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파 방송의 위기는 새삼스런 얘기가 아니다. 연일 시청률 기록을 갱신하고 있는 tvN <삼시세끼-어촌편>의 선전은 이제 일회성 시청률 기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예 지상파의 한 축이 무너진 상징적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상파 회의실 곳곳에 ‘탈환, 금요일! 쟁취, 시청률!’의 구호가 붙어 있다.

그런데, 잘 안 된다. MBC가 의도인 듯 아닌 듯 의도처럼 논란을 일으키며 호기롭게 편성한 <나는 가수다 시즌3>의 고전은 단적이다. 애써 화제성을 ‘유도’하고, 투여할 수 있는 물량을 최대치로 ‘밀어’넣어도 이제 지상파 프로그램의 성공 확률은 계측되지 않는 수준이다. 지상파에서 방송중인 무수한 드라마들이 출연료만 회당 수 천 만원에 달하는 A급 배우들과 작가를 배치하고도 고만고만한 성적표를 쥐고 있는 건 그야말로 어제 오늘 일이 아니고, 그나마 저비용 고효율을 낸다는 드라마들은 죄다 ‘막장’ 코드를 겹겹이 씌워 꾸역꾸역 끌어 가는 수준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 한때, 우아하기가 하늘을 찌르고 고상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럽던 시절의 지상파는 이제 없다. 소문 난 잔치 먹을 것 없다는데 전체 언론과 척을 지며 광고 총량제라도 따내려고 비분을 삼키고, 내친 김에 중간 광고도 어떻게 안 될까 힐끔힐끔 정부 눈치를 살피는 1/N 방송 사업자가 된 지상파는 처지는 ‘어쩌다 이렇게까지 됐나’ 싶을 정도로 종종 딱한 지경이다. 한때 ‘공공성’을 명분으로, 압도적 콘텐츠를 ‘화력’으로, 넘볼 수 없는 이슈 ‘주도력’으로 세상을 호령하던 시절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이다.

지상파의 몰락은 여러 측면의 사회문화적 요인들이 겹쳐있는 문제겠지만, 어쨌든 권력과의 관계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예컨대, 한 지상파 고위 관계자는 이렇게 자조했다. “지지난 대선과 지난 대선에서 지상파 뉴스들이 그 사회적 비난을 감수하며 최선을 다해 복무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얻어낸 것이 과연 무엇인지 모르겠다.” 지난 정부에선 모든 정책적 특혜를 종편에 몰아주더니, 이번 정부는 유료 방송 사업자들이 과실을 따먹고 있단 얘기였다. 그러나 정작 그 두 정권을 만드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지상파 방송사들은 여전히 정부의 눈치를 보며, 사회적 위상의 추락을 감수하며, 좁아지는 입지에 고민하는 처지다.

그러나 지상파의 많은 문제들이 결국, 권력과의 거리두기에 실패한 상황에 근원을 두고 있는 것이라면 역설적으로 권력과의 간격을 재설정하는 것으로 문제를 풀어갈 수 밖에 없다. 기술적 환경이 변화하고, 콘텐츠 시장의 흐름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지상파가 여기에 영 대처를 못할 정도의 실력을 갖고 있진 않다. 지상파 방송은 여전히 언론 먹이사슬의 최강자이며, 방송 시장의 지배자이다. 어긋난 지 꽤 되었지만, 자세만 고쳐 잡으면 언제든 다시 세상을 호령할 수 있는 그리고 호응 받을 수 있는 존재들이다.

▲ 10일 오후 10시 방송된 KBS1 <시사기획 창> '재벌과 세습'

그런 의미에서 10일 밤, 지상파 방송의 라인업은 주목할 만하다. 결국, 지상파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지상파 방송이 해야 할 역할은 무엇인지를 암시했다. 지상파라고 하는 시스템에서 시사교양 프로그램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가 우연적이지만 효과적으로 드러났다. 10일 밤 지상파 방송은 KBS1이 <시사기획 창>(10시)과 <생명최전선>(11시 40분)을 MBC가 <PD수첩>(11시 15분)을 편성했다.

