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 ‘일베’란 무엇이냐는 문제는 사실 합의되지 않고, 합의할 수도 없는 문제다. 일베가 정치적 이념의 문제인지 아니면 차별적 표현 양식의 문제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극단적 진영화에 대한 적대적 반감인지 불분명하다. 혹은 이 모두가 섞여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종종 어떤 이들은 유저로서의 경험이 ‘헤비’하느냐 ‘라이트’하느냐를 따지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세대론’으로 접근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일본의 유사 사례와 비교 논쟁하는 담론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각기 다른 결들을 갖고 있지만 그래도 공통분모를 꼽자면 그 일련의 경향들이 갈라치기 위한 절차였단 점이다. 어찌되었건 배제를 먼저 상정하고 그 배제의 정당함을 보조적으로 납득시키기 위해 논리를 동원하는 방식이었다.

물론, 일베냐 아니냐가 아닌 다른 기준선이라면 문제를 충분히 논할 수 있다. ‘일베’이건 아니건 인터넷 상의 사적 영역에서 한 개인이 어떤 정치적 이념을 표출해 왔으며, 어떤 방식의 표현을 해왔고, 그것이 최소한의 합리적 공적 활동을 하는데 무리가 있을 수준이냐 아니냐를 논할 수 있는 방법은 많다. 그리고 그 개인들이 설령 집단화 되고 조직적 양상으로 공적 활동을 전개해나간다고 해도, 낙인찍지 않는 방식으로도 충분히 제어하고 혹은 조롱할 수도 있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도 ‘모호’한 것이 사실이다. 누군가의 생각을 판별한다는 것은 언제나 임의적일 수밖에 없고, 어느 집단의 양식이 반사회적이냐를 논쟁하는 것은 대체로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일베의 문제는 전부는 아니지만 상당 부분이 이 모호성과 임의성에 걸려 있다. 그들의 반사회성이 너무나 명백한 것에 비해 그들을 규정하기란 간단치 않다는 어려움도 여기에 기인한다.

▲ 4월 1일 발행된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 노보

공영방송 KBS에 일베 기자가 정식으로 임용됐다. 그를 일베 기자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한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도 있을 순 있지만, 거의 모든 언론이 그렇게 부르고 읽는 사람들도 그렇게 인지하고 있으니 일단 제쳐두고 그렇게 지칭해보자. 일베 헤비 유저가 KBS 입사시험을 통과해 기자가 되었단 사실이 알려진 후, KBS 내부의 반응은 격렬 그 자체다. <미디어스> 편집국은 매체의 특성상 다른 매체에 비해 좀 더 일찍 관련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보도하지 않았다. 보도를 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의 판단이 쉽지 않았다. 앞서, 말한 애매함과 임의적 문제 그리고 그 개인의 윤리적 문제와 KBS라고 하는 공적 집단의 정체성이 다소 복잡했다. 일베 기자의 KBS 입성은, 공영방송 기자의 자격을 따지는 과정이 그만큼 헐거워졌다는 것이고, KBS가 그만큼 무뎌졌다는 이야기할 수도 있는 문제지만,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는 연기를 한 것이 아니라면 KBS가 반인권적 후보자를 채용할 수는 없다는 믿음도 있었다.

하지만 ‘일베’라고 하는 호명이 최근 한국 사회에서 갖는 파괴력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KBS에 일베 유저가 발을 들였다는 사실이 그처럼 호들갑스럽게 놀라운 일이어서였는지 금새 꽤 회자되는 이슈가 됐다. 결국, KBS 내부 11개 협회가 일제히 임용에 반대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쯤 되면 과거, 김인규 사장이 낙하산으로 등장했을 때 정도에 비견되는 조직적 움직임이다. 사내 안팎이 뜨거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KBS는 그 기자의 임용을 강행했다. 편집국에 배치하지 않아 당분간은 직접 취재에 나서지는 않는다지만, 그는 어쨌든 인터넷 상에서 그 끔찍한 분탕질을 하고도 모두가 선망하는 직장, KBS의 정식 직원이 됐다.

