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우 대표] 창간한 지 1년이 지났다. 신생매체라는 딱지를 뗄 때도 된 듯하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라는 생각이 앞선다. 신생매체라면 가지고 있어야 할 에너지를 계속 유지하고 싶은 욕심과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은 먼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지난 1년은 신생매체로서의 의욕과 허점이 동시에 나타났다고 자평해본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안이 발생하는 미디어 환경에서 적은 인원과 작은 물적 바탕으로 매체로서의 위용을 갖추며 생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는 비단 미디어스만의 문제는 아니다. 동시대 존재하는 많은 인터넷 매체들이 안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막연한 생존의 욕구는 오히려 불안을 낳는다. 결국 ‘어떻게 생존할 것이냐’보다는 생존해야 하는 필요성을 새삼 확인해보는 시간이 지난 1년여의 <미디어스>였으면 한다. 그동안 많은 변화와 상황이 발생했다. 정치권력의 변화를 우선 꼽을 수 있다. 그리고 그에 따른 감당할 수 없는 변화가 있었다. 그 속에 미디어스가 있었으면 했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서 지난 1년은 미디어스가 넘어야 할 그곳이다.

지난 1년이 소문난 잔치치고 먹을 것 없다고 요란했던 것만은 아닌지 되돌아본다. 준비하는 사람 입장에서 풍성한 잔치를 마련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조만간 올 훗날을 기약해본다. 그동안 미디어스에 관심과 조언을 아끼지 않은 많은 분들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 인사를 올린다.


[안영춘 편집장] <미디어스>는 단출하다. ‘안빈낙도’하기에 맞춤한 규모다. 내로라하는 대기업들이 작은 구설수에도 벌벌 떠는 걸 보면, 규모의 가치란 참으로 취약하다는 걸 느끼곤 한다. 잃을 게 많거나, 혹은 능력 이상 많이 가진 자들은 두려움이 클 수밖에 없고, 그럴수록 가진 힘의 노출을 극대화해 두려움을 떨쳐내려고 한다. 미디어스는 적어도 그런 공포와 허풍에서 자유롭다.

하지만 미디어스는 안빈낙도할 처지가 못된다. 그러려고 모이고, 만든 조직이 아니다. 더구나 미디어스의 지난 1년은 시기적으로도 애꿎다. 하필 세상이 파시즘의 정서로 충만할 무렵 창간해, 겨우 옹알이를 시작할 즈음부터 대중의 촛불을 비추고 정권의 언론장악 기도를 폭로하느라 1년 내내 과로와 만성피로에 시달리고 있다. 시대 앞에서, 미디어스의 규모는 궁벽했다.

그럴수록 긴요한 건 초심이다. 왜 우리는 이 거센 풍파에 한 장 낙엽배를 띄웠던가. 답은 미디어스의 캐치프레이즈 안에 온전히 박혀 있다. ‘우리가 미디어다.’ ‘우리’는 내부 구성원이기도 하지만, 상업자본 미디어에 의해 타자화된 모든 수용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초심을 잊었고, 방향을 잃었다. 규모에 입각한 기존 미디어의 관심사와 문법에 젖을 때도 있었다.

안은 안대로, 안과 밖은 안팎 사이대로 더 넓고 강한 연대, 더 진솔하고 격의없는 소통을 해야 비로소 ‘우리’가 있고, ‘미디어’가 된다. 미디어스는 그것을 지향하고 있고, 곧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한 우리의 힘은 익숙함과 결별하려는 정서적 예각과 전망을 탐색하고자 하는 지적 성실성에서 나온다. 규모의 궁벽함을 넘어서서, 바로 그 2%를 일상에서 실천해가자.


