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ATDT 01410으로 시작하는 PC통신이 저물고 웹의 시대가 열리던 때가 있었다. 다음이나 네이버 같은 지금의 인터넷 재벌들이 첫발을 떼며 모든 것이 인터넷으로 가능하던 ‘닷컴’ 부흥기가 도래했고, 벽장 속에 숨어 지내야 했던 성소수자들도 인터넷을 통해 이전시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활발한 교류를 시작했다. 그 무렵 엑스존이라는 성소수자 사이트도 생겨났다. 그의 얘기를 잠시 들어보자.

안녕? 나는 고등학생 탐정, 아니 성소수자들이 이용하던 웹사이트 엑스존. 2000년대 초반 성소수자들이 모여들며 꽤나 큰 규모로 성장했지만, 검은 양복을 입은 정보통신윤리위원회가 검열하려 접근하는걸 눈치채지 못했다. 그들은 나에게 청소년 유해매체 지정을 먹였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유해사이트로 변해있었다.

엑스존의 등뒤로 접근하던 검은 양복을 입은 정보통신윤리위원회의 업무는 현재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가 담당하고 있다. 동성간 키스신을 방송한 JTBC <선암여고 탐정단>을 심의하고 있는 그곳이다. 3월 25일 해당 건을 심의한 방심위 회의내용을 보도한 <미디어스>와 <PD저널>에 따르면, 성소수자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정을 가진 일부 방심위원들의 발언이 드러났고, 그들에게서 방송심의의 공정성을 기대하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이 되었다.

▲ 선암여고 탐정단 (JTBC)

그들의 입에서 직접적으로 나온 ‘혐오감을 느낀다’는 발언이 분노를 일으켰다면, ‘동성애는 청소년에게 유해하다’는 주장을 방송심의의 근거로 삼으려 하는 위원들의 태도는 성소수자 혐오세력과 방심위의 내통을 의심하게 할 정도다. 그 주장은 성소수자 혐오세력들이 만들어내고 즐겨 사용하는 반대논거이며 ‘엑스존’을 폐쇄로 몰아넣은 주범이기도 하다.

2000년 커밍아웃 직후 방송에서 퇴출된 홍석천, 2010년 ‘’인생은 아름다워'보고 '게이'된 내 아들 AIDS로 죽으면 SBS가 책임져라’ 반대광고 사태를 겪은 SBS <인생은 아름다워>, 2011년 반대세력의 집단 민원 끝에 온라인 다시 보기가 삭제된 KBS <클럽 빌리티스의 딸들>, 2012년 마찬가지로 반대 민원에 방송 1회 만에 폐지된 KBS joy <XY 그녀> 등은 성소수자가 직접 방송에 등장하거나 소재로 사용된 사례의 거의 모든 것이지만 ‘청소년에게 동성애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풍파를 겪지 않은 것이 없다. 성소수자 혐오 단체들이 주요 실적으로 소개해놓은 것의 대부분이 위의 사례와 중복되는 점을 볼 때 방송에서 성소수자 퇴출은 그들의 중점 사업으로 보인다.

그동안 케이블 방송에서는 성소수자 소재가 비교적 혐오세력으로부터 자유로웠던 것은 사실이다. 몇몇 국내 케이블 방송이 게이 드라마의 고전 <퀴어 애즈 포크>나 드랙퀸 서바이벌쇼 <드랙퀸 수퍼스타>를 통해 공중파나 공영방송 계열보다 높은 수위의 성적 묘사와 표현을 방송했지만 문제된 일은 없다. <클럽 빌리티스의 딸들>을 놓고 한 목회자 단체가 발표한 반대논평은 공중파 방송의 큰 영향력과 이것이 동성애 조장에 사용되지 않아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동안 케이블 방송은 혐오세력이 판단하기에 ‘동성애 조장’의 도구로서는 역할과 영향력이 미미했던 것 같다.

그러나 종합편성채널의 영향력은 혐오세력들도 방관할 수 없다고 판단한 듯 하다. 공중파와의 차별화를 위해 소재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종합편성채널의 경향은 언제든 다시 성소수자를 TV에 등장시킬 수 있는 배경이다. 그리고 이들이 등장시킬 TV속 성소수자의 모습도 여전히 암울하고 고뇌하는 존재가 아닌 유쾌한 캐릭터일 수 있을 것이다.

미국 공중파에서 8년 동안 방영된 시트콤 <윌 앤 그레이스>가 유쾌한 게이 캐릭터의 새로운 모델을 창조하며 성소수자에 대한 호의적인 여론을 형성하는데 일조한 사례를 참고한 성소수자 혐오세력은, 앞으로의 성소수자의 방송 퇴출운동을 이번 <선암여고 탐정단>에 대한 집단민원제기처럼 벌이며 점차 그 대상을 넓혀나갈 것이다.

이를 심사할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공정성과 위원들의 인권감수성 수준은 상식 이하이다. 오히려 이들은 최근 벌어진 레진코믹스에 대한 일시 차단과 warning.or.kr으로 대표되는 무기준, 무차별 검열의 주역에 가깝다고 봐야 할 것이다.

10년 전 엑스존을 폐쇄하는 데 활용됐던 청소년유해매체물 심의기준에서 ‘동성애’ 항목은 2004년 법개정으로 삭제되었다. 그럼에도 동성애 검열은 진행 중이다. 김조광수 감독의 영화 <친구 사이?>는 해당 영화를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으로 지정한 영상물등급위원회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소수의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이 청소년에게 유해한 것이 아니라는 법원의 판단을 얻어냈다. 방심위는 집단민원으로 <인생은 아름다워>에 대한 심의에 착수했지만 문제 없음으로 결론 내렸던 자신의 과거 결정 역시 되짚어야 한다.

오히려 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는 방송통신매체나 ‘108배를 했더니 동성애가 치유되었다’는 식의 (대부분 허위로 판명되고 있는)전환치료를 암시하는 방송을 규제하는 것이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설립 목적에 부합한 일이라는 점을 <선암여고 탐정단>에 대한 최종 판단을 내릴 방심위원들이 명심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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