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요즘 모습은 여전히 표를 얻기 위한 정치인 같습니다. 한쪽의 불만을 끄집어내면서 다른 한쪽을 깎아내리는 식이죠. 청년실업을 심각하게 걱정하면서도 “청년들이 일자리를 위해 규제완화를 요구해주면 좋겠다”하고, 소득주도로 성장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정규직에 대한 과보호”를 이야기를 합니다. 뜬금없이 ‘중규직’과 ‘해고요건 완화’ 같은 것으로 분위기를 떠보고, ‘최저임금 인상’으로 달래기도 합니다.

‘당근과 채찍’ 전략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발언의 수위나 빈도를 보면 사실 종잡을 수 없는 모습입니다. 그래서일까요. 풍선처럼 띄우는 발언 속에 역효과만 뚜렷해 보입니다. 대학가에는 부총리에 대한 ‘협박편지’가 붙기도 했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임금 인상”을 얘기했다가 삼성을 필두로 한 재계가 따라주지 않자, 오히려 으름장을 놔 머쓱해지기도 했습니다.

▲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9일 서울 관악구 신림동 강남순환도시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현장을 방문해 관계자들과 간담회를 마치고 터널 공사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연합뉴스

가계부채 폭탄을 연착륙시키고 한국경제의 성장을 위해 불철주야 일한다고 생각하실텐데 이런 대접, 참 서운하실 겁니다. 모두 알다시피 최 부총리는 박근혜 정부 초기부터 인사까지 쥐고 흔드는 권력의 핵이었습니다. 경제부총리가 된 뒤에는 ‘초이노믹스’로 이름을 날렸지만 핵심은 ‘부동산 경기 부양’이었고, 이마저도 “폭탄 돌리기”라는 비판이 많습니다. 지난 정권에서도 경제 부처 장관을 지낸 부총리께서 도대체 언제부터 입만 열면 비난을 듣는 ‘그저 그런 사람’이 됐을까요.

“진의가 잘 전달되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비판이 세지면 결국 자업자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정치인의 태도이겠지만 일이 자꾸 반복되다보니 자질을 의심하게 됩니다. 최근에는 디플레이션을 우려하며 ‘한국판 뉴딜’을 꺼내들었습니다. 노트북 앞에 앉아 연합뉴스 기사 제목 <정부 “경기회복 위해 뭐든 한다”…한국판 뉴딜정책까지>를 보고 솔직히 기대했습니다. ‘드디어 반성문을 썼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맙소사…. ‘뉴딜’은 “사회기반시설(인프라) 건설 등 공공사업을 통해 일자리를 늘리고 투자를 유도하는 것”인데 ‘한국판 뉴딜’은 “정부가 민간자본에게 인프라 사업을 유도하고 리스크를 보전해주는 것”입니다. 망자가 된 케인즈와 루즈벨트가 웃을 일입니다. 오죽하면 경제신문조차 <급한 최경환, 이번엔 ‘한국판 뉴딜’…숙성없는 ‘이것저것노믹스’ 될까> 같은 제목을 뽑아낼까요. 마지막 잎새까지 떨어져버린 느낌입니다.

정부 재정이 부족한 상황에서 디플레이션을 사전에 방어하고 경기를 살리려면 민간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런데 민간자본과 수익공유형 사업을 하는 것을 ‘뉴딜’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왜곡도 과장도 아닌 그냥 ‘거짓말’입니다. 위스콘신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까지 받은 부총리께서 그 누구보다 자신이 개념과 말을 잘못 사용했다는 것을 잘 알 겁니다.

