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부가 8개월 여를 끌어온 끝에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지난해부터 계속되어왔던 동아시아 삼국지(?)가 일단 한 고비를 넘어가는 모양새다. 하지만 더 격렬할지 모를 2막이 준비되고 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미 상하원 합동 연설이 확정됐고, 한중일 정상회의은 여전히 살아잇는 의제이다. 동아시아 외교 정국이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때, 27일자 일간지들은 그간 정부의 외교전략을 비판적으로 평가했다. 특히, 몇몇 언론은 특이한 행보를 보였다.

▲ 동아일보 27일자 1면 기사.

<동아일보>는 1면에 한국 정부가 AIIB 참여를 최종 결정했지만 2대 주주 자리를 인도, 호주 등 다른 나라에 내주고 우리나라는 3대 내지 4대 주주 자리를 차지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했다. 한국 정부가 AIIB 참여 문제를 놓고 지나치게 머뭇거리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쳐 AIIB 내에서 주도권을 잡는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동아일보>는 이어지는 3면 기사에서 “이번 결정을 두고 한국이 지난해 하반기에 일찌감치 AIIB 참여를 결정했다면 2대 주주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는데도 결정을 미루다가 경제적 손해를 봤다는 지적이 있는 반면 중국과 미국의 압박 사이에서 경제적 실리를 챙겼다는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고 재차 강조했다.

▲ 한겨레 27일 6면.

그러나 어찌됐든 AIIB 참여를 결정한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가 나오고 있다. <한겨레>는 이날 6면에 한국 정부가 그간 미국의 눈치를 봤지만 어찌됐든 AIIB 참여를 통해 경제적 실리를 선택했고 이를 사드(THAAD)와는 별개로 선을 그었다고 보도했다. <한국일보>도 3면에서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한국 정부가 줄타기를 하다가 경제적 실익을 선택했다고 평가하면서 “지난해 말부터 AIIB에 가입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던 한국 정부는 최대 걸림돌이었던 미국을 설득하기 위해 다양한 루트를 통해 물밑 작업을 벌여온 것으로 전해진다”고도 보도했다. <경향신문>도 AIIB 참여를 ‘경제적 실익’을 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결국 AIIB 참여가 어찌됐건 실리적인 결정이라는 데에는 신문들 사이에 큰 이견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중앙일보>는 이러한 측면을 좀 더 상세하게 보도했다. <중앙일보>는 이날 1면 기사에서 아시아지역의 인프라투자수요가 2020년까지 매년 7300억달러(약 806조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면서 국내 기업들이 적지않은 수주 기회를 얻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중앙일보>는 3면 하단 기사에서 AIIB를 통해 북한 인프라 개발사업 진출이 가능할 것으로도 전망했다.

▲ 중앙일보 27일자 3면.

한국의 AIIB 참여를 통해 가장 큰 손해를 보게 된 건 일본이다. 일본의 경우 아시아개발은행(ADB)을 통해 동아시아지역의 경제·금융 주도권을 행사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나 중국 주도의 AIIB가 설립되면 그간의 영향력에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중국이 AIIB의 설립을 본격적으로 추진한 계기도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ADB체제에서 인프라 투자를 이끌어 내는 데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미국의 경우 처음에는 AIIB에 대한 부정적 입장을 고수해왔지만 유럽의 우방국들 특히 영국이 참여를 결정한 이후에는 각국의 주권을 존중하겠다는 중립적 입장으로 돌아섰다. 일본이 주도하는 ADB에 일본과 함께 가장 많은 지분을 투자한 국가가 미국이라는 점을 보면 일본 입장에서는 일종의 ‘낙동강 오리알’이 된 것과 같은 기분을 느낄만하다. 한국과는 달리 일본이 AIIB 참여 입장을 결정하지 않고 일본의 언론들이 “동아시아에서의 고립”을 우려하고 있는 것에는 이런 맥락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입장에서는 실추된 일본의 영향력을 다른 방식으로라도 복구할 기회를 주고 싶을 수밖에 없다. 일본 역시 미국과의 관계를 통해 이러한 효과를 거두는 것 외엔 남은 선택지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존 베이너 미 하원의장은 26일 보도자료를 통해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4월 29일 초청해 합동연설을 할 수 있게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는 이미 예정되었던 것인데, 진주만 폭격 이후 일본 총리가 미 의회에서 상하원 합동연설을 하는 것은 처음이다.

