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태임이 MBC '띠동갑내기 과외하기' 촬영 중 상대 출연자에게 욕설을 퍼붓고 소란을 피워 하차한 것으로 확인됐다.” - 2015. 03. 03, 일간스포츠 ‘[단독] 이태임, ‘띠동갑내기’ 욕설 소란으로 하차‘ -

“예원은 찍소리 못 하고 가만히 서 있다가 울고불고… 욕만 5분 넘게 하면서…” - 2015. 03. 04, MBN, 이슈 파헤치기 ‘86년생 섹시女들의 저주?’

“갑자기 이태임이 욕을 하기 시작했다. (…) "언니, 춥지 않아요?" (예원) "CB, M쳤냐? XX버린다" (이태임) (…) 이태임의 분풀이는 약 2~3분간 계속됐다.” - 2015. 03. 06, 디스패치 ‘[D피셜] “제주도, 욕바람, 인증샷” ...해녀가 목격한 그날, 둘’ -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제주도 방송 촬영장에서, 해녀들과 자맥질을 하다 해안으로 올라온 배우 이태임이 방송인 예원에게 화를 내며 험구를 작열시켰다는 것. 이것이 사건을 최초로 알린 일간 스포츠 ‘단독’ 보도의 요지다. 어뷰징 뉴스와 악플의 콜라보를 타고 소문은 눈덩이 구르듯 몸집을 불렸다. ‘찌라시’가 등장했다. 이태임이 인터뷰를 했다. 촬영 환경이 힘들었고 예원이 반말을 했단다. 예원 측이 반론했다. 반말한 적 없단다. 결국, 이태임이 사과했다. 연예가 ‘팩트 종결자’, 디스패치가 뛰어 들었다. 포털 사이트 댓글 창에선 사형선고를 내리는 망치 소리가 울려 퍼졌다. 탕. 탕. 탕.

사건은 이렇게 반전됐다. 3월 27일 저녁, 동영상 한 편이 유출됐다. ‘욕설 스캔들’의 현장을 담은 1분 26초짜리 영상이었다. 이태임은 욕설을 했지만, 갑자기 광분하진 않았다. 미묘한 긴장이 조성된 전후 맥락이 있었다. 예원은 반말이라 느낄 소지가 있는 말을 했다. 말없이 눈물을 떨구는 예원은 거기 없었다. 동영상은 1분 30초 안에 기승전결을 마쳤다. ‘5분’ 또는 ‘2분에서 3분’은 허구의 숫자였다. 잘못은 누구에게 있는가. 여전히 이태임에게 있다고 할 수도, 관전자들의 인간관계 감각에 따라 다르게 답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 처음부터 이 정황 그대로 사실이 알려졌다면, 이태임은 그만큼 난도질당하진 않았을 거다. 이태임 ‘욕설 스캔들’은 180도 뒤집혔다. ‘마녀’는 ‘희생양’으로 승천했다.

범인 하나, 디스패치

사건엔 두 명의 공범이 있다. 동영상이 공개된 후 분노한 군중은 디스패치를 소환했다. 디스패치는 3월 6일 발행한 기사 ‘[D피셜] “제주도, 욕바람, 인증샷” ...해녀가 목격한 그날, 둘’에서 제주도로 내려가 증언을 수집하며 취재한 ‘탐사보도’를 풀었다. 디스패치가 검증한 ‘욕설의 진실’은 세간을 떠돌던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카카오 톡 대화창으로 극화되고 토막 나고 납작하게 압축된 후 매콤한 양념을 친 ‘진실’이었다. 과연 ‘뉴스는 팩트’였을까? 뉴스는 ‘소설’이었다.

디스패치는 동영상이 유출된 다음 날 3월 28일, ‘[D-eye] "그래서, 제주도를 가야 했습니다"’란 기사를 발행하며 먼젓번 기사를 수습했다. 물론 디스패치가 나서기 전에도 루머는 걷잡을 수 없었고, 대중은 돌을 던지고 있었다. 그러나 뒤집어 말하면 그것은 ‘루머’에 바탕을 둔 구설수였다. 제주도 해안까지 찾아가 ‘증인’들을 만나고 루머를 ‘오피셜’로 승격시킨 건 디스패치였다. 사람들은 마음속 신뢰의 여백을 완전히 지워버릴 알리바이를 얻었다. 네이버에 게재된 ‘[D피셜] "제주도, 욕바람, 인증샷"…해녀가 목격한 그 날, 둘’에 달린 베스트 댓글을 보라. “이 기사가 제일 중요한 게 예원이가 이태임을 도발한 그 어떤 건덕지도 없었다는 걸 알려줌.” 25000개가 넘는 공감을 얻고 1위에 등재된 댓글이다. ‘진실’의 결정타 같은 ‘팩트’가 허구로 드러난 지금, 그 ‘팩트’는 진실을 교란한 주범일 뿐이다.

