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사다난하지 않은 해가 있으랴마는, 또 2008년 같은 해가 있을까도 싶습니다.
얼핏 헤아려보아도………… 숨이 가쁩니다. 벌써 연말이냐 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2008년의 달력도 이제 딱 2장뿐 입니다.

매혹적인 촛불과 아찔한 경제 상황이 이어지며 2008년의 시간은 흘렀습니다.
뜻밖에도 빈곤한 민주주의의 문제가 폭로되기도 하였고,
때론 시간을 거슬러 오른 것과 같은 회귀를 경험하기도 하였습니다.
낙하산은 작렬하였고, 야구는 꽃을 피웠습니다.

어디에 서 있는가, 무엇을 보려했는가에 따라, 2008년의 가치는 천지차이일 것입니다.
<미디어스>는 옳고 그름의 판단이 아닌 영원한 시간으로서의 2008년을 기억하기 위해,
주 1회 <발견, 2008 “내가 만난 2008년의 무엇”>의 연재를 시작합니다.

이번 연재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미디어의 1년을 정리한다기 보다는
어느 노 소설가의 말처럼 누구나 오늘을 산다는 평범함 진리를 좇아 볼 예정입니다.
별다르지 않게, 누구나처럼 치열히 하루를 보냈던 시대의 관찰자들과 함께 합니다.

모쪼록, 이번 연재가 당신이 발견한 2008년 무엇과 만날 수 있는 계기이기를 바라봅니다.

국가가 거대한 아버지와 같다는 말을 그간 머리로 알고는 있었지만 사실 국가란 나에게 허구헌날 사소한 일로 귀찮게 구는 동네 아저씨 같은 존재였다. 국민연금 내라, 의료보험료 내라, 전기세 밀렸다, 가스비 좀 진작 내라, 수돗물 끊어버릴 테다, 너 오토바이 타면서 헬멧 안 썼구나 벌금 3만원 내놔! 국가의 기역 자만 나와도 거품을 뿜으며 흥분하는 사람들도 있는 판국에 그리 애국자가 못되다 보니 나와 국가라는 것은 어쨌거나 서로 거기 있다는 것 정도만 인지하고 있는 다소 데면데면한 관계였다.

그러다가 2008년, 모든 것이 바뀌었다. 좁쌀영감처럼 쪼잔하게 이 돈 내라 저 돈 내라 나라 꼴이 말이 아니다 힘들어 죽겠다 하며 나를 성가시게 하는 동네 아저씨 같았던 ‘국가’는,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을 이를 갈며 아쉬워하는 사람들의 손에 들어가더니 무시무시한 얼굴을 하고 한 손에는 몽둥이를 든 힘세고 의기양양한 가부장으로 변했다. 네가 어디에 갈지, 무엇을 할지는 내가 정한다, 그것을 어긴다면 벌을 받는다! 하고 국가는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외쳤고, 그것을 그대로 시행했다. 그 시작은 다들 알다시피 광우병 정국이었다.

국가는 말했다. 광우병 쇠고기가 싫으면 삶아 먹어라! 이건 아니잖아, 싶어 촛불을 하나씩 손에 들고 나선 사람들에게는 어떤 힘도 없었다. 과거 박정희, 전두환 때는 그런 일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20대들에게는 알지 못하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NL은 뭐고 PD는 뭔지, 운동이 뭔지 좌파가 뭔지 잘 몰랐다. 나 역시 그랬다. 세대도 달랐고, 다들 먹고 살기와 취직 걱정에 바빴지만 안 나갈 수 없었다. 광장을 채운 그 많은 사람들을 관통하는 일관된 정서는 바로 이것이었다. ‘이건 아니잖아.’ 그러나 국가는, 힘센 아버지는 그러한 국민들의 항의를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일인데 왜 이러니!’ 하는 식으로 ‘철모르는 자식들의 반항’정도로 취급했고, 촛불을 든 이 어리숙한 무리를 ‘촛불세력’이라는 음험한 이름으로 명명했으며 ‘전문시위꾼’ ‘폭도’로 규정했다. 그러나 국가는 소위 ‘촛불세력’을 ‘전문시위꾼’ ‘폭도’로 규정하며 말 안 듣는 나쁜 아이 취급을 했다. 잃어버린 10년만 지나면 곧 집안을 일으킬 것처럼 큰소리를 땅땅 치던 아버지는 영 맥을 못 추었고, 술 한잔 걸치고 하소연을 늘어놓는 아버지처럼 자기를 믿고 따라 주어야지 그렇지 않다고 불평했다. 우리에게는 인상을 쓰는 무서운 아버지였지만 그런 아버지가 힘센 옆 동네 미국 아저씨 앞에 가서는 우리에게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더없이 얌전하고 순한 양이 되었다. 국가가 국민의 종복이라지만 도대체 누구의 종복인지 우리는 아연했다. 그리고 그는 못 살겠다고 괴로워하는 우리를 향해 준엄하게 힘드냐? 참아라…. 뒤통수를 무언가로 세차게 얻어맞듯, 뭔가를 알 것 같았다. 아, 저들은 절대로 종복이 아니었구나. 종복이 될 생각조차 없구나. 심지어 지금 저 아버지(들)는 우리를 적자 취급하고 있지도 않구나. 친아버지가 아니라서 저랬구나, 남의 쟈식이라 이렇게 막 대했구나. 촛불을 들고 거리에 서 있는 우리들은, 그에게 버린 자식이었다.

