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라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병영 생활, 그런데 KBS 유머1번지 <동작그만>이 방영될 당시에는 지금처럼 국방의 의무를 다해야 하는 기간이 짧았던 것도 아니고, 군대 내 가혹 행위가 지금보다 심했던 시대이기도 하다. 제 5공화국이라는 암울한 사회상의 폐해가 병영 안으로 스며든 탓도 있겠지만, 고참의 물리적인 폭행을 당연한 듯 얼차려 관례로 받아들인 탓도 있다.

이봉원이 연기하는 곰팽이는 군대를 제대한 지 30년이 넘었지만, 군 생활 때 당했던 고참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실타래처럼 꼬였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곰팽이는 기러기 아빠로 아내와 자식을 위해 십 년 넘게 수고했지만 돌아오는 건 아내의 냉랭한 반응이다. 곰팽이가 하는 가발 사업은 여사원에게 제때 월급조차 주지 못할 정도로 경영 악화를 겪는다.

극 중 설정이기는 해도 이봉원의 연이은 사업 실패를 연상하게 만드는 설정이 아닐 수 없다. 그가 닥친 상황을 비관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무대에서 내려온 밧줄에 목을 매려고 할 때, 중년 관객이 극 중 대사에도 없는 “동작 그만”을 갑자기 외친다. 목 매달지 말라는 한 외마디 외침이다. 그만큼 이봉원의 곰팽이가 안타깝게 보였기에 객석에서 즉석으로 반응이 일어난 거다.

▲ 연극 ‘동작그만’ ⓒ지구인
보통 사람이라면 가정의 불화와 사업난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곰팽이는 다르게 생각했다. 지금의 일상이 꼬인 건 그 옛날 병영 생활을 할 때 고참을 잘못 만나 트라우마가 생긴 탓이라고 생각한다. 공연은 곰팽이의 현재와 옛 병영 생활의 과거를 왕래하며 전개한다. 곰팽이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 옛날 부대에서 고참들의 가혹 행위가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곰팽이의 회상처럼, 군대에서 그는 고참 뺀질이와 이상운이 연기하는 메기에게 호되게 군기 교육을 당했다. 여기서 병장의 별명이 메기가 된 건 개그맨 이상운의 입이 메기처럼 튀어나왔다고 불린 별명이다. 당시 고참에게 당한 트라우마 때문에 지금의 곰팽이가 하는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만큼, 곰팽이는 신참 때 고참들에게 호되게 당한다. 이에 곰팽이는 옛 고참이던 뺀질이와 메기를 찾아내어 이들에게 복수할 것을 다짐한다.

하지만 곰팽이의 과거를 조금만 되돌아보면 뺀질이 상병과 메기 병장이 곰팽이를 갈구기만 한 못된 병장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곰팽이는 군대 내에서 ‘고문관’이었다. 고참의 마음에 들게 행동해야 할 상황에서 엉뚱한 대답을 하거나,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 울어대기나 하는 고문관 말이다. 곰팡이는 이런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생각하지 않고 고참들이 자신을 학대했다고만 생각한다. 고참들의 가혹 행위만 기억했지 자신이 원인 제공을 했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해서다.

▲ 연극 ‘동작그만’ ⓒ지구인
뺀질이와 메기가 고문관 곰팽이를 괴롭히기만 한 ‘진상 고참’이기만 했을까. 곰팽이가 고문관이라 정신 차리라고 다른 부하보다 심하게 얼차려를 준 건 분명하다. 하지만 뺀질이와 메기는 곰팽이를 위한 배려심도 있는 따뜻한 고참이었다. 곰팽이가 아직 신참이라 휴가를 받을 기회가 한참이나 남은 걸 알고는 어떡하면 곰팽이가 휴가 받을 수 있게 만들까를 고민하는 마음 따뜻한 고참들이 뺀질이와 메기였다.

극 중 군 부대 위문 공연은 복고라는 정서를 극대화하는 설정이면서, 동시에 고참들이 만들어놓은 판을 통해 어떻게 곰팽이가 휴가를 얻는가를 보여주는 설정이다. <동작그만>은 공연의 주소비자인 20-30대 관객을 대상으로 만든 공연이 아니다. <동작그만>이라는 코미디 프로그램을 기억하는 중장년 관객을 대상으로 기획한 공연이다 보니 ‘복고 정서’가 물씬 풍긴다.

▲ 연극 ‘동작그만’ ⓒ지구인
군 부대 위문 공연의 노래가 최신 가요가 아닌 80-90년대 노래라는 점, 극 중 ‘김완순’이라는 이름이 김완선이라는 1990년대 핫한 가수 이름을 패러디했다는 점 등은 <동작그만>이 복고의 정서를 한껏 담고 있음을 보여준다. 곰팽이 이봉원이 나훈아와 조용필 등 여러 가수의 모창을 할 때는 ‘이봉원에게 저런 재주가 있었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맛깔나게 모창을 소화한다.

<동작그만>은 메기와 곰팽이라는 당시 개그계의 핫한 아이콘을 다시금 만날 수 있는 복고 정서만 담은 코미디가 아니다. 곰팽이가 예전에는 미처 모르고 있던 고참들의 따뜻한 마음씨가 숨어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는 ‘회고’가 공연 안에 담겨 있다. 곰팽이에게는 예전 고참들에 대한 섭섭함만 남아 있었지만, 돌아보면 고참의 갈굼 뒤에는 신병 곰팽이를 위해 자신들이 휴가갈 수 있는 기회를 반납하는 정겨움이 숨어 있었다. 군대라면 치가 떨리는 경험이 있는 관객이라고 해도, 웃음 뒤에 숨어 있는 이런 따뜻한 메기 고참의 마음씨 덕에 훈훈하게 감상할 수 있는 공연이 <동작그만>이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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