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재보궐선거 국면이 시작되면서 여야의 경쟁에도 불이 붙고 있다. 4·29 재보궐선거가 통합진보당의 해산을 원인으로 해 치러지게 된다는 사실은 새누리당이 ‘종북책임론’을 내세우는 유력한 근거가 되고 있다. 통합진보당 소속 의원들이 국회에 진출하도록 새정치민주연합이 도운 꼴이므로 이번 선거에서는 그들을 선택하지 말아야 한다는 게 ‘종북책임론’의 핵심 내용이다.

이에 대해 새정치민주연합은 ‘지갑론’을 제기하고 있다. 담뱃값 인상, 연말정산 대란 등을 막고 서민의 지갑을 지키기 위해서는 새누리당이 추가 의석을 가져가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이러한 선거프레임을 통해 기존에 주장해왔던 ‘유능한 경제정당·안보정당’ 이라는 중도지향적 틀을 계속해서 밀어붙이면서 ‘종북책임론’을 비껴가고 있다.

이런 상황이 계속 이어지자 일각에서는 새누리당의 ‘종북책임론’이 일정한 한계를 갖고 있다는 지적을 내놓고 있다. 결국 네거티브 선거전으로 이어질 수 있는 프레임인데다 야당이 유능한 경제정당을 자칭하고 있는 상황에서 오히려 여당이 국정에 진지하게 접근하지 않는다는 이미지를 줄 수 있고 선거 이후 여야의 경색 국면이 올 수 있으므로 역풍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는 게 이러한 주장의 내용이다. 새누리당 역시 이런 측면의 문제를 잘 알고 있으므로 공약을 통해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지난 31일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빨간색 앞치마를 두르고 여의도 당사에서 퍼포먼스를 펼친 것은 이런 맥락에서 해석할 필요가 있다. 김무성 대표는 이날 4·29 재보궐선거에 출마한 후보들과 함께 “경제는 새누리”라는 구호를 외치고 ‘새줌마 우리 동네를 부탁해’라는 이름의 공약발표회를 가졌다. ‘새줌마’라는 말은 새누리당과 아줌마의 합성어로 최근 모 예능프로그램에서 배우 차승원의 살림꾼으로서의 섬세한 심성이 각광받으면서 ‘차줌마’라는 단어가 탄생한 데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김무성 대표는 이 행사에서 “엄마와 아줌마들이 집에 필요한 것을 줄줄이 꿰고 있듯 새누리당 후보들은 각 지역에 필요한 것을 가장 잘 아는 후보로 공천했다”고 설명했는데, 이 발언을 통해 새누리당이 ‘지역일꾼론’으로 새정치민주연합의 지갑론에 맞서는 구도가 형성하려는 전략을 세웠다는 점을 알 수 있다.

▲ 한겨레 1일자 6면 기사.

새누리당이 지역일꾼론을 내세웠다고 해서 종북책임론을 폐기하는 것은 아니겠으나, 적어도 이 행사를 통해 정책대결이라는 구도가 짜여진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한겨레>의 1일자 보도는 이러한 행사의 맥락을 잘 표현하고 있다. <한겨레>는 6면에 <“새줌마” 대 “국민지갑” 여야 4·29보선 ‘정책대결’>이란 제목의 기사를 통해 위와 같은 상황을 보도하면서 “지금까지의 재보선이 특별한 어젠다 없이 야당의 ‘정권심판론’과 이에 맞서는 여당의 ‘힘있는 정부론’ 구도로 치러졌던 점에 견줘보면 이례적 현상”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한겨레>는 “야당이 소득주도성장론이라는 어젠다로 이기려면 어젠다뿐 아니라 (이를 찬반구도로 만드는) 전선을 만들어야 하는데, 야당에 그런 실력이 있는지 모르겠다”, “만약 이번 선거에서 패하면 야당은 어젠다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내년 총선에서는 다시 옛날 방식인 정권심판론 등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의 발언을 인용하며 정책대결이 긍정적인 효과를 내지 못할 가능성을 언급했다.

