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군 부역자로 몰려)죄명도 모른 채 사형당한 사건 얘기해보라”
“어디 가서 한국방송 팀장이라고 하지 남녘방송 팀장이라고 하지 않을 것 아니냐”
“시청자들은 ‘(이승만이) 피난민 막으려고 한강다리 폭파했나’고 볼 거 아니냐”
“왜 그런 결정(한강다리 폭파)을 내릴 수밖에 없었는가 설명했어야지”

KBS 다큐멘터리 <뿌리깊은 미래>에 대한 방송심의소위 심의위원들의 발언들이다. 뉴라이트 출신으로 ‘역사편향’ 이인호 KBS 이사장이 광복 특집으로 제작된 자사 다큐멘터리 <뿌리깊은 미래>에 대해 “북한이 할 만한 내레이션이 나왔다”는 등 제작편성 개입발언(2월11일) 이후,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동아일보>는 ‘KBS, 좌편향 다큐 내보내며 수신료 인상 요구할 수 있나’라는 제목의 사설(2월13일)을 실어 ‘좌편향’이라고 몰아붙였고, 방통심의위는 해당 프로그램에 대해 법정제재 중징계를 예고했다.

▲ 7일 KBS 1TV에서 방송된 광복 70주년 특집 프로그램 <뿌리 깊은 미래>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산하 방송심의소위원회(위원장 김성묵)는 1일 광복 70주년 특집으로 제작된 KBS 다큐멘터리 <뿌리깊은 미래> 심의를 진행했다. 민원인은 해당 다큐가 “사실과 다른 내용을 방송해 왜곡된 역사인식을 조장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제9조(공정성)과 제14조(객관성) 위반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해당 다큐멘터리는 보수성향 진영에서 △‘남녘사람’이라는 표현이 자극적으로 부각되면서 △‘남침’ 용어 미사용, △한강다리 폭파와 서울수복 및 부역자 처벌, △흥남철수, △미 군정의 쌀수급 정책과 대구사건 등에 대해 좌편향돼 있다고 주장했다.

방송심의소위는 KBS <뿌리깊은 미래>와 관련해 정부여당추천 3인(김성묵·함귀용·고대석)은 재허가시 감점요인이 되는 법정제재 ‘경고’(벌점2점)를 주장했다. 야당추천 2인(장낙인·박신서)은 행정지도 ‘의견제시’ 의견을 밝혀 ‘미합의’로 전체회의에 상정됐다. <뿌리깊은 미래>는 방통심의위 전체회의 또한 정부여당 추천 심의위원들이 다수(9명 중 6명)를 점하고 있어 중징계를 피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KBS, “논란 유감…‘남침’ 의도적 누락 아냐”

의견진출차 출석한 KBS 기획제작국 김형석 팀장은 “기획의도와 다르게 논란이 야기된 것에 대해 유감”이라며 “기획의도는 대한민국 초상이라는 컨셉으로 일반인들이 광복 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어떻게 번영된 내용을 다루고자 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국내외 정치상황이 많이 생략돼 불균형 정보로 오해를 산 것 같다”고 말했다.

김형석 팀장은 “‘남침’이라는 적시를 안 했다고 하시는데 의도적으로 누락한 것은 아니다”라면서 “그 당시를 살았던 보통사람들이 어떻게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려고 애썼는지 초점을 맞추다 보니 그런 부분들이 생략됐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팀장은 “2부 다큐 중 화면 그림상으로 봤을 때, 충분히 남침이라는 것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남녘사람’이라는 표현에 대해서도 “피란 무리에는 북한군도 종종 섞여 있었다. 그 과정에서 신분검사를 할 때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우리편’이라는 상징성을 증명하기 위해 했던 용어”라고 해명했다. 진술과정에서 김 팀장은 “결과적으로 불균형이 생겼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책무를 무겁게 생각하겠다”고 제작과정에서의 실수를 수긍하기도 했다.

