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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거대한 아버지와 같다는 말을 그간 머리로 알고는 있었지만 사실 국가란 나에게 허구헌날 사소한 일로 귀찮게 구는 동네 아저씨 같은 존재였다. 국민연금 내라, 의료보험료 내라, 전기세 밀렸다, 가스비 좀 진작 내라, 수돗물 끊어버릴 테다, 너 오토바이 타면서 헬멧 안 썼구나 벌금 3만원 내놔! 국가의 기역 자만 나와도 거품을 뿜으며 흥분하는 사람들도 있는 판국에 그리 애국자가 못되다 보니 나와 국가라는 것은 어쨌거나 서로 거기 있다는 것 정도만 인지하고 있는 다소 데면데면한 관계였다.
그러다가 2008년, 모든 것이 바뀌었다. 좁쌀영감처럼 쪼잔하게 이 돈 내라 저 돈 내라 나라 꼴이 말이 아니다 힘들어 죽겠다 하며 나를 성가시게 하는 동네 아저씨 같았던 ‘국가’는,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을 이를 갈며 아쉬워하는 사람들의 손에 들어가더니 무시무시한 얼굴을 하고 한 손에는 몽둥이를 든 힘세고 의기양양한 가부장으로 변했다. 네가 어디에 갈지, 무엇을 할지는 내가 정한다, 그것을 어긴다면 벌을 받는다! 하고 국가는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외쳤고, 그것을 그대로 시행했다. 그 시작은 다들 알다시피 광우병 정국이었다.
국가라는 거대한 아버지가 온 힘을 다해 촛불을 든 버린 자식들을 탄압할 때, 놀랍게도 그 아버지는 진실로 자신이 하는 일이 옳다고 철저하게 믿었다. 말 안 듣는 자식에게 사랑의 매를 안기듯 물대포를 쏘고 형광색소로 얘가 나쁜 애라고 표시하고 군홧발로 짓밟았다. 진짜 아버지의 사랑의 매가 그나마 알량한 사랑이라도 담겨 있다면, 이 아버지의 매에는 어떠한 사랑도 없이 그저 경멸과 짜증만이 들어 있었다. 경찰은 아버지의 매 노릇을 하며 우리에게 덩달아 짜증을 냈다. 때로는 욕설을 퍼부었다. 너희들 때문에 우리가 잠 못자고 이 고생이잖아, 힘들어 죽겠어. 아직까지 기억이 선명한 6월 1일 새벽, 젊은 혹은 어린 전투경찰들의 뒤에 서서 핸드마이크로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지휘관의 목소리에는 광기까지 느껴졌다. 역시, 이쪽도 국민의 종복은 아니었다. 국가라는 거대한 아버지의 편을 들어 우리 버린 자식들을 처단하는 아버지의 충실한 자식이 거기 있었다. 그는 외쳤다. “야! 다 죽여 버려, 이 새끼들아! 다 죽여 버리란 말이야!” 방패를 들고 땀을 흘리던 전투경찰은 아직 풋풋한 얼굴이 시뻘개져서 계속 소리쳤다. “씨발 놈들, 씨발 놈들!” 민중의 지팡이가 아니라 민중을 때리는 매 노릇을 하느라 피로가 쌓인 경찰들의 얼굴은 버린 자식들에게 또 다른 압박이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2008년, 우리에게 증오를 선물했다.
우리 말고도 버린 자식은 많았다. ‘촛불세력’이 국가에게 버린 자식이듯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아주 오랫동안 버려져 있는 자식들이었다. 그들 역시 사측에게 있어서는 성가신 버린 자식, 없어도 되는 천덕꾸러기 자식, 열 손가락 깨물어도 안 아픈 손가락이었다. 어디서 주워 와서 써먹을 수 있을 때까지 쓰다가 갖다 버려도 아무 상관없는 자식이었다. 각각의 비정규노동자 투쟁 사업장을 탄압하는 사측에는 국가라는 거대한 아버지를 꼭 닮은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충실한 자식들이 어디에나 있었다. 그들은 말했다. 정규직이 되고 싶으면 대학을 가서 공부를 잘했어야지. 다 회사 잘되라고 한 일인데 나한테 왜 이러냐, 너희들이 나라를 망친다. 심지어 성모병원 투쟁사업장에는 여직원들이 구사대에 합류해 남편에게 충실한 아내처럼 노동자들에게 욕설과 폭력을 서슴지 않았다. 기륭전자 투쟁에서는 사측이 고용한 용역 깡패, 그리고 구사대와 경찰이 협력하여 시민에 대한 폭력을 도발하고 진행하고 방치하는 환상적인 협동 플레이를 보여 주었다. 거대한 아버지의 떡고물을 받아먹고 싶은 이들은 이렇게 협업하여 아버지의 집단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 작은 아버지들은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자본이 싫으면 다 북한 가라! 촛불은 무력하다. 너나 노동운동이 싫으면 북한 가서 사업해, 하고 입술을 깨무는 수밖에 아무 것도 없다. 2008년의 촛불시위는, 그렇게 우리 사회에 저마다 가정의 대장이 되려는 추악한 아버지 천지라는 것을 그 약한 빛으로 비추었다. 국민은 그저 국민이다. 어여삐 여김을 받아야 할 어린 백성도 아니고, 지도와 훈육을 받아야 할 어린 자식도 아니다.
노동자와 자본가, 국민과 국가는 대등한 관계일 뿐 결코 어린 백성과 지도자, 혹은 어린 자식과 아버지가 될 수 없다. 굳이 국가가 폭력으로 상기해 주지 않았더라면 그냥 대충 생각하며 살았을 문제였을 수도 있다. 시위 중 입은 상처 위에 다시 물대포를 맞은 자리는 도대체 그 물에 뭘 탄 건지 한 달 동안 아물지 않고 진물이 흐르더니, 좀처럼 없어지지 않을 것 같은 흉터를 남겼다. 마음에는 어떤 흉이 남았는지 모르겠다. 국가는 국민을 선별해서 보호한다는 것, 그것도 제 입맛에 맞는 국민만 보호한다는 것이 이 흉터에서 내가 얻은 교훈이었다. 그렇다면, 버린 자식답게 제멋대로 살 수밖에. 가짜 아버지들, 이제부터 시작이다. 멋대로 아버지인 척하지 말아요, 이 아저씨들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졸업하고 영화 <언니가 간다>의 시나리오에 참여했다. 쓴 책으로 <네 멋대로 해라> <불량소녀백서> <질투하라 행동하라> <당신의 스무살을 사랑하라>와 <여자에게> <어머니의 노래>(공저)등이 있다. 현재, <시사in>, <매거진t> 등에 고정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