여야의 정책대결이 반드시 좋은 모습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은 이미 <조선일보>의 보도에서 예견되고 있다. <조선일보>는 이날 6면에 <與는 지역구민, 野는 온 국민에 선심…재보선 ‘空約’ 경쟁>이란 제목의 기사를 배치했다. 새누리당의 경우 재원조달 방안도 없이 지역 개발 사업에 집중된 공약을 발표했고 새정치민주연합의 경우는 최저임금 인상, 생활비 경감, 국공립어린이집 확대 등이 포함된 ‘대선급 공약’을 내놓았다는 게 핵심 내용이다. <조선일보>는 특히 새정치민주연합의 경우는 문재인 대표가 201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당시 내놓은 공약에서 숫자만 바꿔 재보궐선거 공약으로 다시 발표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조선일보>는 이날 <여야, ‘복지 대란’ 자초하고도 무책임 공약 또 퍼붓나>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보다 적극적인 입장을 개진했다.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여야는 2년 전 대선 과정에서 5년 동안 각각 97조원과 192조원이 들어가는 허황한 복지 공약을 내세웠다가 ‘복지 대란’을 불러오자 책임전가 싸움만 벌였다”면서 “나라 꼴을 이렇게 만들었다면 여야는 잘못한 부분이 무엇인지 대국민 사과부터 하는 게 순사다”라고 지적했다.

▲ 조선일보 4일자 사설.

형식상으로는 여야를 모두 대상으로 해서 비판을 제기하고 있으나 <조선일보>의 이 사설은 결국 4·29 재보궐선거 이슈를 ‘무상복지’로 연결시켜 공격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무상복지를 둘러싼 논란에 있어서는 새정치민주연합이 수세적인 입장에 몰릴 수밖에 없고 새누리당은 공격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이렇게 보면 <조선일보>의 사설은 새누리당에 대한 일종의 간접적 ‘훈수’에 가깝다. 새정치민주연합의 ‘유능한 경제정당론’에 대응하기 위해 지역개발공약을 내세울게 아니라 새정치민주연합의 대선·총선급 공약을 ‘무상복지 반대’ 프레임으로 돌파하라는 메시지다.

흥미로운 점은 <조선일보>가 노인 복지의 수준을 문제삼는 사설을 함께 배치했다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이날 <늘어만 가는 ‘노인 난민’ 속수무책 보고 있어야 하나>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14 노인 실태 조사’를 인용하며 “우리나라 노인 복지는 다른 선진국에 비해 크게 뒤처져 있다”고 평가했다. <조선일보>는 “작년 7월 기초연금제도가 도입돼 65세 이상 노인 중 소득 하위 70%에게 월 10만~20만원씩 지급되고 있지만 씀씀이에 비해 턱없이 모자라는 액수다”라면서 “노인들이 갈 곳 없고 할 일 없어 공원이나 경로당에나 처박혀 있는 사회를 만들어선 안 된다. 노인들의 소일거리, 일거리를 노인들 개개인이 해결할 문제로만 놔둬선 곤란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 조선일보 1일자 사설.

지난해 일부 언론 등은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공약한 기초연금의 시행이 지자체의 재정위기로 이어졌다는 보도를 내놓은 바 있다. 이후 기초연금의 축소 논란이 벌어지면서 노인층의 정권에 대한 지지가 일부 흔들리는 현상이 빚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일보>의 이날 사설에 따르면 과도한 복지제도로 인한 여러 재정적 위기가 현실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인들에 대한 복지 만큼은 증대될 필요가 있다.

만약 정치권에서 이날 <조선일보> 두 사설의 논리를 모두 끌어안는다면 노인 복지는 늘리되 그 이외의 무상복지는 축소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설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상급식과 무상보육은 축소하고 기초연금 등 노인복지 재정은 대폭 늘리는 것이다. 새누리당이 바로 이런 주장을 재보궐선거 국면에서 적극 내세우면 세대 간의 선명한 대립전선이 짜여질 것이다. 휴일로 선포되지 않는 재보궐선거일의 특성상 젊은 세대는 상대적으로 투표가 쉽지 않은 상황에 내몰리게 될 것이고 노인층은 보다 열심히 투표에 나설 것이다. 이게 어느 정당에 유리한지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언론이 여야의 정책을 나름의 관점으로 평가하고 이에 대한 문제제기와 비판을 감행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며 권장할만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언론이 정책과 공약을 평가하고 비판하는 데 머무르는 게 아니라 여당의 선거전략 일부로 스스로를 위치짓고 움직이는 것은 부당하다. 만일 <조선일보>의 이날 지면편집에 이러한 의도가 있다면 그것은 비난을 면키 어려운 일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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