디스패치의 ‘D피셜’은 의아하고 생뚱맞은 점 투성이다. 이 기사는 두 개의 큰 단락으로 구성돼있다. 첫 단락에서 나름의 동정적 논조로 이태임의 행적을 전한다. 차후의 해명기사에서, 디스패치는 이를 들어 자신들 기사에 순기능도 있었다 주장했다. 이 대목이 이태임에 관한 지엽적 루머를 일정 부분 해소한 것은 사실이지만, ‘욕설의 진실’을 선정적으로 공개하는 뒤의 단락과 지극히 부자연스럽게 단절되어서, 결과적으로 독자들이 이태임의 언동을 병리적으로 인지케 하는 효과가 생긴다. 3월 6일 자 해당 기사 네이버 베스트 댓글 3위에 등재된 댓글이다. “(...) 내 생각엔 이태임은 지금 너무 우울증이 심하고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것 같으니 연예활동 쉬고 병원에서 치료받는 게 나아보임.”

디스패치는 “그래서 제주도를 가야했습니다.”라고 발명한다. 내가 볼 땐 구태여 제주도로 갔던 것이야말로 문제다. 거기 가보아야 증인을 만나는 것 말고 할 게 없는데, 다툼을 목격한 루엔키니 씨는 한국말 이해력에 한계가 있는 이주민이다. 처음부터 그 증언엔 큰 의미를 둘 수 없었다. 다툼의 현장에 다른 사람이 없던 것도 아니다. 촬영 스태프들이 있었고, 당연히 당사자들이 있었다. 디스패치는 그 입장들을 교차 검증하거나, 이것이 과연 진지하게 밝힐 가치가 있는 취잿거리인지 고민하는 대신, 제주도로 날아가 ‘현장’과 ‘제 3자’라는 ‘중립성’의 환상을 강변했다. 이 기사는 표면상 중립성을 강조하지만, 특정한 프레임으로 독자를 인도하는 구조로 읽힌다. 말다툼 상황에서의 예원의 ‘반말’이 쟁점인데, 현장을 목격하지도 않은 장광자 씨에게 예원이 반말을 했는지 묻거나, 다툼이 벌어지기 전 상황에서의 예원의 태도를 루엔키니 씨에게 묻는다. “예원이 울었던 화장실 사진”은 도대체 무슨 맥락으로 삽입한 건지 아직도 모르겠다. 급기야, 사실관계를 제시한 후 독자를 향해 결론을 열어 놓기보다, “자신의 감정을 예원에게 분출한 건, 변명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라며 자신의 결론을 노정한다. 그러고선 이제는 “목격자의 증언에 '주관'이 개입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며 애꿎은 ‘목격자’와 ‘증언’에게 과실 원인을 돌린다.

다른 언론과 뉴스라고 나을 건 없었다. 이태임에 관한 기존 이미지와 루머는 이번 사건에 불을 지른 땔감이다. 그 저급한 뉴스들이 유통되는 본새엔 연예가 뉴스의 해묵은 병폐가 농축돼있다. 언젠가 한 연예부 기자는 케이블 TV 토크쇼에 나와 “xx양이 ‘자연산 가슴’을 무기로 베드신 출연료를 협상했다.”는 입증할 수 없는 괴소문을 퍼트렸다. 한 매체는 ‘욕설 스캔들’이 터지자 “이태임이 촬영장에서 반찬 투정을 했다”는 대단한 ‘특종’을 보도했다. 연예인 간 완전한 사적 다툼을 ‘단독’ 보도한 일간 스포츠, 항간에 나도는 ‘찌라시’를 받아쓰기하며 전파를 낭비한 MBN, 그리고 온갖 쓸모없는 소음으로 포털 사이트 밤하늘을 수놓은 어뷰징의 불꽃놀이. 한 줌의 사실관계를 뒤덮은 뜬소문의 성찬이 있기에, 명확한 ‘진상’을 알고 싶다는 대중의 호기심이 몸부림친다. 그 호기심을 매의 눈처럼 노리며 디스패치 같은 연예뉴스 ‘탐사보도’ 매체가 히트한 것이다. 이것이 디스패치 문제의 본질이다.

▲ 디스패치가 보도한 ‘[D피셜] “제주도, 욕바람, 인증샷” ...해녀가 목격한 그날, 둘’ 화면 캡처.