국가라는 거대한 아버지가 온 힘을 다해 촛불을 든 버린 자식들을 탄압할 때, 놀랍게도 그 아버지는 진실로 자신이 하는 일이 옳다고 철저하게 믿었다. 말 안 듣는 자식에게 사랑의 매를 안기듯 물대포를 쏘고 형광색소로 얘가 나쁜 애라고 표시하고 군홧발로 짓밟았다. 진짜 아버지의 사랑의 매가 그나마 알량한 사랑이라도 담겨 있다면, 이 아버지의 매에는 어떠한 사랑도 없이 그저 경멸과 짜증만이 들어 있었다. 경찰은 아버지의 매 노릇을 하며 우리에게 덩달아 짜증을 냈다. 때로는 욕설을 퍼부었다. 너희들 때문에 우리가 잠 못자고 이 고생이잖아, 힘들어 죽겠어. 아직까지 기억이 선명한 6월 1일 새벽, 젊은 혹은 어린 전투경찰들의 뒤에 서서 핸드마이크로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지휘관의 목소리에는 광기까지 느껴졌다. 역시, 이쪽도 국민의 종복은 아니었다. 국가라는 거대한 아버지의 편을 들어 우리 버린 자식들을 처단하는 아버지의 충실한 자식이 거기 있었다. 그는 외쳤다. “야! 다 죽여 버려, 이 새끼들아! 다 죽여 버리란 말이야!” 방패를 들고 땀을 흘리던 전투경찰은 아직 풋풋한 얼굴이 시뻘개져서 계속 소리쳤다. “씨발 놈들, 씨발 놈들!” 민중의 지팡이가 아니라 민중을 때리는 매 노릇을 하느라 피로가 쌓인 경찰들의 얼굴은 버린 자식들에게 또 다른 압박이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2008년, 우리에게 증오를 선물했다.

우리 말고도 버린 자식은 많았다. ‘촛불세력’이 국가에게 버린 자식이듯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아주 오랫동안 버려져 있는 자식들이었다. 그들 역시 사측에게 있어서는 성가신 버린 자식, 없어도 되는 천덕꾸러기 자식, 열 손가락 깨물어도 안 아픈 손가락이었다. 어디서 주워 와서 써먹을 수 있을 때까지 쓰다가 갖다 버려도 아무 상관없는 자식이었다. 각각의 비정규노동자 투쟁 사업장을 탄압하는 사측에는 국가라는 거대한 아버지를 꼭 닮은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충실한 자식들이 어디에나 있었다. 그들은 말했다. 정규직이 되고 싶으면 대학을 가서 공부를 잘했어야지. 다 회사 잘되라고 한 일인데 나한테 왜 이러냐, 너희들이 나라를 망친다. 심지어 성모병원 투쟁사업장에는 여직원들이 구사대에 합류해 남편에게 충실한 아내처럼 노동자들에게 욕설과 폭력을 서슴지 않았다. 기륭전자 투쟁에서는 사측이 고용한 용역 깡패, 그리고 구사대와 경찰이 협력하여 시민에 대한 폭력을 도발하고 진행하고 방치하는 환상적인 협동 플레이를 보여 주었다. 거대한 아버지의 떡고물을 받아먹고 싶은 이들은 이렇게 협업하여 아버지의 집단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 작은 아버지들은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자본이 싫으면 다 북한 가라! 촛불은 무력하다. 너나 노동운동이 싫으면 북한 가서 사업해, 하고 입술을 깨무는 수밖에 아무 것도 없다. 2008년의 촛불시위는, 그렇게 우리 사회에 저마다 가정의 대장이 되려는 추악한 아버지 천지라는 것을 그 약한 빛으로 비추었다. 국민은 그저 국민이다. 어여삐 여김을 받아야 할 어린 백성도 아니고, 지도와 훈육을 받아야 할 어린 자식도 아니다.

노동자와 자본가, 국민과 국가는 대등한 관계일 뿐 결코 어린 백성과 지도자, 혹은 어린 자식과 아버지가 될 수 없다. 굳이 국가가 폭력으로 상기해 주지 않았더라면 그냥 대충 생각하며 살았을 문제였을 수도 있다. 시위 중 입은 상처 위에 다시 물대포를 맞은 자리는 도대체 그 물에 뭘 탄 건지 한 달 동안 아물지 않고 진물이 흐르더니, 좀처럼 없어지지 않을 것 같은 흉터를 남겼다. 마음에는 어떤 흉이 남았는지 모르겠다. 국가는 국민을 선별해서 보호한다는 것, 그것도 제 입맛에 맞는 국민만 보호한다는 것이 이 흉터에서 내가 얻은 교훈이었다. 그렇다면, 버린 자식답게 제멋대로 살 수밖에. 가짜 아버지들, 이제부터 시작이다. 멋대로 아버지인 척하지 말아요, 이 아저씨들아.

김현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졸업하고 영화 <언니가 간다>의 시나리오에 참여했다. 쓴 책으로 <네 멋대로 해라> <불량소녀백서> <질투하라 행동하라> <당신의 스무살을 사랑하라>와 <여자에게> <어머니의 노래>(공저)등이 있다. 현재, <시사in>, <매거진t> 등에 고정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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