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테이프가 사람을 해친다는 플롯의 <링>도 모자라, 이번에는 섹스가 사람을 공포에 빠뜨린다는 설정의 공포영화가 등장했다.

<링>에서는 사다코의 저주가 서린 비디오테이프가 전염되어 죽음의 공포에 휘말린다. <팔로우>는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초자연적 존재를 떼어놓으려면 누군가와 잠자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방식으로, <링>을 변형한 방식의 공포를 선사한다. 영화 포스터의 문구인 ‘호러 역사상 가장 기발한 저주’라기보다는, <링>에서 기계가 사람을 잡는다는 플롯 설정을 ‘섹스가 사람을 잡는 공포’로 변형했다고 보는 게 이해하기 편해 보인다.

동물은 발정기가 되어야 이성을 유혹하고 교미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은 동물과는 달리 발정기가 없다. 발정기가 따로 없는 인간은,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 이성과 섹스를 할 수 있는 동물이 되었다. 하지만 <팔로우>에서의 섹스는 다르다. 보통 사람들이 쾌락을 위해 섹스를 추구한다지만 <팔로우>의 섹스는 ‘살아남기 위한 섹스’에 불과하다.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그 어떤 누군가로부터 추격을 당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 섹스라고 한다면, <팔로우>의 섹스는 초자연적 존재로부터 추격을 당하지 않게끔 하기 위한 도피의 섹스, 책임 전가의 섹스가 된다. 이때 과연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쾌락 추구의 섹스가 될 수 있을까. <팔로우>의 섹스는 쾌락을 위한 섹스가 되기는커녕 생존을 위한 섹스, 누군가에게 옮기지 않으면 내가 살아남지 못하는 전염의 섹스다.

전염의 섹스 가운데서 쾌락의 수단이 될 리 만무하다. 누군가에게 이 고통을 전가하지 않으면 내가 살아남지 못한다는 생존 수단으로서의 섹스는, 섹스가 쾌락을 위한 창구가 되어버린 요즘 시대에는 들어맞지 않는 중세적 가치관 마냥 죄책감을 부추기는 섹스가 될 뿐이다.

즉, <팔로우>의 섹스는 쾌락을 추구하는 요즘 세태와는 동떨어진, 죄책감을 고무시키는 공포다. 동시에 섹스가 더 이상 쾌락을 위한 창구가 아니라 살아 남기 위한 생존 전략으로서의 섹스로 탈바꿈하게 된다. 쾌락이라는 목적을 위한 섹스가 아니라, 초자연적 존재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섹스이기에 섹스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되는 셈이다.

쾌락을 즐기기 위한 잠자리가 아니라 초자연적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잠자리의 이성을 숙주로 활용해야 하는 죄책감의 섹스, 생존을 위해 다른 누군가에게 옮겨야만 하는 생존으로서의 섹스가 제공하는 공포를 <팔로우>는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색다른 공포 때문일까. <팔로우>는 북미에서 개봉 3주차에 들어 상영관을 300배나 늘려 상영하고 있다고 한다. 차트 역주행은 가요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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