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에덴의 동쪽>은 황무지이다. 존 스타인벡의 소설 <에덴의 동쪽>은 한 가족의 3대에 걸친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선과 악, 죄와 구원의 문제를 심층적으로 파헤치면서 고전의 반열에 올랐고, 엘리어 카잔 감독의 영화 <에덴의 동쪽>은 사랑을 거부당하는 자의 고통에 초점을 맞추면서 아론의 쌍둥이 동생 칼 역을 맡았던 영화배우 제임스 딘을 반항적인 우수와 고독의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MBC 창사47주년특별기획드라마 <에덴의 동쪽>(나연숙 극본, 김진만·최병길 연출)은 폭력과 음모가 난무하는 볼품없는 황무지에 지나지 않는다. “엇갈린 운명으로 두 번의 인생을 거듭 살아내야만 하는 두 가문의 ‘파란의 가족사’를 통하여 진정한 사랑과 영혼의 구원이 휴머니즘의 회복임을 해부”하겠다는 드라마 기획 의도는 그저 선언에 지나지 않고 오히려 통속적인 싸구려 감상성만 극대화시키면서 한국 사회를 피로 물들였던 노동운동과 빈민운동의 시대적 의미를 훼손한 ‘싸구려 신파’의 면모만 확인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탄광노동자 ‘이기철(이종원 분)’의 노동운동과 이를 막기 위한 탄광영업소 소장 신태환의 악연이 도시 개발을 빌미로 자행된 달동네 강제 철거에 맞선 빈민운동으로 확대 재생산되는 과정에서 이기철과 신태환의 자식들은 ‘가문의 명예’를 걸고 극한상황까지 대립한다. 이동철은 신태환 때문에 도망치듯 한국을 떠나 마카오에서 항구 노동자로 떠돌다가 카지노 대부 ‘국대화(유동근 분)’의 도움으로 한국에 돌아와 신태환에게 복수할 기회를 노리며 국대화의 사냥개 노릇을 한다. 그리고 이동욱은 남편을 죽인 원수 신태환을 법적으로 심판하기 위해서 판검사가 되어야 한다며 지극정성으로 뒷바라지한 어머니 ‘양춘희(이미숙 분)’의 기대에 부응하여 서울대 법대를 수석 입학하지만 강제 철거의 불법성에 분노하면서 빈민운동에 뛰어들어 정부의 감시를 받는 요주의 인물이 된다. 이처럼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이동철과 이동욱 형제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어둠과 빛의 세계에서 신태환에게 복수의 칼날을 겨눈다.
자칫 단순할 수 있는 ‘복수’ 모티프는 언제든지 뒤바뀔 수 있지만 뫼비우스의 띠처럼 악연의 시작과 끝이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역동적이며 극적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원수에게 복수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형제의 눈물겨우면서도 뜨거운 사랑도 시청자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한 극적 요소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지나칠 정도로 통속적인 싸구려 감상성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동생을 보호하기 위해 동생 대신 방화죄를 뒤집어쓰고 소년원에 수감되면서 정상적인 삶의 궤도에서 벗어나 마카오로 도망쳤다가 한국으로 돌아온 이동철이 국대화 회장의 도움을 받아 빈민운동 주동자로 고문당하던 이동욱을 구한 뒤 재회하는 장면은 드라마의 격을 떨어뜨리는 싸구려 감상성의 과잉일 뿐이다. 이동욱을 사랑하면서도 신명훈에게 끌려 다니다가 강제로 임신한 뒤 죽음을 생각하던 ‘지현(한지혜 분)’이가 태아를 위해 사랑하지도 않는 신명훈과의 결혼을 결심하는 과정의 상황 묘사 역시 ‘싸구려 신파’의 정형성을 보여줄 뿐이다.