범인 둘, 바로 대중

그러나 되새겨보라. 이것은 지독히도 낯익은 풍경이다. 아무개 연예인을 악플로 몰매를 줬는데, 알고 보니 무고하더라는 허무개그 스토리 말이다. 이 잔인한 소극의 책임을 과연 언론에만 물을 수 있을까? 바로 여기 두 번째 공범이 있다.

‘욕설 스캔들’은 뜨악하고 우스운 가십이다. 바다에 들어갔다가 나오더니 갑자기 '5분간' 쉬지 않고 욕을 퍼부었다는데, 사실이라면 언프리티 랩스타 파이널 무대엔 치타 대신 이태임이 진출해야 한다. 그만큼 사회인으로서 상식적 범위 내에서 잘 해명되지 않는 괴악한 행동이다. 네티즌은 그런 기괴한 '특종'을 의심하지 않았다. “에이, 너무 미심쩍은데? 이태임 입장도 잘 들어봐야지, 정확한 사실은 모르는 거 아니냐?”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반문이 왜 나타나지 않았을까. 나타났다 해도 왜 ‘쉴드질’이라며 두더지 망치를 맞고 땅속으로 꺼졌을까.

사람들이 그만큼 멍청해서? 그럴 리가 없다. 차라리 그들이 미리 결론을 내려놓았기 때문일 거다. 서른 줄에 이른 여자 연예인의 히스테리, 우리네 직장에서 지겹게 겪는 선후배 ‘갑질’ 구도, 암탉들의 불꽃 튀는 벼슬 쪼기 싸움, 그리고 방송가에서 한창 뜨는 ‘베이글녀’가 떨군 한 방울 눈물.

황색 저널리즘의 위용이 웅장한 이 시추에이션은 말 그대로 흥미진진하다. 여기서 사실 여부를 의심하고 판단을 지연한다면, 서사는 중단되고 감정이입도 유보된다. 아무것도 확실한 게 없다면 이태임이 ‘죽일 년’이니, 예원은 순진한 듯 여우라느니, 뒷말의 관계도를 그려봐야 주말 연속극 주인공을 씹는 것 보다 재미날 게 없다. 사람들은 불투명한 정황을 확증 짓는 실재의 드라마를 원했다. 디스패치의 ‘D피셜’을 위시한 연예가 단신들은 안성맞춤의 명분을 상납했을 뿐이다. 사람들은 댓글의 카니발을 벌이며 ‘마녀’를 처단했다.

이번 스캔들은 방송 전파를 타고 공연성을 획득한 사건이 아니다. 방송을 만드는 과정 뒤편에서 우발적으로 벌어진 사적이고 폐쇄적인 사건이다. 설령 공인이라 해도 사적 다툼은 공적 시비의 대상이 아니다. 이명박과 김윤옥이 야심한 시각 청와대에서 부부싸움을 했다고 특종 보도한다면 그냥 TV 조선 아닌가?

두 사람의 문제는 두 사람의 문제로 놔두자는 말이다. 둘은 세상에 알려진다, 는 결과를 꿈에도 염두에 두지 않은 상태에서, 지극히 인간적인 속살을 노출하게 된 것이다. 인간은 우아하게 식사하고 추하게 배설하는 동물이다. 누군가의 파스텔색 표지 일기장 안에는 증오와 질투의 기록이 빼곡할 것이다. 이것이 프라이버시의 본질이다. 세상에 알리고 싶지 않은 내밀하고 개인적인 치부를 숨기고 그를 존중받는 것 말이다. 이 말다툼의 해프닝은 처음부터 외부로 유출한 사람이 잘못이지, 유출 당한 사람 잘못은 아니란 거다.

이 모든 오인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논리는 무엇일까. 첫째, 연예인은 관심과 인기를 먹고 사는 대중의 ‘을’이다. 그러니까 무겁고 가혹한 책임도 응당 걸머져라. 둘째, 연예인은 부와 명예를 손에 쥔 공인이다. 그러므로 사적 영역 따위 없다. 한 마디로 너희는 우리 때문에 존재하니까 엄지를 내려 생사여탈 할 권리는 우리에게 있다는 것. 가히 폭군 네로의 태도다. 그리하여 진실의 일각이 드러난 지금, 그들은 반성하기는커녕 어느새 가면을 바꿔 쓰고 책임을 떠넘길 또 다른 희생양을 찾는다. 바로, 예원에게 칼끝을 돌리는 것이다. “싹수없이 선배한테 대들며 피해자 코스프레한 불여우.” 괴물같이 우악스런 추한 마녀에서, 뱀처럼 요사스런 어린 요녀로의 서사 챕터 전환.

