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의 시계는 2012년에 멈춰서 있다. 지난 2012년, 김재철 퇴진 및 공정방송 쟁취를 내걸고 진행했던 170일 파업의 상흔은 아직도 MBC를 '지배'하고 있다. 김재철 사장은 MBC 관리감독기구인 방송문화진흥회에서 해임 당했지만 당시 요직을 차지하던 '김재철의 아이들'은 대부분 아직 그대로다. ‘김재철 체제’는 흘러간 것이 아니라 MBC에 머물러 있다. 이 체제에 조금이라도 불편한 소리를 했거나 노조 활동을 한 직원들은 제거되고 있다. 셀 수 없는 인력들이 비제작부서로 가거나 징계를 받았다. 노사 간 법정 분쟁만 해도 열 손가락을 넘을 만큼 많다.

이런 상황에서 노조를 이끌어 갈 본부장 후보가 나타나지 않았던 것은 자연스러운 위축이었는지도 모른다. 전국언론노동조합 MBC본부(이하 MBC노조) 11대 집행부 선거는 차질을 빚었다. 다행히 후보는 나왔고, 선거는 무사히 마무리됐다. 새 위원장은 조합원 86.7%가 참여한 투표에서 98.2%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오늘의 MBC를 만든, 김재철 체제의 출발점이 됐던 <PD수첩> ‘미국산 소고기, 과연 광우병에서 안전한가’ 편의 CP(책임프로듀서)였던 조능희 PD다.

MBC노조 11대 집행부 취임식 다음날, 상암MBC 미디어센터에 위치한 노조 사무실에서 조능희 위원장을 만났다. ‘어려운 시기에 어떻게 출마를 결심하게 되었느냐’고 아마 수십 번은 더 들었을 그 질문에 그는 한결같은 얘기를 했다. 그래도 변함없는 ‘MBC노조에 대한 믿음’을 말했다.

“MBC노조는 좋은 방송을 하자는 소명과 가치를 공유하는 사람들”

조능희 새 위원장은 지난해 10월 인사에서 방송 송출을 담당하는 편성국 MD로 발령났다. 노조위원장에 출마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채 그저 MBC 프로그램을 하루종일 보는 생활의 지루한 반복이었다. 후보가 나오지 않아 곤혹을 치르고 있다는 정황을 그는 나중에 들어서 알게 됐다.

가족들은 반기지 않았다. <PD수첩> ‘광우병’ 편의 고생은 그만의 몫이 아닌 가족이 짊어져야 했던 짐이기도 했다. 조능희 위원장은 검찰에 체포돼 조사를 받았었고, 그 소송은 대법원까지 이어졌다. 끝내,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거듭된 징계를 받는 시련은 계속됐다. 노모는 “그런 것(노조위원장)을 왜 하느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조능희 위원장은 “MBC 사람들이 절 많이 좋아한다는 뜻이에요. 절 좋아하니까 이런 걸 하라는 거죠”라고 말했다.

▲ 16일 오후 6시 30분, 서울 마포구 상암MBC 미디어센터 MBC홀에서 <전국언론노동조합 MBC본부 10대-11대 집행부 이·취임식>이 열렸다. 사진은 MBC노조 깃발을 받아든 조능희 신임 위원장의 모습 (사진=미디어스)

조능희 위원장은 “과연 잘할 수 있을까” 되묻고 걱정하며 고민했다. 오래지 않았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 자리"였고, 해직자들은 집앞까지 찾아왔다. 조 위원장은 “인연이 닿았다”고 담담히 말했다.

