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덕, 김성근, 신용균, 장명부, 김무종, 김일융, 고원부.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야구를 좋아한다면 다소 싱거운 문제일 수도 있다. 프로야구 초창기 지도자로서 선수로서 활동했던 재일동포 출신 야구인들이다. 이 중에서 김성근 감독은 혹독한 훈련을 동반한 강인한 리더십으로 국내 프로야구에 패러다임 전환을 가져와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리는 데 큰 공헌을 했다. 또한 지금도 현역 지도자들 중 가장 많은 팬층을 보유하고 있으며 '야신'(야구의 신)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고 있다.

60년대부터 한국야구는 급속한 발전을 이루게 되는데, 불모지나 다름없던 초창기 한국야구 발전에 큰 공헌을 했던 주역은 다름 아닌 재일동포들이었다. 김영덕, 김성근, 신용균, 배수찬 등의 재일동포 선수들은 60년대 한국으로 건너와 한 단계 높은 기량을 발휘하며 고국 야구 발전에 공헌했다.

▲ 영화 '그라운드의 이방인' 포스터
그리고 고국 대회에 참가 이후 일본으로 복귀할 때마다 본인들이 가지고 온 야구장비를 모두 물려주면서 한국 야구 인프라 발전에도 적지 않은 공헌을 하였다. 60년대 당시만 하더라도 헬멧조차 쓰지 못하고 야구를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고 하니, 일본의 선진야구 인프라가 그 당시에는 무척이나 귀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공로와는 달리 재일동포 선수들은 언제나 차별 대우와 '반쪽짜리 조선인'이라는 비아냥에 시달려야만 했다. 늘 우리 곁에 가까이 있는 듯했지만 정작 고국에 가까이 다가설 수 없었던 재일동포 선수들을 다룬 야구 다큐멘터리 영화 '그라운드의 이방인'은, 국내 프로야구 개막원년인 1982년 당시 봉황대기 야구 선수권대회 결승에 진출했던 재일동포 선수단을 조명하면서 동시에 재일동포 야구단의 뿌리와 그들의 숨은 활동을 들려준다.

1982년 봉황대기 고교야구 자료화면이 영화 중간중간 삽입되는데, 당시 고교야구 최고의 에이스로 군림하던 군산상고 투수 조계현(현재 KIA 타이거즈 수석코치)의 앳된 모습을 볼 수 있으며, 1980년대 후반 해태 타이거즈 킬러로 활약하던 빙그레 이글스 출신의 이동석이 군산상고 8번 타자로 타석에 서는 반가운 모습도 접할 수 있다.

당시 재일동포 선수단은 약체라는 예상을 뒤엎고 강호 천안북일고, 광주일고 등을 연파하고 결승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한다. 하지만 그들의 돌풍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하고 아쉽게 준우승에 머무른다. 당시 활약했던 선수들을 한 명씩 한 명씩 찾아 그들은 무려 31년 만에 반가운 동창회를 열게 된다. 영화를 보면서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은 당시 대회에 참가했던 재일동포 선수단에 조총련계 출신 선수가 4명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냉전이 극에 달하던 1980년대, TV에서 전략적으로(?) 방영되던 '동토의 왕국' 같은 드라마 속에서 그려지던 조총련은 북한의 지령을 받아 일본에서 간첩활동을 하는 집단으로 여겨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조총련(사회주의)과 민단(민주주의)은 서로 다른 사상노선을 취했지만 실제로 정면으로 충돌한 적은 없었고 다만 교류가 뜸할 뿐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조총련과 민단 사이에 놓여 있던 보이지 않던 장벽도 많이 허물어졌다고 한다.

1982년 재일동포 선수단을 찾아 나서는 과정은 예상보다 무난하게 흘렀는데, 찾아 나서는 과정에서 좀 더 흥미진진한 에피소드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초반에는 다소 담담하고 밋밋하게 그려지던 영화는 중반부를 지나면서 예전에는 몰랐던 가슴 아픈 사연이 소개되면서 몰입도를 더한다.