“연예인이 이태임처럼 처신했으면 퇴출당해 싸지!”라고 을러대던 사람들이 이제는 “예원은 우리를 속였으니 (대중은 전능하시다!) 이태임보다 더 한 죄인이다.”라고 말을 바꾸며 괘씸함에 이를 간다. 천인공노할 패륜에 분노한 듯 집단 가학의 손맛을 즐기며 “우리 예원이” 지킴이를 자처하던 정의의 흑기사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 지금은 아래위 없는 후배에 수모를 당한 기억을 서랍 속에서 꺼내며 통렬한 가상의 복수전을 댓글 창에서 거행하는 중이시다.

한 가지 환기하자. 아직 사건의 전모는 드러나지 않았다. 공개된 것은 겨우 1분 30초짜리 조각난 영상일 뿐이다. 카메라 앵글은 예원을 향해 온전히 붙잡혀 있었고, 이태임이 말하는 표정과 제스처는 보이지도 않았다. 그 말싸움 전후로 두 사람 사이 어떤 사연이 있었길래 사단이 터졌는지도 모른다. ‘이태임 5분 욕설’ 특종 때와 비슷한 조짐이 어른거리지 않는가? 그러나 네티즌은 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이다. 이 조리돌림의 연쇄는 IT 기술이 멸망할 때까지 끝나지 않는다. 문제는 이태임의 ‘꼬장’도, 예원의 ‘싸가지’도 아니다. 정확히 언론의 보도 행태와 네티즌의 변덕과 폭거다. 이렇게 말해서 미안하지만, 네티즌이 주관하는 정의의 심판은 거의 언제나 정의롭지 않았다.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지금까지 글을 읽은 당신은 이렇게 항의할지 모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우리는 마녀사냥을 하는 게 아니야. 예원의 싸가지를 욕하는 것도 아니라고. 그저 ‘언플’로 세상을 속인 예원의 행동을 비판하는 거야. 논점 일탈 하지 말라고.” 실제로 인터넷 각지에선 이런 양상으로 심판의 논리가 재빨리 재조직되고 있다.

언플? 그럴지도 모른다. 반말한 적 없다고 했는데, 어쨌든 반말을 하긴 했으니까. 그것이 이태임을 향한 비난을 가열하고, 반사이익을 얻은 측면도 있을 거다. 하지만 왜 그런 ‘언플’이 효과를 발휘했을까? 낯 뜨거운 가십에 탐닉하며, 피해자를 순결화함으로써 가해자를 악마화하려는 대중의 욕망 때문은 아니었을까? 디스패치 같은 황색 언론이 이만큼 공신력을 얻게 된 것은 무슨 이유일까? “연예인에게 사생활은 없다.”, “대중을 이용해 돈을 벌면 책임도 져야지?” 같은 말로 인권 침해 파파라치 보도를 용인하고, “애증의 디스패치”, “드디어 디스패치가 나섰다!” 같은 말로 그 ‘탐사보도’에 사회적 의미를 부여한 여론 때문이 아니냔 말이다. 대중이 알고 싶어 하지만 알려주기 부적절한 사실을, 그들이 알고 싶어 하는 방식으로 보도해왔다는 점에서, ‘D피셜’의 참사는 오래전 예고된 것이다.

책임은 언론과 ‘언플’에만 있지 않다. 이 모든 어지럽고 소란스러운 가십을 승인하고 소비한 것은 결국 대중이다. 이 열띤 사육제의 한복판에서 언론이 쥐여준 칼을 제물의 등에 꽂으며 손에 피를 묻힌 주체는 악플을 달던 사람들이다. 아니, 저 모든 ‘언플’과 가십은, 선정적 호기심과 가학적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맞춤형으로 공급되었다는 점에서, 대중이 정범이요 나머지는 종범에 가깝다. 이 분명한 진실과 이 난장판을 벌인 언론의 면면을 기억하자. 저들의 책임을 단단히 따져 묻는 한편, 타인의 불화를 밀렵하고 거래하는 시장의 메커니즘을 자각하자. 가십의 중독자, 연예인의 심판관에서 뉴스의 소비자, 공론장의 참여자로 거듭나자는 말이다. ‘연예인 욕설 스캔들’에 분노하는 당신이, 또 다른 ‘거짓말’을 막을 방도는 그것밖에 없다.

윤광은 _ 일상과 세상의 경계를 모로 걸으며, 조심스레 두리번대고 글을 쓴다. 사회, 문화, 정치의 단층을 채집하여 살펴본 이면의 수런거림들을 블로그(blog.naver.com/yke0123)에 편철 중.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