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보다 기계가 더 인간적’이라는 명제는 <터미네이터 2>에서 존 코너와 사라 코너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자기 몸을 던지는 아놀드 슈왈츠네거의 터미네이터를 통해 본 적이 있다. 폐기하기 직전의 고물 로봇 스카우트에 인공지능을 이식하여 제작한 ‘채피’ 역시 터미네이터와 다름없다. 채피를 교육시키는 건 스카우트의 제작자 디온의 몫이 아니다. 갱스터 닌자와 아메리카, 욜란디의 몫이다.

채피에게 사람의 물건을 빼앗는 강도질을 교육시키려고 했지만 어린아이 같은 인공지능 채피에게 갱스터는 서서히 감정이입하기 시작한다. 이는 갱스터인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로봇 채피가 아니었음 불가능한 시추에이션이면서, 동시에 인간적인 기계에게 비인간적인 갱스터가 서서히 인간성을 되찾기 시작한다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아니, 욜란디의 모성애를 채피가 본받고, 채피의 인간미를 욜란디의 파트너 닌자가 본받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채피의 인간미는 채피만의 고유한 인간미는 아니다. 채피의 어머니에 해당하는 욜란디로부터 인간의 모성애를 습득함으로 채피는 욜란디를 ‘엄마’라고 부른다.

▲ 영화 ‘채피’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정언 명령은 채피의 아버지 격에 해당하는 제작자 디온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기에 정신적인 엄마 욜란디, 정신적인 아빠 디온에게 물려받은 채피의 인간미에 닌자가 영향을 받는다고 표현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정신적인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기계의 인간미가 다시 인간에게 영향을 끼치는 순환 구조가 욜란디와 디온-채피-닌자를 통해 발생하는 거다. 로봇인 기계에게 인간미란 영향을 받는다니, 다소 아이러니하다.

채피는 기계이면서도 불사의 존재가 아니다. 채피의 전신(前身)인 스카우트 22호는 가슴에 로켓탄을 정통으로 맞았다. 배터리가 로봇에 눌어붙는 바람에, 배터리가 다 되면 보통의 스카우트는 배터리만 교체하면 되지만 채피는 배터리가 방전되면 소멸될 수밖에 없는 유한한 몸뚱아리를 가졌다. ‘기계=죽지 않는 몸’이라는 공식을 채피는 비켜간다.

▲ 영화 ‘채피’
인간보다 짧은 수명의 로봇이라는 채피의 육체적인 한계는, 진시황의 욕망을 기계가 추구하는 욕망으로 이어지게 만든다. 5일 후면 배터리가 방전되어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기보다는 수명을 연장하는 쪽으로 생각을 발전하는 채피의 욕망은, 유한한 자신의 육체를 불로불사의 존재로 만들 수 있을까를 골몰했던 진시황의 욕망과 궤를 같이 한다. 로봇은 불사의 몸을 가진다는 기존의 고정관념을, 채피는 유한한 기계의 몸으로 살짝 비틀고는 불사를 추구하는 로봇 서사로 변형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채피의 이야기는 <디스트릭트 9>만큼 매끄럽지 못하다는 단점을 가진다. 닌자는 채피를 빨리 교육시켜 갱스터 로봇으로 만들어야 은행을 털 수 있다. 그럼에도 닌자는 채피를 교육시킨답시고 다른 지역의 갱스터 무리에 채피를 떨어뜨려 놓고는 갱스터 무리에게 채피가 집단 린치당하도록 만든다. 이건 교육을 빙자한 학대와 마찬가지이다.

▲ 영화 ‘채피’
채피가 자신을 갱스터 무리에게 내버려둔 닌자를 다시 정신적인 아버지로 받아들이는 것 역시 납득하기 어렵다. 디온을 시기하는 빈센트(휴 잭맨)가 디온이 개발한 스카우트를 물 먹이기 위해 벌이는 계략을 보더라도 서사의 구멍을 찾을 수 있다. 요즘 보편화한 CCTV로 얼마든지 탄로 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빈센트는 연구실 내 CCTV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디온을 물 먹인다.

이런 여러 엉성한 이음새로 인해 영화 <채피>에 관객이 감정이입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디스트릭트 9>으로 전 세계 영화 팬들의 주목을 받은 닐 블롬캠프 감독은 <엘리시움>에 이어 <채피>를 통해 연속으로 소포모어 징크스에 시달리게 되었다. 닐 블롬캠프가 부디 나이트 샤말란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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