가장 먼저 방송 된 <시사기획 창>은 재벌 3, 4세들이 기업을 경영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다뤘다. ‘삼성은 이건희의 것인가’로 요약할 수 있는 묵직한 화두를 통해, 한국 사회에서 으레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경제 권력의 세습 문제에 정면으로 질문을 던졌다. 과거, 어느 시절, 지상파 시사교양프로그램들을 비난하던 흔한 알리바이인 ‘편향성’을 벗어나고자 객관적 기준과 수치를 중심으로 풍부한 데이터의 맥락을 담고자 노력한 모습에선 어떤 '진화'도 느껴졌다. KBS 탐사보도팀은 앞서 불법과 탈세로 얼룩진 재벌가 회장들의 미국 땅 소유 실태를 추적한데 이어 이번에는 재벌들이 가장 아파하는 ‘세습’의 아킬레스건을 정확하고 심층적으로 파헤쳤다.

MBC <PD수첩> 역시 수준급이었다. 10일 방송된 ‘예산13조, 평창올림픽’ 편은 꼼꼼한 취재와 비판적 관점으로 사회를 움직이며 ‘저널리즘의 별’이란 평판을 얻었던 <PD수첩>의 명성을 확인할 수 있었던 수작이었다. 여전히 한국 사회에선 '신화'처럼 취급되는 올림픽이라고 하는 거대 이벤트가 한국 사회에서 전개되는 과정의 양상과 문제점을 파고들어, 상황의 부조리와 모순을 들춰내는 방식의 접근은 한때 그 대상과 주제가 무엇이건 성역 없이 비판하던 <PD수첩>의 전성기를 보는 듯했다. 물론, 새로운 ‘팩트’나 보다 ‘임팩트’있는 폭로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안 담론으로 존재하는 주장들의 씨줄과 날줄로 엮어 보는 이로 하여금 새로운 인식에 도달할 수 있게 구성하는 솜씨는 매끈했다. 일부의 주장으로 치부되던 ‘분산 개최’는 아마도 어제 방송을 기점으로 중요한 사회적 목소리로 승격될 것이다.

▲ 10일 오후 11시 15분 방송된 MBC

가장 늦게 방송된 KBS1 <생명 최전선> ‘무료 산부인과의 봄’ 편 역시 잔잔했지만 묵직한 고민을 던졌다. 서울시가 공공의료망 강화를 위해 지정한 안전망병원 5곳 중 한 곳인 은평구 도티기념병원의 일상을 다룬 이 다큐는 의료 행위의 본질적 기능이 무엇이고, 사회적 공공성이라는 장치가 어떻게 기능해야 마땅한 것인지를 매우 호소력 있게 설명해냈다. 의료 문제가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아니고, 어떤 사고에 대한 호들갑이나 민영화를 둘러싼 경제 담론의 영역도 아닌, 매일 반복되는 살아감의 문제이고 그 살아감에 차등과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뿐이라는 메시지는 심야 시간에 그야말로 울컥하기 충분했다. 착하면서 올바른, 잔잔하되 가볍지 않은 프로그램이었다.

▲ 10일 오후 11시 40분 방송된 KBS1 <생명 최전선> '무료 산부인과의 봄'

실로, 오랜 만에 10시부터 심야 시간까지 지상파 방송만 흠뻑 봤다. 생각해보니, 이리저리 채널을 옮기는 리모콘 재핑이 아닌 진득하게 TV를 본 것도 오랜만이었다. 지상파의 힘이란 결국 거기서 나오는 게 아닐까. 무수하게 쏟아지는 현란한 시각 신호 사이에서 정보가 될 수 있는, 교양이 될 수 있는, 위로가 될 수 있는 무언가를 내놓는 것. 그건 때로 저널리즘의 본령이라고 할 수 있는 권력의 부정함을 폭로하는 것이고, 또 어떤 때는 세상이 그래도 진화하고 있단 공통의 믿음에 복무하는 위로가 아닐까. 역시, 새삼스런 얘기는 아닐 것이다. 지상파의 영광이 재현되기 위해 필요한 구호는 ‘탈환! 시청률’도 경영진이 기회만 되면 떠드는 ‘한류 수출’도 아닌 바로 10일 밤과 같은 수준급 편성의 유지/확대가 아닐까. 모처럼, 수신료가 아깝지 않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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