한 쪽에선 무조선 일베 기자는 안 된다며, 일베 기자가 있는 KBS엔 수신료도 낼 수 없다고 격앙된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 문제는 ‘모 아니면 도’로 판단할 수 없는 복잡한 논점을 안고 있다. 변명일수도 있겠지만, 사안을 알고도 ‘단독’ 보도를 하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예컨대, 개인의 사적 발화는 어디까지 공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그를 해고해야 한단 논리 중에 그나마 손쉬운 방법은 그가 KBS에 합격한 이후에 쏟아낸 발언들이 KBS 구성원으로서 KBS의 명예를 실추하는 행위라고 판단하는 것이었는데, 그것들은 섞여 있다. 기자가 되기 전, 차별적이고 모욕적인 사적 발화를 한 개인이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상적인 절차를 통해 입사했다면 그 입사 자격을 얻게 된 것이 더 우선하는 정체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만약, 처벌과 단죄를 해야 한다면 그게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 것인가의 문제는 더 복잡할 수 있다. 조금 추상화해 얘기한다면 개인의 권리와 공동체의 윤리가 충돌할 때, 그 갈등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의 문제일 수 있다. 물론, 이 지점에선 그가 했던 발화의 수준이 문제가 될 수 있다.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거나 혹은 윤리나 규범의 차원을 넘어서는 수준의 폭력이나 차별이 있었다면 당연히 따져볼 만 하다. 개인적으론, 일베 기자라고 불리는 그 기자의 발언이 충분히 여기에 해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를 향한 문제제기는 그 지점에서 정당하고, 그와 같은 멤버십을 공유하고 싶지 않다는 KBS 구성원들의 주장 역시 충분히 타당하다.

▲ 41기의 한 사원이 ‘선배님, 저희는 정말 두렵습니다’라는 몸자보를 하고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하지만 전 사회적으로 ‘일베 기자는 무조건 안 된다’고 몰아붙이는 것은 위험하다. KBS 내부 구성원들이, 합의할 수 없는 정체성을 가진 구성원을 선발하게 된 사내 시스템과 절차를 문제 제기하는 것과 덮어 놓고 그가 ‘일베’였으니 기자가 될 수 없고, 더욱이 공영방송의 구성원이 되는 것은 ‘KBS=일베’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차이가 크다. 일베 기자를 우려하는 점을 충분히 인정하지만 그래서 이 논의는 좀 더 넓고 깊은 논쟁으로 전환될 필요가 있다.

그 개인이 되고 안 되고의 문제를 넘어 공영방송이라고 하는 사회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스템이 작동해온 방식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행여 오작동이 있었다면 이를 개선할 방법은 무엇인지를 찾는데 전력하는 것이 누군가를 일베 기자라고 조리돌림하며 배제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아닐까. 일베 기자를 우려하는 건전한 판단들이 보다 성숙한 자세를 취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일베에 반대하는, 차별을 금지하는 규정을 공동체가 보편적 윤리로 획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어쩌면 민주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가치 지향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곧장 특정한 코드를 향한 배타적 공격이 되어선 곤란하다. 지금 일베에 대한 타작은 정치적으론 시원할 수는 있어도 언제나 부메랑처럼 돌아와 엉뚱하게 발현될 수 있음을 환기해야 한다. 한국 사회 공론장의 코드는 일베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 사회는 그야말로 극단적 양분을 경험하고 있다고 할 만큼 배타적 갈등의 양상이 일상적인 구조로 진격하고 있다. 오늘의 일베지만, 내일은 무엇이 될지 장담하기 어렵다. 그 때마다 주도적 여론의 단죄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우리는 끝끝내 원하는 곳에 닿지 못하고 계속 누군가들을 향해 분노의 삿대질을 해야 할 지도 모른다. KBS 기자가 일베여서 문제가 아니라 일베와 같은 극단주의자들이 공영방송에도 능히 안착할 수 있는 사회적 무감각이 어떤 문제인지를 규명하는 것이 시급하다. 그리고 그 극단주의를 완화하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언론이 기능해왔는지도 논해볼 만한 문제다.

민주적 기자는 그냥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적 시민의 토대 속에서 만들어진다. 반대로 민주적 시민이 굳건하다면, 어떤 기자라도 그 민주적 합의를 거스를 순 없다. 그 일베 기자가 부디 자신을 향한 매서운 비판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닫고, 우선 좋은 시민이 되길 바란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방식이 진화이건 각성이건 몸부림이건 KBS에서 제 역할을 해내는 구성원이 되길 기원한다. 그 기자가 KBS에 입사한 것이 부적절하다는 판단은 그가 KBS에서 어떤 잘못을 저지른 후에 내려도 늦지 않다. 일베는 사회 바깥으로 추방해야 할 괴물이 아니라, 우리가 다스려야 할 상처의 이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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