[정영은 기자] 나는 <미디어스>에 합류한 지 반 년이 넘어섰다. 앞선 6개월 동안은 미디어스 기자들에게 취재 당하는 입장이었는데, 올 봄부터 취재 다니는 미디어스 기자 일을 하고 있다. 보도자료를 생산해내던 입장으로 살다가, 보도자료를 선택하는 입장으로 자리바꿈한 것이 여러 가지로 재미난 일로 보이는지, 미디어스 출근 직후 인터뷰 요청을 받은 적도 있었다. 쑥스러워 사양하긴 했지만.

새로운 도전은 늘 기분좋은 긴장감을 주며 삶을 즐겁게 만든다. 그래서 더이상 도전거리가 사라진 전 직장을 미련없이 나왔던 것이고. 내가 취재원일 당시 미디어스는 가끔 눈에 띄는 ‘비평 기사’로 무릎을 치게 하던 것 이외에는 그닥 큰 존재감이 없던 매체였다.

그러던 중 잠깐의 백수 시절, 미디어스의 모 기자는 그네들의 ‘우리가 미디어다’는 도발적 문구로 나를 도발했다. 결국 나는 도발의 가능성을 눈여겨 본 탓에, 반년의 세월을 넘겨가며 미디어스 편집국 사무실에서 ‘지지고 볶고’ 하며 지내고 있다.

미디어스 구성원으로서 겪은 지난 세월의 소회를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다른 삶은 엄청나게 골치아프고 피곤하다’는 것. 하여, ‘기초 체력 증강’에 힘을 쏟아야겠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미디어스가 언론계 소식지가 아닌 ‘남다른 매체 비평지’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넘어서야 할 산은 한둘이 아니다. ‘부족한 취재인력과 적은 기사량’이라는 지적이 고착화되지 않으려면, 보다 확실하고 새로운 매체의 상을 만들기 위한 ‘마이 웨이’를 제대로 찾는 일이 시급하다.

그럼에도 편집국을 들여다보면 하루살이에 지쳐 ‘장기적 전망에 대한 불안감’을 잊은 듯 답답해 보이는 날이 많아 안타깝지만, 한편 ‘수다 파워’을 믿는 내게는, 미디어스 편집국에서 벌어지는 아이템 관련 등등 각종 새로운 수다들이 ‘체력 증진제’이자 ‘희망’으로 다가온다.

언론판에서 십수년을 살아와 몸에 베인 ‘익숙한 기자문법’들을, 새로움을 위해 무던히도 버리려고 애쓰는, 이 징글징글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열린 수다’라는 소통체계. 그것이 때론 지나친 자극이 되어, 야근 퍼레이드를 무감하게 받아들이게 된다는 단점도 종종 발생하긴 하지만.

머릿속에 맴돌던 ‘우리가 미디어다’는 캐치프레이즈의 ‘실제’를, 뜨거운 ‘촛불 광장’을 겪으면서 다소간 체험한 미디어스 편집국 여러분. 야근에도 과로에도 굴하지 말고, 소통의 중요성을 끈질기게 붙잡고, 오늘도 열심히 창의적인 수다로 뇌폭풍을 이루어 봅시다~! 그리하여, 머릿속 어렴풋한 각자의 ‘마이 웨이’를 또렷한 ‘아워 웨이’로 만드는 은혜를 경험해볼까요~


[곽상아 기자] 기자 지망생 시절, KBS1TV <미디어포커스> <미디어오늘> 등 매체비평 언론을 보며 크나큰 ‘짜릿함’과 ‘쾌감’을 느꼈던 나에게 <미디어스> 입사는 큰 행운이었다. 뻔한 문구일 수 있으나, 나는 미디어스가 ‘긴장의 끈을 유지하는 기자들이 질 좋은 기사를 꾸준히 만들어내는 매체’이길 바랐다. 그리고 나는 그 속에서 내 마음속 독(毒)을 꾸준히 벼려가는 구성원이고 싶었다.

