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가 온통 엉망진창이 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그나마 잘 굴러가는 몇 안 되는 것이 부산국제영화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여기마저 이러면 이 나라가 대체 어떻게 되려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다이빙벨>에 대한 영화제의 정치적 이념성이 문제가 아니냐라고 하는데, 부산국제영화제마저 이념논쟁에 휘말리는 것에 대해 개탄해하시는 분들이 많다. 제 생각에는 이념적 색채를 가진 쪽은 영화제가 아니라 부산시 쪽이라고 생각한다. 프로그래머가 영화를 골라서 관객들에게 선보이는 것은 여태까지 해왔던 프로세스이다. 그 속에서 다양한 스펙트럼의 영화를 골라왔던 것인데, 그 중 하나의 영화만 골라 공세를 펼친다면 그것이야 말로 이념공세이다. 영화제에 정치성을 부여하는 쪽은 부산시다. 이번 논란은 표현의 자유 문제로 봐야 한다” <박찬욱 감독>

이용관 집행위원장 사퇴를 둘러싼 부산국제영화제 독립성 훼손에 대해 박찬욱 감독은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일”이라는 단호한 입장을 밝혔다. 10일 오후 5시에 개최된 <부산국제영화제 미래비전과 쇄신안 마련을 위한 공청회> 사회를 본 이동진 영화평론가는 ‘쇄신’이라는 단어와 관련해 “사전에서 찾아보니 그릇되거나 묵은 것을 새롭게 바꾼다는 뜻”이라며 “그렇다면 ‘그릇됐다’고 규정한 사람은 누구인가”라며 말문을 열었다. 그의 말대로 공청회 참가자들은 “쇄신의 대상은 영화제가 아니라 부산시”라는 일관된 입장을 내놨다. 특히, 박찬욱 감독은 부산국제영화제의 독립성이 훼손된다면 “영화제에 출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박찬욱 감독, “간섭 있는 영화제 누가 가겠나…독립성 훼손되면 안간다”

▲ 10일 오후 5시 프레스센터 20층에서 <부산국제영화제 미래비전과 쇄신안 마련을 위한 공청회>가 개최됐다ⓒ미디어스

박찬욱 감독은 “해외 많은 영화제들을 다녀봤지만 이렇게 간섭이 있는 영화제라면 누가 가려고 하겠냐”며 “문제가 되는 영화가 걸러지는 영화제에 걸리는 영화, 난 만들고 싶지 않다. 그런 영화제에 초청되고 추천되는 것 자체가 모욕”이라고 말했다. 이어, 박 감독은 ‘사소한 독립성 훼손’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약간의 훼손은 전체의 훼손과 같다. 성에 대해 보수적이거나 폭력, 동성애 영화는 안 된다는 시장이 온다면 그때에는 또 어떻게 할 것이냐. 이런 사태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공청회에 참석한 이용관 집행위원장은 ‘이 집행위원장이 공동집행위원장을 제안했다’는 보도에 대해 “사실무근”이라고 해명했다.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이 집행위원장은 “공동위원장을 제안했다는 말은 오해다. 제가 물러나겠다(자진사퇴)는 얘기였다”고 밝혔다.

이용관 집행위원장은 “서병수 부산시에 (내가) 물러나되, 영화인이 수긍할 수 있는 사람을 위원장으로 모셔오라는 내용이었다”며 “단, 저 하나 물러나는 것으로 끝내달라고 얘기했다. 그리고 독립성을 보장해 달라고 요구했다”고 말했다. 이 집행위원장은 “서 시장에게 ‘정치적 중립이란 정치인들이 지켜야지 우리가 지켜야할 건 아니다’라고 이야기했고, 서 시장이 그렇게 하겠다(독립성 유지 등)고 답했다”고 덧붙였다. 공동위원장 체제는 불가피하게 1년~1년 6개월가량의 시간을 설정한 것이었으나 부산시가 이를 그대로 언론에 흘렸다는 얘기다.

