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는 멈춰섰다. 안 그래도 좁은 비상계단은 전투경찰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고 있었다. 지나가다 얼핏 보면 마치 쿠데타라도 일어나서 누군가 점령한 국가기관을 공권력이 보호하고 있는 듯하다. 혼자만의 지나친 느낌인 걸까? 아마도 건물 외부에 새겨진 ‘국가인권위’라는 간판 때문에 그런 착시 현상이 일어난 듯하다. 지금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인권’이라는 단어가 찬밥 신세였던 시절이 그리 먼 옛날이 아니다. 그 시절에는 ‘국가’는 ‘인권’이라는 단어보다는 ‘침해’라는 단어가 퍽이나 잘 어울렸다. 물론 지금도 국가가 침해하는 인권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국가’와 ‘인권’이 같은 단어 안에 함께 쓰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세상은 된 것이다.

▲ 경찰이 국가인권위원회 건물 정문을 봉쇄하고 있다ⓒ참세상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것이 세상사지만, 인권위 또한 탄생에서부터 지금까지 순탄한 길을 걸어오지는 않았다. 대통령이 후보시절 공약으로까지 내세웠던 국가인권기구는, 바로 그 국가권력에 대해서 비판해 마지않는 인권단체들의 노숙농성으로 세워지게 되었다. 이후 사형제 폐지, 국가보안법 폐지, 양심적 병역거부 인정과 대체복무제도 도입 등 중요한 사회이슈들에서 목소리를 내면서 보수세력으로부터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진보단체들이나 인권단체들도 인권위에 대한 비판을 에두르지 않았다. 인권위 위원장이 선출될 때마다 밀실인선을 비판했었다. 개인적으로는 수감시절 국가인권위의 효용성(?)을 절감할 수 있었다. 인권노이로제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일선의 교도관들과 공무원들이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것은 인권위의 존재 때문이다. 그들이 진심으로 인권에 대한 감수성을 키운 것이 아니라 귀찮은 일에 얽히기 싫어서였다고 하더라도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는 상당한 도움이 된 것이 사실이다.

국가인권위원회 위기의 계절은 올 초에 도래했다. 대운하에서부터 영어몰입교육까지 세상을 깜짝 깜짝 놀래키는 재주를 가진 이명박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국가인권위원회를 대통령 직속기구로 전환하겠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아무래도 보수적인 이명박 정부로서는 어설퍼도 인권을 이야기해야 하는 국가인권위원회가 귀찮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국가인권위윈회가 그나마 인권의 편에 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독립된 국가기구여야만 한다고 생각한 인권단체들은 또다시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한겨울 칼바람 앞에 맨살을 드러냈다. 8년 전 국가인권위원회 설립을 위해 노숙농성을 했던 바로 그 계절 바로 그 자리에서. 이 비극적인 역사의 반복보다 더 서글픈 것은 국가인권위 탄생에서부터 내재되어 있는 아이러니였다. 국가권력에 저항하는 인권단체가 국가기구를 위해서 노숙을 해야 하는 어색함. 또한 국가가 인권의 적극적인 행위자가 되는 것이 근본적으로 옳은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들. 그런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갈피를 잡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국가인권위원회를 무력화시키려는 힘이 너무 컸던 것이다.

2008년 10월, 국가인권위원회에 경찰이 나타났다. 그보다 앞서 청와대는 김양원 목사를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위원으로 임명했다. 세상에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고 하지만, 털어도 털어도 함박눈 같은 먼지가 계속 나는 사람은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것도 가장 높은 수준의 도덕성과 인권감수성을 요구받는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위원이라면 말이다. 장애인의 결혼을 불임을 전제로 허락했을 뿐 아니라 임신한 장애인 부부에게 낙태를 종용한, 시설장애인의 생활을 열악하게 만들어 생긴 돈으로 자기 배를 불린 인물이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위원에 어울린다면, 조시 부시 대통령에게 노벨평화상을 줘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김양원이 처음은 아니었다. 한 달 전 최윤희 한나라당 윤리위원의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위원 임명에서도 많은 인권단체들은 반대의 목소리를 냈었다.

물론 김양원의 임명은 국가인권위회의 책임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문제적인 인사가 인권위원으로 임명되고 나서 한 달이 넘도록 ‘책임 없음’만 늘어놓는 국가인권위원회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또한 이런 일들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인권위를 탄생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인권위의 독립성을 지켜내기 위해서 모였던 인권단체들이 김양원 목사의 인권위원 임명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고 인권위원 인사 검증시스템 확보를 위해서 또 다시 모였던 것이었다.

27일 국가인권위 전원위원회가 있는 13층 앞에서 김양원 목사의 인권위원 임명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고 농성에 들어가려 했던 인권단체 활동가들 앞에 놓인 것은 전투경찰이었다. 촛불집회에서 과잉진압으로 시민들의 인권을 침해해서 인권위가 행정안전부 장관에게 경고하라고 권고했던 바로 그 경찰! 인권위의 판단이 맞다면, 인권위는 스스로가 인권침해를 했던 경찰에게 자신의 안위를 지켜달라고 요청한 것이 되는 셈이다. 물론 경찰의 모든 활동을 인권침해로 일반화하면 안 되지만, 인권위 사무실로 올라가는 6층 계단을 위협적으로 막아서고 있는 경찰들을 보면서 인권위의 촛불진압 인권침해 유감 표명이 뒤틀린 퍼즐처럼 오버랩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국가인권위를 만들기 위해서,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서 애를 썼던 인권활동가들이 느꼈을 상실감은 물론 매우 크겠지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도 국가인권위원회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세력들의 폭풍과도 같은 공격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자폭과도 같은 어리석은 행동을 한 인권위원회가 앞으로 과연 거대한 권력과 폭력에 맞서 시민들과 약자의 인권을 옹호할 수 있을지가 걱정이다. 국가가 인권의 적극적인 행위자가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물론 유효하지만 또한 심각한 인권침해에 놓여있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인권위의 존재가치는 부정할 수 없다.

인권위원회가 할 일은 장애인 활동가들의 농성을 두려워해서 엘리베이터를 세워버리는 일도, 인권활동가들의 액션을 막기 위해 경찰에 시설물보호요청을 하는 것도 아니다. 인권위가 해야 하는 일은 김양원 목사가 저지른 반인권적인 행위들이 이 세상에 발붙이지 못하게 장애인들의 편이 되어 주는 것이고, 정당한 목소리를 내는 시민들에게 과도한 공권력을 행사하는 경찰을 감시하는 일이다. 스스로의 목을 졸라버린 국가인권위윈회가 그 목을 움켜쥔 자신의 손에 힘을 더 줘서 결국엔 반신불수가 되거나 숨이 넘어가는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 지금이라도 손을 풀면 몇 번 그냥 켁켁 거리고 말 일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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