하지만 미디어스의 지난 1년을 되돌아보니, 찔리는 게 많다. 외부에서 ‘얘네들 도대체 뭘 하기에 이 모양이냐’라는 질책을 받아도 별로 할말 없다. ‘속보는 과감히 버리고 심층으로 간다’는 애초의 기사 방향은 흩뜨려지기 일쑤였고, 이에 따라 미디어스에는 속보와 심층, 둘다 없었던 적도 많다. 이는 솔직히 고백건대, 내 힘으론 도저히 어쩔 수 없었던 회사 내부의 온갖 사정과 개인적으로 부족한 역량 때문이었다.

여전히 미디어스는 문제투성이지만 장점도 많다. ‘민주적인 편집국 운영체제’와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것. “경쟁매체보다 빨리 기사 써내라”고 위에서 ‘쪼는’ 사람도 없으니 그저 ‘일’에 불과할 수도 있는 이 작업들은 매우 재미나게 여겨지기도 한다. (가끔씩 모든 걸 내팽개치고 사막으로 튀고 싶을 때도 있지만!)

이런 내부 운영방식은 타매체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유쾌한 기사’로 나타나고 있으니, 미디어스의 앞날이 가시밭길만은 아닌 것 같다. 하긴, 가시밭길이면 뭐 어떠랴. 가시에 찔려 피투성이가 될지라도, 나를 포함한 미디어스 구성원들은 할 수 있는 데까지 헤쳐나가 보겠다.


[송선영 기자]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노랫말 이 한 마디가 스무살 나의 가슴에 박혔다. 친구들 중에서도 ‘애어른’ 쪽에 속했던 나는 스무살 무렵부터 서른살의 모습을 수없이 상상했다. 그리고 나는 서른살의 나에게 편지를 썼다. 잘 기억나지 않지만 ‘기자로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느냐’고 스스로 반문하는 내용이었던 듯 하다.

나는 요즘 이런 생각을 자주 한다. ‘서른 살의 내가 그 편지를 읽을 즈음이면 <미디어스>는 어떤 모습일까?’란 생각과 그 안에서 ‘'어떤 기자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끝없는 물음에 스스로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 아니 더 근본적으로, 나의 서른 즈음에 미디어스가 굳건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 말이다.

미디어스는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 편집국 안에서 ‘일방적 지시’가 아닌 비교적 많은 소통을 거쳐 기사가 작성되고, 외압과 강요에 의한 기사는 작성되지 않는다. (가끔 편집장의 지시가 있긴 하지만 ‘강요’일 뿐 ‘외압’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쓰고 싶은 말’을 후련하게 기사로 훌훌 털어낼 때면 미디어스가 언론사라기 보다는 나의 즐거운 놀이터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이곳은 분명, 나에게 유쾌하고 즐거운 곳이다.

하지만 지금 미디어스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일부 언론의 보도 행태를 비판하면서도 정작 미디어스는 외면하고 싶었던 내부의 문제가 외부로 고스란히 반영될 만큼 취약하고, 내부 비판에 인색하다. 그들을 비판할 그릇을 가지고 있는지, 비판할 만큼의 끊임없는 자기 반성을 하고 있는지 나는 미디어스에게 묻고 싶다. 사회에 대한 깊은 성찰과 고민은 생략한 채 그저 하루하루를 유쾌하게만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묻고 싶다.

이는 미디어스 내부 비판이기 전에 나의 부족함을 고하는 ‘고해성사’와도 같다. 미디어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우리들은 무엇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 그저 하루하루 터지는 사안을 ‘헉헉’대며 ‘밍밍’하게 접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모두의 진솔한 반성이 필요한 때다.


