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케미칼의 노동자 차광호가 300일 넘게 굴뚝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그를 처음 만난 때는 2010년 4월이다. 그는 다른 지역구에 출마한 진보정당 기초의원 후보의 선거운동을 하고 있었다.

차광호는 내게 선거 선배이기도 하다. 나보다 네 해 앞선 2006년, 같은 지역구(인동동)에 출마했었다. 2인선거구에 10명이 출마한 혼전에서 5위, 득표율 약 9%를 기록했었다. 4년이 지나 돌아온 선거에 그는 출마하지 않았다.

선거구는 진미동과 합쳐진 3인선거구 였다. 나는 그때 이 지역에 출마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인동동과 진미동은 공단과 그 배후지역으로 이뤄져 있다. 야권 표심, 노동장정당 지지세 모두 구미안에서는 상대적으로 높은 곳이었다. 차광호는 내가 이야기한 출마자의 조건에 잘 들어맞았다. 그러나 그는 출마하지 못했다. 문을 닫았던 소속 기업 한국합섬에 스타케미칼이 인수의 손을 뻗쳐왔고, 한창 선거 중이라 기억이 좀 흐릿하지만 그 무렵 그는 교섭으로 바빴던 것 같다.

두 번째 만남은 선거운동 와중에 있었다. 선거본부로 음료수를 사 들고 찾아온 그는 꼼꼼하게 전략을 점검해주었다. 허술했던 선본에 주름 하나 잡혔다. 세 번째 만남은 선거사무실 개소식에서였다. 시루떡을 썰며 나는 “이제 떡고물 먹지 말자. 떡을 먹자”고 말했고, 그때 유독 환하게 웃던 그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차광호는 안 지 얼마 되지도 않는 후배 때문에 잠시 고생해야 했다. 그는 구미 민주노총에 “김수민 후보를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반대에 부딪혔다. (이게 진짜 이유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내 아버지의 경력을 문제 삼는 이들이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기업 노무관리자로 민주노총과 갈등 관계를 겪은 적 있었다. 차 선배는 “부친이랑 다른 길을 가는 아들한테 왜 부친을 들먹이냐”고 반박했던 모양이다. 나는 “구미에서 함께 활동할 기회도 없었으니 지금은 지지를 요청할 입장이 못 된다”고 밝혔다.

결국 그가 도운 후보와 나는 모두 각자의 선거구에서 당선되었다. 차광호는 민주노동당 후보측 개표참관인이었고 우리쪽에서 보낸 개표참관인(내 친구들)과 한마음으로 개표를 지켜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도 다시 돌아가는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아마 차광호 선배가 출마했더라면 무난하게 당선되었을 것이다. 나는 그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였다. 한나라당에 반감이 있던 주민들은 정당을 걸고 나온 후보를 더 반겼다. 도의원 비례대표 결과로 밝혀진 것이지만, 그 선거에서 우리 동네 투표자 가운데 35% 가량이 야권 정당에 투표했음이 밝혀졌다. 나는 그 60% 수준의 표를 얻었다. 민주당이 후보를 못 냈으니 그가 민주노동당 후보 겸 야권 유일후보로 나왔다면 차광호는 나보다 확실히 더 높은 득표를 기록했을 터이다.

▲ 2006년 민주노동당 소속 기초의원으로 출마한 차광호씨의 선거홍보물. (사진=김수민)

2006년 선거에서 그는 “이상한 재테크”를 내걸었다. ‘입사 11년차, 365일 3교대 근무로 받는 연봉 4천만원’을 버리고 ‘노동자 평균임금이자 민주노동당 시의원 급여인 연봉 2160만원’을 선택했다고 선언했다. 낙선이야 예상가능했지만 도리어 공장이 문을 닫아버렸다. 그리고 이를 다시 여는 과정에서 그의 시의원 재도전도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그랬던 그에게 그의 직장은 청산과 폐업으로 답했다.

2013년 초, 그는 나를 찾았다. 스타케미칼 노조의 리더였던 그는 궁지에 몰려 있었다. 회사가 폐업에 들어가겠다고 선언하자 “강성 투쟁이 회사를 말아먹었다. 집행부가 책임져야 한다”며 반발하는 노동자들이 있었다. 그는 집행부 사퇴를 결심해 비상대책위가 구성되는 길을 열어주었다. 나는 묵묵히 듣고 있었지만 머리가 혼란스러워 그날 구체적으로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풀어내기가 어렵다. 그의 사퇴 의사를 일단 ‘조합 추스르기’로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그러고 나서 그와 몇몇 동지들은 일방적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스타케미칼은 정파간 대립이 있던 곳도 아니었고 운동사에도 굵직히 새겨진 투쟁들을 거쳐왔던 노동자들이 모여 있었다. 여기까지는 넘긴다 치자. 차광호 집행부가 수일을 끄는 파업투쟁을 벌인 것도 아닌데 회사가 그것 때문에 망했다는 주장을 난 이해할 수 없었다. 차광호는 집행부 사퇴로도 모자라 금속노조 구미지회로부터 제명 징계를 당하기도 했다.