함귀용, “죄명도 모른 채 사형당한 사건 하나라도 대봐라”

방통심의위는 KBS <뿌리깊은 미래>를 시종일관 ‘좌편향’ 다큐로 몰았다. KBS 이인호 이사장과 <동아일보> 등 보수매체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았다. 정부여당 추천 함귀용 심의위원은 심의 말미 의견진술차 출석한 김형석 팀장에게 “어디 가서 한국방송 팀장이라고 하지 남녘방송 팀장이라고는 하지 않을 것 아니냐”는 비아냥조의 냉소 섞인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 2월 13일자 동아일보 사설

함귀용 심의위원은 KBS <뿌리깊은 미래>와 관련해 △한강다리 폭파와 서울수복 및 부역자 처벌, △흥남철수 2가지를 가장 큰 문제로 꼽았다. 함 심의위원은 “제일 문제가 되는 부분은 서울이 수복되고 피란민이 돌아오자 피란가지 못하고 남아있던 사람들이 부역자로 몰려 ‘정확한 죄명도 모른 채 사형당하는 사람도 있었다’는 부분”이라며 “625전쟁 당시 수복한 후 부역혐의자은 전부 재판을 받았고 그 기록이 다 나와 있다.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함 심의위원은 “죄명도 모른 채 사형당한 사건 단 하나라도 이야기를 해보라”로 몰아붙였다.

KBS <뿌리깊은 미래> 중 인민군의 부역자로 몰려 죽었던 민간인 이야기에 대해서도 시비를 걸었다. 함귀용 심의위원은 “제가 역사관이 달라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그 당시)북한 인민군들에게 학살당한 12만2000여명의 민간인들이 가장 억울한 죽음이 아니냐”며 “그런데 이런 부분들은 다루지 않았다. 이런 것들은 관심 밖이어서 찾아보지도 않았느냐”고 고압적인 자세를 취했다. 또 “왜 북한 사람들이 월남했다고 생각하냐”는 등 역사적 사건에 대해 검증하듯 안건과 관련 없는 내용에 대해 여러 차례 묻기도 했다.

“우리나라가 죄도 없는 사람(인민군 부역자)을 처형한 것처럼 이 부분만 딱 언급하는 것이 KBS 공정성·객관성 가이드라인에 비춰 맞다고 보나? ‘인천상륙작전’, ‘서울 수복’이 언제인지 아나? 대한민국 정부는 서울 수복할 경우, 부역자 관련 문제가 될 것을 알고 임시 특례법도 만들고 사형을 최대한 자제하라는 법부터 만들었다. 그래서 서울에서는 부역자라고 신고하면 검거해 기소하고 재판받았다. 죄명도 모르고 사형당했다는 것은 역사적 팩트는 아니다. 인민군에 의해 정말 억울하게 죽은 12만2000명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도 없다. 제가 떨려서 말이 잘 안 나올 정도”_함귀용 심의위원

KBS <뿌리깊은 나무>가 흥남철수와 관련해 ‘당시 부두에 민간인이 남아 있었다’라는 내래이션도 논란이 됐다. 함귀용 심의위원은 “영화 <국제시장>을 통해 많은 국민들이 알게 됐지만 개인적으로 흥남철수에 대해 어릴 때부터 미 해병 통역장교였던 아버님에게 들어와서 잘 알고 있다”며 “당시 미군은 한 사람의 피란민을 더 살리기 위해 전쟁물자를 다 버렸었다. 인간 생명의 문제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KBS <뿌리깊은 나무>에는 이런 언급은 전혀 없다. 사람들을 남겨놓고 폭파신을 보여줌으로서 시청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가 뭔가”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함귀용 심의위원은 “‘삼팔선에서 총격적은 으레 있었다’는 얘기는 북침을 주장할 때 나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피란민 막으려고 한강다리 폭파했나’라고 볼 거 아니냐”