[남현지 기자] ‘어쩔 수 없음’이라는 삶의 곤란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이해하게 되면서 청춘은 가는 법. 삶은 참 난감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쯤 <미디어스>에 입사했고, 이제 겨우 두 달이 지났다. 업데이트 되지 않는 항목이 거슬려 내일 당장이라도 사이트를 리뉴얼하지 않으면 내가 2메가요 싶은 혈기도 잠깐이더라. 하루하루 닥치는 일을 처리하는 것도 벅차지니 마시는 술은 죄다 취생몽사요, 부르는 노래는 죄다 내일이면 잊으리다. 그래서, 이해한다. 미디어스라는 매체, 남들 눈에도 빤히 보이는 매체적 문제점도 신입이 찔러도 욱하고 찔릴 수밖에 없는 조직적 문제점도 내부 구성원들이 모르는 바 아닐 거다. 문제의식이 차고 넘쳐흘러도 문제의식을 실천으로 구성할 동력이 없어 난감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겠지.

그런데 말이다. 청춘은 그렇게 가는 법이라고 아무리 고개를 끄덕거려도 가끔씩 등골이 서늘해질 때가 있더라. 어쩌면 삶의 가여운 본질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해서 삶의 지향적 긴장까지 완전히 놓아버린 것은 아닐까, 그래서 부지불식간에 이 늙음(?)은 타락하고 있는 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매일 기사와 전쟁을 치르고 있는 사무실에서 벌떡 일어나 “당분간 사이트 닫아 겁시다!”라고 똘끼를 방출하고 싶을 때 그런 위기감이 든다. ‘미디어 비평’이라는 미디어스의 안전한 기치가 실제로는 우리에게서 미디어에 대한 사유를 멈추게 한 것은 아닌지, ‘미디어’라는 카테고리 속에서 줄기차게 기사만 생산해내고 그것에 자족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미디어스라는 매체의 지향은 습관이 대체하고 있거나, 액자 속에 넣어 벽에 걸어두고 1년 만에 다정하게 늙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삶뿐만 아니라 조직에서도 문제의식을 실천으로 구성하는 동력은 ‘지향’이다. 아무리 기사가 급하고 아무리 업데이트가 급해도 끊임없이 그 지향을 서로에게 묻고 확인하고 조율하지 않는다면 ‘기사 없는 날’과 다를 바 없고, 아무리 종일을 함께 있어도 술 먹은 기억 밖에 없는 대학시절 ‘그 놈의 공동체성’과 다를 바 없다. 그러니 우리 더 늦기 전에, ‘그래도 우리 열심히 살았잖아’하는 위로가 나오기 전에, 문제를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누가 지적하면 ‘안다고오~’ 짜증나기 전에 한 번, 치고 박고서라도 한 번 서로에게 물어보자. 우리는 지금 어떤 희망으로 www.mediaus.co.kr을 클릭하고 있냐고, 그래서 어떻게 해야 그 희망이 개발새발 피어날 수 있냐고 말이다.


[윤희상 팀장] 개인적으로는 <미디어스> 1주년과 함께 미디어업계 종사 1년을 맞이했다. 그간 소회를 쓰기 위해 자판을 두드리다 무심코 사이트를 보니 구본홍 “언론사도 법 위에 군림할 수 없어”라는 제목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미디어스에 오기 전 어느 술자리에서 “언론사도 결국 자본에 종속된 ‘회사’일 뿐이야”라는 말을 내가 했던 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간 재직했던 회사들이 재정 문제로 고생을 많이 했던 경험이 큰 탓인지 ‘정글의 생존 법칙’이 적용되는 시장의 현실을 강조하고자 했던 얘기인 것 같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논쟁은 남겨 두고, “언론, 저널리즘, 비평 따위의 ‘숭고한 지향을 실현하는 것’과 ‘튼실한 재정적 기반’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다”라는 믿음은 (‘지향을 가지는 것’과 ‘지향을 실현하는 것’은 다르다는 점에서) 지금도 유효하다.

“언론사도 법 위에 군림할 수 없어”라는 말에서 ‘법’을 ‘자본’으로 바꿔 놓고 보면, 생존경쟁의 전투를 벌여가는 미디어스와 또다른 미디어스들의 현실과 폭풍전야 앞에 놓인 YTN의 현실은 맞닿아 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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