개연성이 떨어지는 작위적인 상황 설정은 이뿐만이 아니다. 어린 시절의 이동욱이 신명훈에게 받은 생일선물을 짬통에 넣는 것을 본 신태환이 분노하면서 이동욱과 이동철 형제에게 린치를 가하는 것이나, 남편과 함께 노동운동을 하던 사람이 신태환의 수족이 되어 아들 형제를 괴롭히는 상황에서 저항 한 번 못하던 양춘희가 신태환을 찾아가 남편의 죽음에 대한 보상금에 불을 지르면서 격렬하게 저항하는 것은 특별한 계기 없이 이루어지는 급작스런 성격 변화로 대단히 작위적이다. 또한 이동철 형제의 모든 것을 꿰뚫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태환의 위협이 매번 일회성으로 끝나면서 단순하게 되풀이되는 것도 작위적이긴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신태환에 대한 이동철의 복수를 정당화하고 시청자의 연민을 이끌어내기 위해 단순하게 반복되는 작위적인 설정은 극적 설득력을 가질 수 없다. 등장인물의 행동에 의해 촉발되는 극적 상황들은 단순 반복이 아니라 점층적으로 상승하는 힘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여성 등장인물의 대부분이 사랑에 목숨 건 비주체적인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도 <에덴의 동쪽>의 통속적인 싸구려 감상성을 자극하는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카지노 사업의 후계자로 손색없다는 ‘국영란(이연희 분)’이나 언론재벌 대한일보의 후계자로 주목받는 서울대 법대 출신의 ‘민혜린(이다해 분)’은 겉으로 보기에 주체적인 여성상을 대변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동철에 대한 사랑을 거두지 못한 국영란이 아버지의 뜻에 따라 ‘마이크(데니스 오 분)’와 약혼을 하고, 아버지가 운영하는 대한일보를 정부 기관지라 비판하던 민혜린이 끝내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는 것은 이들이 여전히 남성성의 세계에 갇혀 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에덴의 동쪽>에서 다뤄지는 한국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이동철과 신태환의 대립 구도 속에 전경화되면서 당대의 시대적 아픔이 증발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나치게 정형화된 ‘악의 화신’으로서의 신태환은 탄광에서 건설 그리고 다시 전자로 이어지는 산업 구조의 변화 속에서 정치권력에 기생하면서 불법과 탈법을 일삼았던 한국의 재벌 그룹을 상징하기에는 2% 부족하고, 법과 정의를 대변하는 이동욱이 개발 독재 시대에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당했던 이 땅의 무수히 많은 민중을 위로하지 못한 채 시대의 아픔 정도로 그 의미가 축소된 것도 <에덴의 동쪽>의 시대정신을 의심하게 만든다. 더군다나 탐욕과 부패의 상징인 신태환을 향한 이동철의 복수가 사회적 저항으로 승화되지 못한 채 개인적 반항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도 심각한 문제이다. 이는 곧 <에덴의 동쪽>에서 묘사한 1960년대 탄광노동에서 1980년대 빈민운동에 이르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들이 “가족 간의 사랑과 헌신, 끈끈한 혈육의 정”을 강조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음을 의미한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불합리한 시대에 필요한 것은 개인적 반항이 아니라 사회적 저항이다. 그래야만 모두가 행복한, 진정한 사랑과 영혼이 구원받고 잃어버린 휴머니즘이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에덴의 동쪽>은 폭력과 음모가 난무했던 한국 현대사의 비극적인 사건을 시청률 확보 수단으로 이용하는 데 그쳤다는 비판을 받을 여지가 많은 드라마이다. 따라서 <에덴의 동쪽>이 진정 MBC 창사47주년특별기획드라마로서의 면모를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개발독재 논리가 팽배했던 산업화 시대의 구조적 모순과 그로 인해 파괴된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삶에 대한 냉철하고도 애정 어린 역사적 시선이 필요하다. 한국 현대사를 통찰할 수 있는 안목에 근거하지 않은 감상적 시선은 자칫 또 다른 역사 왜곡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그 어떤 사건이라도 드라마 속에서 형상화되는 순간, 그것은 바로 현재가 된다. 그런 만큼 한국 사회가 어떻게 휴머니즘을 잃어버렸는지 제대로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에덴의 동쪽>의 존재 이유는 충분할 수 있다. 그러나 전체 50회 분량 가운데 20회를 넘어 중반부를 향해 달려가는 지금, 기대보다 우려가 더 큰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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