이용관 집행위원장의 이 같은 발언에 대해 박찬욱 감독은 “‘영화의 전당’ 등을 제 궤도에 올려놓는 일을 해야 할 마당에 물러난다는 것은 책임지는 것이 아니다”며 “이번에 독립성을 약속받는다고 하더라도 차기 시장이 ‘내가 한 말이 아니다’라고 해버리면 뭐가 되느냐. 지지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런 일에 집행위원장이 사퇴한다면 무슨 말이 나올지 뻔하다. ‘근대적이지 못한 아시아적 현상’이라는 평가가 나올 것”이라며 “왜 잘못은 정치가들이 하는데 부끄러워하는 건 나의 몫이어야 하는지 화가 난다”고 심경을 토로했다. 박 감독은 부산시의 ‘일자리 창출’ 주장에 대해 “부산국제영화제가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아시아 문화의 결집이라는 인식이 형성됐을 때, 장기적으로 가져올 이득을 봐야한다”며 “경제적 효과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꾸라”고 직격 했다.

박찬욱 감독은 “부산국제영화제에 있어 프로그래밍에 간섭하는 것만은 용인해선 안 된다”며 “만일, 그러한 결과가 된다면 저 혼자만이라도 다신 부산영화제가 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만든 영화 또한 출품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 같은 박 감독의 발언은 영화제의 독립성이 훼손될 경우, 영화인들을 중심으로 한 ‘보이콧’ 사태를 예견할 수 있게 했다.

“부산국제영화제 논란, 국제적 망신이고 정치적 테러…이젠 부산시가 밝혀야”

전주국제영화제를 오랫동안 담당해왔던 동국대학교 영화영상제작학과 민병록 교수는 이용관 집행위원장의 자진사퇴와 관련해 “좋은 아이디어가 아니다”라고 못 박았다. 그는 부산국제영화제 논란에 대해 “국제적 망신이고 정치적인 테러”라고 규정했다.

▲ 부산국제영화제 이용관 집행위원장이 '공동위원장 제안'에 대해 "사실무근"이라며 "물러나겠다는 의미였다"고 밝혔다ⓒ미디어스

민병록 교수는 “이런 선례를 남기면 다른 영화제에도 영향을 준다”며 “한국영화의 미래를 위해서는 부산시와 타협을 하면 안 된다. 예산을 받지 말라. 60억 안 받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이어, “이번에 타협하면 20년간 쌓아온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이다. 영화계 미래를 볼 때”라고 재차 강조했다.

명필름 심재명 대표는 “이용관 집행위원장은 책임을 이야기했는데 뜻이 다르다”며 “부산국제영화제 위원장 자리는 역사적 책임과 시대적인 공적책임도 져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플로어에 자리하고 있던 ‘표현의 자유 사수를 위한 범 영화인 대책위원회’ 최은화 공동위원장을 역시 발언권을 얻어 “이제 답을 해야 할 곳은 부산시”라며 “영화인들의 부산국제영화제의 독립성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에 대한 질문과 함께 공동집행위원장에 대한 공식적인 생각을 밝히라“고 촉구했다.

인디스토리 곽용수 대표는 “독립영화들이 성공하는데 있어서 본질적인 내용도 있지만 부산국제영화제의 영향도 있었다”며 “부산국제영화제가 가져야할 ‘미래비전’은 최근 영화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배급 논란도 컸던 만큼 배급 등 플랫폼에 대한 고민을 부산국제영화제가 진행해줬으면 한다”고 바람을 밝혔다. 인적쇄신이 아닌 다른 비전을 내놓으라는 따끔한 충고였다.

임권택 감독, “<다이빙벨>? 이북영화도 상영…개운치 않은 결과라면 영화제 망할 것”

영화계 거장 임권택 감독은 영화 <다이빙벨>로부터 촉발된 부산국제영화제 논란에 대해 “이북영화도 상영했는데, 이념의 문제라고 볼 수도 없는 세월호 관련 영화(가 무엇이 문제이냐)”라고 반문했다. 임 감독은 “영화의 소재 등에 제한을 두는 등 간섭을 하는 영화제에 누가 오느냐. 개운치 않은 결과를 내면 부산국제영화제는 망할 것”이라고 쓴 소리를 던졌다. 이어, “부산의 수치이고 나라의 수치이며 우리 영화인들 모두의 수치다. 이런 사태까지 온 게 개탄스럽다”고 덧붙였다.

한편, 공청회가 끝난 뒤 이용관 집행위원장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자진사퇴’ 논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겠다”며 “그렇지만 오늘 공청회에서도 느꼈듯, 부산국제영화제는 많은 영화인들과 관심을 가져주는 시민들로 인해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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