조능희 위원장은 출마의 변에서 “시청자에게 사랑받는 방송,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의 버팀목이 되는 방송, 불의를 저지른 자들이 두려워하는 방송, 그리하여 우리 자식들과 부모님과 친지들이 더 이상 걱정하지 않는 MBC 문화방송을 우리는 다시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약속이었고, 다짐이었고, 바램이었다. 근거는 하나다. 조합원들에 대한 깊은 신뢰 뿐이다. 그는 어찌해 여전히 '그들'에게서 ‘희망’을 보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170일 파업을 했잖아요. 부당해고, 부당징계, 전보도 하고. 이런 인사상의 불이익은 조합원들이 늘상 당하고 다 알고 있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취임사에서도 말했듯 삶아먹지 않는 씨앗(▷ 관련기사 : <“공정방송·방송독립 열매, 국민과 함께 수확할 날 올 것”>)을 우리는 버리지 않습니다. 지금 배고프고 힘드니 그걸 삶아먹으면 편할 것 같은데 조합원들은 그렇지 않겠다는 거예요. 회사는 이런 조합이 얼마나 밉겠어요. 조합은 권력과 사측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지만 공정방송을 향한 열망이라는 창립정신은 계속 간직하고 있죠. 그건 각종 손해를 감수하고도 지켜야 되는 거니까요. 그걸 버리면 조합이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시키는 대로 살면 맘 편하고 수당 더 받고 임원 달고 몸은 편하겠지만 우리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는 겁니다. 이 정신은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습니다”

조능희 위원장은 “이 세상 사는 데 가장 중요한 걸 의식주라고 하지만 그것보다 더 높은 가치가 사랑이고, 그보다 더 높은 가치가 ‘소명’이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는 “MBC노조는 좋은 방송을 하자는 소명, 신념, 가치를 공유하는 사람들이다. 과거 밖에만 나가면 기자들은 돌을 맞았고 심지어는 중계차에 카메라만 매달고 도망치는 일도 있었다. 그런 걸 견디지 못하겠다고 만든 게 노조다. 그걸 잊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조합원들도 ‘MBC뉴스 안 본다, 욕만 먹는다’ 할 때 가슴 아파”

▲ 전국언론노동조합 MBC본부 조능희 신임 위원장 (사진=미디어스)
조능희 위원장은 16일 취임식에서 “1987년 설립된 MBC노조의 원칙은 ‘공정방송과 방송독립을 통한 방송민주화의 완성’이고 이 원칙은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고 말했다. 신임 집행부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하는 영상에서 한 조합원은 “가장 노동조합다운 노동조합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만만치 않다. ‘공정방송’도 ‘방송독립’도 ‘방송민주화’도 당위의 선명함에 비해 지금 MBC에서 말하긴 겸연쩍은 과제들이다.

그 역시 말할 수 없이 아쉽다. 조능희 위원장이 꾸렸던 <PD수첩>은 빛나던 MBC의 간판 프로그램이었고, 저널리즘의 한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던 프로그램이었다. 그런 그에게 지금의 MBC가 마땅할리는 만무하다. MBC는 아니 <PD수첩>은 정권 전체와 사실을 다투던 프로그램이었다. 그가 열정을 바치던 MBC는 그런 언론이었다. 그 위상은 최근 출간된 이명박 대통령 자서전 <대통령의 시간>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MBC <PD수첩>이 ‘미국산 쇠고기, 과연 광우병에서 안전한가’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중략) 그 프로그램만 본다면 3억 미국인들과 우리 국민들은 식품이 아니라 독극물에 가까운 미국산 쇠고기를 먹는 셈이었다”
“공기업과 공영방송 개혁 논의가 가시화되면서 위기감을 느낀 임직원들에게 쇠고기 수입 허용 조치는 정부에 저항하는 일종의 기폭제 역할을 한 셈이었다”

조능희 PD는 “참 이명박다운, 이명박스러운 자서전이라고 본다. 반성이나 성찰과는 담 쌓으신 것 같다”고 꼬집었다. 하지만 그 이명박스러운 비꼬움을 통렬하게 비판할 무기가 MBC에는 이제 없다. <PD수첩>의 칼날은 예전 같지 않다. 시사교양 기능을 약화시키고자 하는 시도는 시사교양국을 시사제작국과 교양제작국으로 나누고, 지난해에는 아예 교양제작국을 없애는 지경에 이르렀다. <PD수첩>을 만들던 PD들은 비제작부서의 단골 멤버가 했다.

