 본격적인(?) 반격이 시작되기도 전에 성완종 전 회장의 죽음으로 자원외교 검찰 수사는 사실상 좌초 위기에 빠졌다. 이명박 전 대통령 측의 입장에서는 손도 대지 않고 코를 푼 셈이다.

▲ 경향신문이 유튜브에 업로드한 성완종 전 회장의 육성 재생 화면. (연합뉴스)

손도 대지 않고 코 푼 이명박 전 대통령, 당황 넘어 당혹스러워진 검찰

검찰로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자원외교 관련 수사의 핵심 피의자가 자살한데다 권력 실세와 관련한 통제할 수 없는 ‘폭탄’까지 터졌기 때문이다. 성완종 전 회장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검찰이 자원외교 관련 수사에서 진척을 보이지 못하자 개인비리를 별건 수사해 ‘딜’을 시도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만일 사실이라면 이는 검찰총장이 물러날 만한 일이다.

게다가 성완종 전 회장의 주장은 사실상 박근혜 대통령의 2007년 대선후보 경선자금을 가리키고 있어 정치적 부담도 상당하다. 살아있는 권력의 ‘돈 문제’나 ‘정통성’을 건드리는 것은 엄청난 부담을 각오하고서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채동욱 전 검찰총장 역시 권력이 정통성 문제에 도전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그런데 소위 이 ‘성완종 리스트’에는 양자의 문제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분명하게 겹쳐있다.

성완종 전 회장이 남긴 메모는 명백하게 박근혜 정권의 자원외교 수사에 대한 불만을 표하고 있다는 점은 더욱 문제다. 성완종 전 회장의 메모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소위 친박으로 분류되는 유력 정치인들이다. 박근혜 정권 청와대의 1, 2, 3대 비서실장이 모두 포함됐다. 일부 정치권의 호사가들은 성완종 전 회장이 직접 국회의원이 될 정도로 정치권과 친밀한 기업인이었던데다 ‘마당발’로 통했기 때문에 메모에 있는 리스트를 넘어서는 광범위한 정관계인사들을 상대로 ‘로비’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심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성완종 전 회장이 박근혜 정권의 실세 정치인들만 콕 찝어 메모를 남겼다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고발’에 준하는 행위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수사하지 않을 도리 없지만, 수사 할 수 없는 상황‥제 무덤 파버린 살아있는 권력

검찰 입장에서는 메모까지 나온 마당에 수사를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물론 이 수사가 기소까지 이어질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성완종 전 회장은 사망했으므로 더 이상의 증언을 추가로 내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이 성완종 전 회장의 죽음에는 검찰의 자원외교 수사 부적절성이 큰 원인을 제공했다. 성완종 전 회장이 기자회견까지 열어 자신은 ‘MB맨’이 아니라는 점을 피력하였음에도 이와 같은 의사가 전혀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음모론적 관점을 제기해본다면 검찰은 오히려 성완종 전 회장의 정관계 인사 로비 관련 자료를 추가로 확보해서 친박, 친이, 야권을 겨냥한 어떤 그림이라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이 사건에 대한 검찰의 수사를 오히려 믿지 못하는 상황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야당 일각에서 ‘특검’을 거론하는 것은 그래서다. 새정치민주연합 유승희 최고위원은 이날 오전 확대간부회의에서 “성완종 전 회장의 유서를 공개해야 한다. 청와대 문건 유출 사건과 관련해도 당시 검찰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최 모 경위의 유서 공개를 막은 바 있다”면서 “성완종 전 회장 죽음에 대한 특검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을 맡고 있는 새정치민주연합 이상민 의원 역시 언론을 통해 “권력 핵심과 관련된 사안이고 성 전 회장이 표적수사라고 억울하다고 밝혀 왔던 만큼 특검이나 국정조사를 검토해 봐야 할 것”이라고 발언했다.

그러나 특검이 가능할지 여부는 불투명하다. 새누리당 내에서 가장 개혁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는 초·재선 의원 모임인 ‘아침소리’는 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검찰은 성 전 회장이 죽음이라는 극단적 방법을 통한 문제제기에 대하여 절대로 눈을 감아서는 안된다”면서 “성 전 회장이 목숨을 끊은 것이 검찰의 강압 수사 때문이라는 논란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이번 성 전 회장 주장에 대해 검찰의 신속하고 투명한 수사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또, 아침소리는 “성완종 리스트 연루자들은 검찰의 수사에 성실하게 임해야 한다”고도 덧붙였다. 위의 특검론과 대비해보면 여기서 방점은 ‘검찰’에 찍힌다.

특검도 검찰 수사도 정답될 수 없다, 다시 한 번 '제 1야당'의 정치력을 믿어 볼 밖에

이런 반응들을 볼때 4·29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여당은 나름대로 선명한 원칙을 내세우며 철저한 수사를 언급하겠지만 결국 자신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가능한 검찰의 손에 수사를 맡김으로써 상황의 통제를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 또, 사실상 정권이 직접 하명한 수사 과정에서 벌어졌다는 사태의 특성을 감안하면 특검을 통해서조차도 사건의 진상이 명명백백히 가려지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수준이라고 볼 수도 있다. 성완종 전 회장의 메모는 자원외교 관련 수사를 현 정권과 전임 정권을 하나의 고리로 묶는 거대한 중량감의 사건이 만들어 버렸다. 특검을 도입해도 이 사건을 심부까지 낱낱이 해체하는 것은 어렵다.

▲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와 4.29 재보궐 선거 관악을에 출마하는 정태호 후보가 10일 오후 서울 관악구 난곡사거리에서 시민들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다만 정치적 맥락에서 이 사건이 규정되는 상황을 감안할 수는 있을 것 이다. 이날 오후 새정치민주연합은 문재인 대표 주재의 긴급회의를 열어 이 사건을 ‘친박 권력의 부패사건’으로 규정했다. 받아들이기에 따라서는 새삼스러운 이야기일 수 있지만 상황을 이렇게 규정한 것은 4·29 재보궐선거의 구도를 그간의 경제정당론에서 전형적인 정권심판론으로 가져가겠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여기에 대중적 지지가 집중되고 정치적 동력이 형성되면 올해 하반기까지 성완종 전 회장 자살과 자원외교 수사에 대한 공세의 기회를 잡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박근혜 정권이 또 기기묘묘한 곡예(?)를 동원해 무슨 수를 쓰지 않는 이상 야권은 유리한 고지를 점할 것이다. 제1야당은 지금 이를 위한 정치력을 보여줄 수 있느냐의 기로에 서있다.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다른 방법도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이 사건의 진상을 모두 밝힐 것을 직접 지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완종 전 회장의 메모에 등장한 인사들의 사실상 2선 퇴진을 진두지휘하고, 다소 지겨운 감이 없지 않지만 부정부패를 일소할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1주기인 오는 4월 16일에 남미 순방을 떠날 예정이다. 늘 주문했지만, 언제나 실패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비상한 대응을 구상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니 믿을 것은 어쩔 수 없이 다시 제1야당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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