▲ 경기 전 인사를 나누는 충암고와 재일동포 선수들의 모습
배.수.찬. 야구를 좋아하는 필자도 쉽사리 떠올리기 힘든 이름이었다. 처음 이름을 들었을 때는 과거 LG 트윈스에서 코치로 활약했던 배수희 코치와 혼동되기도 하였다. 1957년 모국방문단으로 고국 무대에 처음 선을 보인 배수찬은 일본 고교야구에서도 촉망받는 유망주였다. 하지만 고국에서 야구를 하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고국 무대에 들어온 그는 압도적인 기량을 선보이며 국내야구 발전에 큰 공헌을 한다. 탄탄대로를 달릴 것 같던 그의 야구 인생은 예상치도 못한 암초에 부딪히게 된다.

그 암초의 주역은 다름 아닌 당시 서슬 퍼렇던 '공안정국'이었다. 북한의 북송사업으로 인해 그의 어머니는 북한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그의 누나는 조총련계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유명세를 타면서 그의 가족의 신상으로 인해 뜻하지 않게 공안정국의 주목을 받던 그는 1968년 1월 21일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발생하면서, 그의 가족들의 행적으로 인해 공안에 끌려가서 모진 고문을 당하고 풀려난다.

며칠간의 고문 이후 그는 더 이상 선수생활을 온전히 지속할 수 없었고, 만성적으로 겪던 당뇨로 인해 시력도 점점 떨어지게 된다. 은퇴 이후 지도자로 활동하고 프로야구 출범 이후 1985년 OB베어스에서 2군 감독도 역임했던 그는 결국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떠났고, 두 차례의 사업실패 이후 이듬해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고국 무대에서 뛰었지만, 결국 서슬 퍼런 공안정국의 희생양이 되면서 인생이 송두리째 망가진 그의 모습을 보는 동안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상식이 통하지 않던 그 시절. 이유 없이 당하고도 항변할 곳도 없던 그 시절. 그런 서슬 퍼런 시절에 대해 "그때가 좋았지"라는 말은 함부로 꺼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시대의 이면에는 모든 정보의 흐름이 차단된 상황에서 소리 소문 없이 목숨을 빼앗기거나 몸과 마음에 큰 생채기를 입은 채 평생 고통 속에 살아가야 했던 희생양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 제12회 봉황대기에서 준우승을 거머쥔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수소문 끝에 찾은 1982년 봉황대기 결승 멤버들은 31년 만에 당시 결승전이 펼쳐졌던 잠실 야구장 그라운드를 밟게 되고 1만여 명 관중들 앞에서 시구와 시타를 하는 감격을 누리게 된다. 처음에는 과연 자기들을 반갑게 맞이해 줄 것인지에 대해 반신반의하던 그들은 고국 관중들의 따뜻한 환대에 비로소 자신들의 걱정이 기우였음을 알게 되고 감회에 젖는다.

고국에서는 '쪽바리'라는 비아냥에 시달려야 했고, 정작 그들의 삶의 터전인 일본에서는 '조센징'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아야 했던 재일동포들을 재조명하고 그들의 공헌을 일깨워준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가치가 있다.

시사회가 끝난 후 故 배수찬 감독의 사모님이 직접 무대 인사에 나와 흐느끼며 자신의 남편은 누구보다 조국을 사랑했고 야구를 사랑했다고 소감을 전하는데 눈물이 핑돌 수밖에 없었다.

평생 마음에 얼마나 큰 짐을 안고 살아가야 했을까라고 생각하니 안타까움이 더해졌다. 1997년을 마지막으로 IMF 구제금융 사태로 인해 어려워진 주최사의 재정환경으로 인해 재일동포 선수들은 더 이상 봉황대기 대회에 초청받지 못하였다. 공교롭게도 1998시즌부터 프로야구에는 용병제도가 도입되었고, 그 이전까지 프로야구에서도 간간히 모습을 비추던 재일동포 선수들은 자취를 감추게 된다.

한국야구 초창기와 프로야구 초창기 모국 야구 발전의 큰 초석을 다진 숨은 공로자들. 하지만 늘 그라운드의 이방인으로 살아야 했던 재일동포 선수들의 공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700만 시대로 눈부신 성장을 거듭한 프로야구(현 KBO리그)도 이제는 재일동포 선수들을 추억하고 기념하는 이벤트를 만들어 재일동포 선수들의 숨은 공헌을 기념하는 것은 어떨까. 그들도 엄연한 한국인이고 그 누구보다도 한국야구를 위해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은 주역들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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