조능희 위원장은 “시사교양 보도에서 검증받은, 많은 성과를 낸 기자와 PD들이 다 현업에서 배제되어 있다. 그래놓고 국민에게 신뢰받는 방송을 할 순 없다. 신뢰도, 영향력이 현저히 떨어져 있지만 (경영진들은) 거기에 대해서 책임을 느끼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민영방송과 일부 종편보다 뉴스 신뢰도가 떨어지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걸 바라보는 조합원들의 심정이 어떻겠나”라는 반문은 그가 극복해야 할 현실의 높이이기도 하다.

조능희 위원장은 “안 들었으면 좋겠는데, 요새 ‘MBC 안 본다’는 소리를 굉장히 많이 듣는다”며 “지역에서, 서울에서 ‘우리도 안 본다’, ‘욕만 먹는다’ 이런 소리 듣는 게 제일 마음 아프다. ‘볼 만하다’, ‘열심히 본다’ 이런 소리가 나와야 되는데…”라고 말을 잇지 못했다. MBC가 추락하던 시절에도 MBC만 주구장창 봐야했던 'MBC맨'의 비애가 느껴졌다.

새로운 해직자 발생, 쫓겨난 투표소… 그럼에도 “잘 추슬러 보겠다”

170일 파업 이후 MBC 노사 관계는 쉼없이 극단으로 치달아 왔다. 11대 선거에서 노조의 투표소가 건물 밖으로 나간 건 단적으로 상황을 보여준다. MBC는 경영센터 로비에 투표소를 설치하려 하는 노조 요구를 ‘내방객에게 불편을 끼칠 수 있다’며 거부했다.

조능희 위원장은 “그 장면을 두고 (현재 노사 관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거기에 대해선 부인할 생각은 없다”면서도 “이번 집행부는 아직 회사와 만나지 않았다. 곧 노사협의회를 열어 만나게 될 텐데 차차 대화를 시작할 예정”이라고만 밝혔다.

곧 사측과 마주 앉을 그가 풀어야 할 첫번째 과제는 남발한 소송의 수습이다. 오는 4월 1일 2심이 선고되는 170일 파업 해고무효소송을 비롯해 수많은 소송이 그와 MBC노조를 기다리고 있다. 안광한 체제에서 발생한 해직자 문제도 난제 중 하나다. 지난 1월 21일 <예능국 이야기>라는 웹툰을 SNS에 게시해 ‘회사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해고 된 권성민PD 문제는 그의 첫번째 시험대가 될 것이다.

좀처럼 ‘회복’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MBC를 두고 "MBC는 이제 망했다"는 극언부터 “누가 와도 MBC를 예전으로 돌려놓지 못할 것 같다”, “왜 MBC노조는 가만히 있느냐” 등의 비관과 냉소가 팽배하다. 그는 그럼에도 기꺼이 위원장을 맡았고, 압도적 지지로 자리에 올랐다. 어쩌면 '독이 든 성배'일지도 모를 잔을 들고 그는 출발한다. 그와 함께 빛나던 MBC를 일궜던 이들은 드러나지 않거나 드러내지 못하고 있을 뿐, 아직 MBC에 있다. 누군가 그랬다. 독이 든 성배도 성배는 성배라고. 부디, 그가 2년의 임기 끝에서는 '마봉춘'이란 정겨운 칭호가 어색하지 않은 MBC를 다시 재건하고 '축배'를 들 수 있기를 기원해본다.

▲ 2012년 김재철 퇴진 및 공정방송 쟁취를 내걸고 170일 파업을 진행할 당시 MBC노조의 모습 (사진=미디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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