한국 입장에선, 예정되어 있던 AIIB 가입을 발표한 날 미국이 역시 예정되어 있던 아베 총리의 미국 상하원 동시 연설을 발표한 것이 어떤 의미가 될 것인지 고민할 수 밖에 없는 형편이 됐다. 이 연설이 향후 동아시아 정세에 어떤 영향을 주느냐를 가늠하는 것은 AIIB와 사드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해 온 한국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다.

앞서, 한중일은 지난 21일 3년만에 외교장관회의를 열고 북핵에 대한 공동대응과 향후 3국의 관계개선 등을 모색한 바 있다. 한중일 정상회의의 개최 필요성에 3국이 공감한 것은 회의의 최대 성과이다. 그러나 한중일 정상회의가 열리기 위해서는 일본이 고노 담화나 무라야마 담화 수준의 입장에서 후퇴하고 평화헌법을 개정하려는 시도를 멈춰야만 한다. 중국이 한중일 외교장관회의에서 다시 한 번 과거사 문제를 언급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최소한 고노담화, 무라야마 담화의 계승 입장을 분명히 해야 문제가 풀린다.

문제는 이것을 어디서 언급할 것인가이다. 상식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시기는 8월 15일 종전 70주년 기념 담화이다. 그런데 9월 중국은 ‘항일전쟁승리기념일’을 맞아 베이징에서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군사퍼레이드를 거행한다는 예정이다. 외교적으로 이 두 지점이 묶이게 되면 중일관계는 악화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자민당 정권이 중의원 선거에서 승리해 절대 다수의 의석을 점하고 있다는 점과 평화헌법 개정은 아베 신조 총리의 ‘신념’에 가까운 문제라는 걸 고려해보면 일본 정부가 자발적으로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한중일 3국 관계의 진전을 위해 전향적 행보를 이어갈 확률도 높지 않다.

▲ 조선일보 27일 1면.

따라서 4월 예정된 미 의회 상하원 합동 연설에서 아베 신조 총리가 상징적 발언을 내놓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를 유도하기 위해서는 아베 신조 총리의 노선에 대한 한국과 중국의 불편함이 부각돼야 한다. 이런 시기에 <조선일보>가 일본 도쿄 신주쿠에 있는 주일한국문화원 방화 사건을 1면에 다룬 것은 매우 주목할 만 한다. <조선일보>는 이 범행이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됐을 가능성을 언급하며 도쿄 소재 한국 공관 앞에서 직접 공격을 시도한 것은 1996년 이후 19년만이라고 강조했다.

▲ 조선일보 27일 10면.

<조선일보>는 또한 1면 하단에 일본 외무성이 지난 24일 한국 등 아시아 국가에 대한 원조를 부각한 홍보 동영상을 공개한 것에 대해서도 비판적 내용의 기사를 배치했다. <조선일보>는 3면에서 한국의 AIIB 참여 결정으로 아시아 금융 패권에 불이 붙었다는 내용의 기사를 실었고 10면에는 일본의 지원으로 한국이 발전했다는 내용의 동영상에 대해 “제국주의적 발상”이라고 비판하는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 이런 맥락의 지면 편집만 보면 가히 조선일보가 ‘반일신문’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정도다.

평소 <조선일보>가 투철한 반일정신 같은 내용을 그다지 강조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런 편집은 최근의 정세를 고려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밖에 없다. 앞서 언급한 한중일 관계에서 일본의 태도와 관련한 부분을 상기해보면 <조선일보>의 이런 행보는 다분히 의도적인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 배경에 또다른 실체적 이유가 존재할 수 있으나 결과적으로는 일본에 대한 한국과 중국의 반감을 표현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언론이 이런 방식으로 능동적으로 상황을 해석해 행보할 수도 있겠지만 국익의 추구와 자신들의 지면 편집을 동일시 하는 것이라면 위험할 수도 있다. 외교적 정세가 민감할 수록, 언론은 본분을 먼저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조선일보>에게 그런 것을 기대하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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