스타케미칼 모기업 스타플렉스는 시설비만 2천 5백 억이 들었다는 한국합섬 공장을 4백 억원에 사들였다. 그런데 공장 재가동 2년도 되기 전에 폐업을 선언하고 노동자들에게 권고사직을 권고했다. 불응한 노동자들은 해고 당했고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를 만들게 된다. 이 수순을 거든 노조 비대위를 향해 ‘어용’이라는 비판이 터져나왔다. 그러자 비대위측 노동자들은 민주노총 구미지부에 항의했고 한 활동가의 책상이 부서졌다. 처음에는 반대편 입장도 들어보고 싶었는데 싸움은 이미 강을 건너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이미 예전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누구누구 라인’으로 찍혀 있음을 깨달았다. 또한 분명히 밝히자면, 나는 자신들의 입장이나 상대에 대한 반박을 공식적인 글쓰기로 밝히지 않는 이들을 불신한다.

차광호는 2014년 5월 27일 공장 굴뚝에 올랐다. 내가 재선 선거운동중이던 나날이다. 구미 지역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운동 현장에 나타나지 않자 몇몇 선거운동원들은 “민주노총에서 도와주겠다고 했고 이번에는 또 ‘민주노총 후보’지 않나. 그런데 왜 이렇게 안 도와주냐”고 역정을 냈다. 하지만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구미 민주노총은 양분되었는데 어차피 한쪽은 나를 당연히 도울 생각이 없었고 다른 한쪽은 굴뚝에 올라간 동지를 챙겨야 했다. 엎친데덮친격으로 차광호의 동지인, 스타케미칼 노동자이자 나의 이웃사람인 박성호도 갑작스레 쓰러진 상황이었다. 이에 비하면 나의 낙선은 아무것도 아니다. 소식을 들은 차광호는 SNS로 부랴부랴 우리 선본에 “선관위에 재검표를 요구하라”고 요구했지만.

처음 차광호가 굴뚝에 올랐을 때 나는 차라리 지상보다 그곳이 그에게 더 상쾌할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물론 오래 있지 않는다면 말이다. 밖으로는 탄압, 안에서는 관성과 분열. 이 지리한 현실로부터, 잠시 탈출이라도 하시라고 기도했다. 이 지리한 현실로부터. 열었다 닫았다 한 일터의 최고봉에서, 동고동락한 옛 동료들과 갈등하며 입은 상처를 씻어내기를, 아니 통증이라도 멎기를 바랐다.

별 한 점만 떠 있는 밤하늘은 검기만 한 하늘보다 더 쓸쓸할 수도 있다. 역시 달력이 한 장 한 장 넘어가니 나도 근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차광호 선배가 굴뚝에서 4월 1일을 맞을 경우 최장기간 고공농성이 된다고 한다. 나는 이런 뉴스를 듣고 싶지 않다. 부단한 운동으로 복근을 만들었지만 그의 건강은 악화되고 있다. 그가 올라가 있는 것을 독려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의 선택과 고집을 존중할 뿐이다. 내가 구미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어떤 분이 설명해준 활동가 스케치가 다시 떠오른다. “광호랑은 논쟁할 일이 있어도 중간에 그만둬라. 고집 세다.”

스타케미칼 공장은 구미에서도 가장 외진 곳에 있다. 아니, 행정구역상으로는 구미도 아닌 칠곡군이다. 대중교통으로 가기도 어렵다. 더구나 텅 빈 공장이다. 인근 지대도 노동자들로 붐비는 공간이 아니다. 그 누가 제 멋대로 떠나버린 자본을 잡아둘 수 있겠는가. 더구나 다만 그가 아직 공중에 있음이 조금 더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2014년 어느 봄날 차광호 선배와 나는 우리 동네에 있는 ‘전태일을 따르는 사이버노동대학 북부지부’의 테라스에서 볕을 쬐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선거에서 떨어져도 할 일은 많을 것”이라고 말했고, 떨어지고 나서 여러 사업들을 꾸역꾸역 전개하고 있다. 내가 주도해 만든 ‘구미새로고침’에서 강좌 공지가 나가면 그때마다 그는 밴드에 “듣고 싶다”고 댓글을 단다. 조만간 오십시오. 곧 다시 돌아옵니다. 작년 봄날의 그 햇볕이.


김수민 / 경북녹색당 사무처장
안티조선운동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돼 개혁당과 민주노동당에서 정당활동을 시작했다. 2007년 말 민주노동당이 분리된 후 진보신당에 몸을 담았다가 2009년 탈당해 출마를 결심하고 고향인 구미로 내려가 무소속으로 기초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시의원으로 활동하는 동안 대형폐기물 민간위탁을 막는 조례를 재개정하고 구미 단수 사태에 대해 시민단체들과 수자원공사를 상대로 소송을 벌여 부분 승소하는 등 모범적 활동으로 주목받았다. 2014년 지방선거에서 낙선했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