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마흔 해를 살았으니 이만 하면 아쉬울 것이 없을 줄 알았는데 욕심인가?

13년 전 어머니는 시한부 삶을 선고받았다. 갑상선에 악성종양이 생겨 수술이 불가능하고 길어야 2년을 넘기지 못할 거라는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여서.

친할머니도 외할머니도 기억 못하는 나는 내 아이들이 할머니를 기억할 나이가 될 때까지만 살아계시게 해달라고 그날 화장지를 반통이나 쓰면서 울고 또 울면서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빌고 또 빌었다. 그 후로 큰아이가 열세 살이 될 때까지 사셨으니 분명 누군가는 내 기도를 현실로 이뤄준 셈이다.

부모가 된 지금 자식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생기는 기쁨이 많음을 아는데도 왜 그렇게 아프게 해 드린 기억들만 떠오르는지…. 지금이야 아이들이 필수코스로 다니지만 그때만 해도 선택받은 아이들이나 다니던 피아노 학원을 다니고 싶다고 끼니 걱정하시는 어머니를 얼마나 들볶았던지 그때 생각만 하면 지금도 목이 멘다. 어린 딸이 하도 성화를 하니 학원까지 가서 원비를 알아보시고는 땅이 꺼지게 한 숨 쉰 일이 생각난다. 그 일로 언니 오빠들한테는 무지하게 구박을 받았다

산에서 산다고 얼마나 걱정이 되셨으면 그 몸으로 우리 집에 오셔서 며칠을 머물다 가신 적이 있다. 아궁이 불 피우고 난로로 난방하는 일을 당신도 안하셨는데 기가 막히셨나 보다. 산을 내려가면서부터 친정집에 도착하실 때까지 버스에서 눈도 마주치지 않으시고 말씀도 없으셨다. 딸자식 가슴에 상처가 될까봐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어머니의 깊은 배려였다.

시동생 시누이 많은 집안 맏며느리로 여섯 자식 건사하는 어미로 살아오시면서 쌀에 한이 맺혔는지 우리 집 오셔서 쌀자루가 쌓여 있어 그래도 마음이 놓인다는 얘기를 듣고 가슴으로 눈물이 났다.

좋아하는 음식을 다 사드리고 싶은 그때부터 어머니는 아무것이나 다 드실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니었다. 싱싱한 초밥도 매콤한 비빔냉면도 속이 꽉 찬 김치만두도 고추 지짐도 맛난 갈비도 더 이상 어머니를 유혹할 수 있는 메뉴가 아니었다.

몸이 성치 않다는 걸 알면서도 예전에 내가 알고 있던 어머니 모습으로만 어머니를 기억하고 싶어 몸부림을 쳤다. 돌아가시기 보름 전부터는 대소변을 받아 내야하는 상황까지 오고야 말았다. 깔끔하고 자식들에게도 폐 끼치거나 짐이 되기 싫어하셨던 내 어머니가 아닌 것에 나는 경악했다. 짐짓 말로는 오래 고생하지 마시고 편하게 가시라고 했지만 어머니의 그 모습을 인정하기 싫은 이중적인 내가 거기 있을 뿐이었다. 일 년도 아니고 한 달도 아니고 겨우 보름이었는데….

이래서 부모님은 가슴에 묻는 건가 보다. 이 불효를 가슴에 묻는다고 풀어질까? 왜 가슴에 묻었는데 더 큰 구멍으로 찬바람만 휭 불어대는지, 아픈 모습일지라도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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