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아리 신입생 앤드류는 플렛처 교수의 눈에 띄어 플렛처 교수가 지도하는 밴드에 합류하게 된다. 하지만 플렛처 교수에게 발탁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플렛처의 밴드에 합류했다는 기쁨은 잠시 뿐 욕 세례는 기본이고, 귀싸대기를 날리는 인격적인 모욕에 심지어는 플렛처 교수가 던진 의자가 앤드류를 향해 공중부양까지 해댄다. 앤드류는 사부를 만났지만 기본기를 배우기도 전에 100%의 완벽을 추구해야 살아남는 오케스트라의 정글에 내던져진 천둥벌거숭이가 된다.

이 지점까지만 본다면 앤드류와 플렛처의 관계는 완벽을 구현하기까지 제자를 들들 볶아대는 괴팍한 스승과, 그의 괴팍함을 밑거름 삼아 일취월장하는 사제 관계로 읽을 수 있는 음악 영화다. 하지만 대개의 스승은 제자의 인격을 대놓고 무시하지 않는다. 질책은 있을지언정 기본기에 충실하라는 가르침은 잊지 않고 전수한다. 하지만 플렛처는 여느 스승과는 다르다. 기본을 가르쳐주기보다는 스스로 깨우치라고 닦달하고 다그친다. A에서 B로 나아가기도 전에 단숨에 Z까지 다다르라고 제자들을 밀어붙인다.

▲ 영화 '위플래쉬'
플렛처의 이런 교수법은, 제자에게 완벽을 고양하는 스승의 모습으로 읽힌다기보다는 에리히 프롬이 <인간의 마음>에서 일컬은 ‘시간’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시간은 타임이 아니다. 죽은 사람을 육체적으로 탐닉하는 괴이한 성교를 뜻한다. 그렇다고 에리히 프롬은 이 저서에서 진짜 물리적인 시간을 언급하지는 않는다. 정신적인 시간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에리히 프롬이 언급한 정신적인 시간은 무엇일까. 에리히 프롬은 <인간의 마음>을 통해 타인을 지배하고 싶어 하는 욕망을 시간에 비유할 정도로 끔찍한 욕망으로 간주한다. 다시 영화 속 플렛처의 교수법을 살펴보자. 플렛처의 오케스트라 밴드 가운데서 플렛처에게 배우는 밴드 연주자는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다.

플렛처의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밴드의 멤버로 종사하는 ‘수단’이 될 뿐, 교수와 학습자라는 인격적인 공동체는 형성되지 않는다. 영화에서 플렛처의 변명이 나오기는 한다. 플렛처는 앤드류에게 한계를 뛰어넘게 하고 싶어서 다그친다는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플렛처의 교수 방법을 견디지 못해 의예과로 아예 전공을 바꾸거나, 심지어는 자살하는 제자까지 생긴다면 이는 제자에게 한계를 극복하라고 하는 극기의 가르침을 제시한 것이 아니다.

▲ 영화 '위플래쉬'
제자의 인격을 철저하게 지배하고 다스리고자 한 플렛처의 지배욕이 얼마나 극에 달했는가를 보여준다. 플렛처의 휘하에 있는 밴드는 우승을 하면 우승을 하지 준우승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플렛처의 완벽주의는, 제자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휘두르는, 에리히 프롬이 언급한 시간이라는 지배욕으로 읽도록 만들기에 충분하다.

제자를 죽음으로까지 밀어붙이는 플렛처의 끔찍한 지배욕은 햇병아리 앤드류로 하여금 드럼의 장인을 꿈꾸도록 만든다. 지독한 스승이 지휘하는 밴드라는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신입생이라는 면죄부도 통하지 않는다. 마음에 두었던 예쁜 알바생을 여자친구로 만드는 데 성공하지만, 이내 여자친구마저 성공의 장애물로 생각하고 일방적인 이별을 선언하는 데선 앤드류의 이기심을 넘어서서 플렛처의 지독함에 경도된 앤드류의 변형된 자아를 발견할 수 있다.

괴물 같은 스승 플렛처를 극복하려다가 앤드류 스스로가 경쟁 기계가 되고 말았기에 여자친구마저 스스로 차버린 것이다. 완벽한 연주자가 되기 위해서는 데이트할 시간조차 낼 수 없다고 간주하는, 여자친구와의 관계보다 완벽한 연주자가 되고 싶어 하는 업적 지상주의에 경도된 앤드류의 변형 말이다. 플렛처가 무한 경쟁을 강요하는 가운데서 에리히 프롬이 언급한 ‘시간’, 지독한 지배욕이 어떻게 제자 앤드류에게 파고듦으로 말미암아 성취주의자로 변모하게 만드는가를 영화 <위플래쉬>는 보여준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