뉴딜이 뭡니까. 부총리가 생각나는 대로 말했던 것처럼 저도 기억하는 대로만, 배운대로만 뱉어 보겠습니다. 루즈벨트는 1930년대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국가재정으로 대규모 공공부문 사업을 벌여 고용을 확대하려 했습니다. 고용을 늘면 유효수요가 생기고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최근 회자하는 ‘소득주도성장론’과 맞닿은 부분이 있기도 합니다. 자, 볼까요. 우선 공공부문 확대라는 점에서 최경환 부총리의 ‘한국형 뉴딜’과 다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박근혜와 루즈벨트, 최경환과 케인즈, 뉴딜과 한국형 뉴딜의 가장 핵심적인 차이는 ‘금리생활자의 안락사’로 표현되는 금융억압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배당을 확대하라고 부채질하는 부총리와 정반대입니다. 금융억압이야말로 뉴딜의 핵심입니다. 금융자본에 대한 국가적, 사회적 통제 없는 뉴딜은 불가능한 정책입니다. 대학에서 교양 수업 하나로도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경제학 박사면서 한 나라의 경제정책을 디자인하는 부총리가 이를 알고도 허위사실을 유포했다면 이건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왜 뉴딜을 이야기했는지 그 심정은 물론 이해합니다. 프랑스의 경제학자 제라르 뒤메닐과 도미니크 레비는 <신자유주의의 위기>(2011년)에서 “많은 점에서 2009년 미국의 경제 상황은 1930년대 초와 유사하다”며 “산출량의 하락을 고려한다면, 1929년과 2008년의 사이는 거의 80주년이라 할 만큼 유사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위기를 야기한 금융 부문에 대한 처방에만 집중해 보아도, 1930-33년과 2007년은 여러 면에서 유사하다”고 설명합니다.

부총리가 진단하는 경제 상황은 뉴딜 시기와 유사하나 해법은 정반대입니다. 뒤메닐과 레비에 따르면, 뉴딜의 시작은 ‘긴급은행법’과 ‘글래스-스티걸법’ 등 투기를 제한하고 금융을 안정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담보 대출자에 대한 지원을 법제화했고, 1935년에는 ‘부자 짜내기’ 세금으로 불리는 ‘세입법’까지 나왔습니다. 다시 한 번 물어보고 싶습니다. 한국형 뉴딜은 진짜 뉴딜인 것인지요. 아니면 뉴딜의 긍정적 이미지만 갖다 쓴 것인지요.

뉴딜에 대해 진도를 더 빼볼까요. 프랑스의 경제학자 쉬잔 드 브뤼노프는 <국가와 자본>(1976년)에서 “(케인즈주의의) 핵심적 문제는 어떻게 해서는 거래의 순환을 복원시키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경제학자 폴 스위지가 <자본주의 발전의 이론>(1942년)에서 묘사한 것처럼 법인세 소득세 상속세가 적극적으로 적용되고 사회보장 지급 규모가 커지지 않는 상황에서의 국가의 이전지출은 “소비자들의 호주머니에서 구매력을 빼내어 축적을 하는 사람들의 호주머니에 집어넣어주게 된다는 데 의문의 여지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부총리의 ‘한국형 뉴딜’은 ‘재벌 밀어주기’가 될 겁니다. 미국에서 뉴딜 효과가 자리를 잡기까지 15년이나 걸렸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선거 준비 기간을 제외하면 사실상 1년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책임질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부총리의 예상대로 되지는 않을 겁니다. ‘수첩인사’ 박근혜 정부는 당신을 ‘반영구적’으로 모실 겁니다. 다음 정권에서라도 초이노믹스와 한국형 뉴딜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아마도 최경환 부총리님일 겁니다. 그러니 제발,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말씀하시고 움직이십시오.

다시 한 번 알려드립니다. 1930년대와 1940년대 ‘온건 자본주의’의 특징은 이렇습니다. “민간기업들이 투자, 산출 및 가격을 결정하는 시장이 존재하지만, 국가도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금융 부문은 규제된다. 자유무역과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은 극도로 제한되었다. 거시 경제에 대한 통제는 중앙기관의 수중에 있다. 노동의 조직화권리가 어느 정도는 보장된다. 임금 집중, 더 일반적으로는 상위 소득 계층으로의 소득의 집중은 축소되었다. 배당으로 지불되는 이윤 부분이 제한되고 증권시장은 완만하게 성장한다. 일정 수준의 복지가 보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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