또 다른 정부여당 추천 고대석 심의위원은 “생략해선 안 되는 것까지 생략을 해서 문제”라며 “‘북한의 남침으로’라는 글자 수도 많지 않은데 이거 하나 넣어주면 안 되는 거였냐”라고 말했다. 고 심의위원은 “‘피란민이 건너던 다리를 폭파했다’라고 하면 시청자들은 ‘(이승만 대통령이) 피란민을 막으려고 했나’라고 볼 거 아니냐”며 “북한의 남침을 저지하기 위해 고육지책으로 그렇게 했고, 그러다보니 피란민이 희생됐다고 하면 되지 않느냐. 다큐의 기본을 너무 무시했다”고 불편함을 드러냈다. 이어, “달랑 이것만 본 사람들은 ‘미군’, ‘우리 군’이 잘못했다고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김성묵 소위원장은 “본인(KBS 제작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역사관점이 다른 쪽에서 볼 때에는 표현들이 오해를 살 수 있다”며 “‘쌀의 자유판매가 독이었다’, ‘시위는 미군정과 경찰에 의해 진압됐다’라는 표현은 ‘미군정의 실패 만으로만 본’ 역사적 사실에 있어서 불균형의 결과”라고 지적했다. 김 소위원장은 이승만 정권의 한강다리 폭파와 관련해서도 “적어도 왜 그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해 추가적으로 설명해져야 사실관계가 분명해진다. 이 같은 내레이션에 대한 문제들이 도처에 깔려 있다. ‘남녘사람’이라는 표현 또한 마찬가지”라고 덧붙였다.

반면, KBS <뿌리깊은 미래>에 대한 야당추천 심의위원들의 판단은 정반대였다. 장낙인 상임위원은 ‘친일미화’ 논란을 야기했던 백선엽 다큐와 관련해 ‘문제없음’ 결정을 내렸던 과거 사례를 들어 “의견제시가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장낙인 상임위원은 “(2부작)다큐멘터리에 모든 내용을 담을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장 상임위원은 ‘중요한 내용이 생략됐다’는 정부여당 추천 심의위원들의 지적에 “오히려 달리 해석할 수도 있는 문제”라며 “폭파배경에서 우리나라 대통령(이승만)이 먼저 피신하고 이런(거짓) 방송을 해서 혼란을 야기 시킨 부분은 매우 중요한 사건인데 빠진 게 아니냐”라고 비판했다. 이어, ‘남녘사람’에 대해서도 “2부에서는 대한민국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며 의도성이 있다고 보지 않았다.

“역으로 보면 21세기 판 ‘잘살아보세’ 편으로도 볼 수 있다. 새마을운동이나 대한뉘우스 그런 것들을 본 느낌이 들기도 하다. 하지만 그걸 문제 삼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잘살아보세 이런 걸 만들면 어떠나. 그런 차원에서 KBS <뿌리깊은 미래>는 나라의 발전동력이 무엇이었는지 당시를 살아온 사람들에 추점을 맞춘 다큐였다고 본다. 그런 부분들을 살리기 위해 정치·역사적 사건에 대해서는 넘어간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정도는 양해를 해야 할 부분이다”_장낙인 심의위원

‘죄명도 모른 채 사형당한 사건을 대보라’던 함귀용 심의위원의 대해서도 장낙인 상임위원은 “정당한 재판을 받지 못하고 처형당했다고 주장할 정황·증언들이 있다”며 “그런데 기록에 의한 것만 내놓으라고 하면 어떻게 하느냐”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또 다른 야당 추천 박신서 심의위원은 “다큐는 만들고자 하는 의도와 방법이 중요하다”며 “(세밀하게)들여다보면 팩트와 오류와 해석의 다툼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 큰 역사적 사건만 이야기를 하다보니 오해를 살만한 표현들이 생겼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프로그램 전체를 봐서는 문제가 없지만 단정적 표현들을 감안해 ‘의견제시’ 정도가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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