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환의 <예술인간의 탄생>은 현대자본주의를 해명한 <인지자본주의>(2011)에 이은 역작이다. 그리고 이 책은 주제 면에서 저자의 문학평론집인 <카이로스의 문학>(2006)과 <플럭서스 예술혁명>(공저, 2011)을 잇는 저작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무래도 <예술인간의 탄생>은 <인지자본주의>의 속편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 책에서 ‘예술인간’의 등장 가능성은 영혼이 노동하고 착취당하는 시대인 ‘인지자본주의’에서 형성된다고 설파되기 때문이다.

‘예술인간’(homo artis)은 예술가(artist)를 지칭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2015년 2월 17일자 '교수신문'에 저자가 직접 설명을 하고 있다. 예술가는 대중과 분리된 자격과 특권을 가진 전문적 직업집단을 의미하지만, 예술인간은 “자격특수적이기보다 보편적이며, 특권적이기보다 특이하고, 직업적이기보다 자기수행적인 인간형상”이다. 이 인간형상은 산업자본주의의 인지자본주의로의 이행에 따른 “노동인간이 예술가가 되고 예술가가 노동인간이 되는 생성과 변형의 지평에서 새롭게 탄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영혼이 노동하는 인지자본주의에서 예술가 되기를 강요받는 노동인간은 결코 행복하지 않다. 노동인간이 되어야 하는 예술가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 모두는 조증과 우울, 불안과 공황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이는 신자유주의적 지배체제와 연관되는 것인데, 하지만 이러한 암울한 상황 속에서 자기배려를 통해 자신을 예술화하면서 자기해방을 수행할 ‘예술인간’의 잠재성이 생성되고 그 잠재성이 현실화되는 경향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 조정환의 생각이다.

<인지자본주의>가 현대자본주의의 동학과 이 자본주의 속에서 그 자체를 넘어서는 주체성의 형성을 자율주의적 맑스주의와 사회 철학적 사유를 통해 일목요연하게 탐구한다면, 인지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지배체제 아래에서의 예술과 인간형의 변화, 그리고 예술진화론과 다중-예술가의 등장 등을 탐색하고 있는 <예술인간의 탄생>은 예술종말론과 예술진화론에 대한 현대사상가들의 예술론에 대한 정리와 설명, 비판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에는 많은 현대사상가들이 호출되어 등장한다. 사실 현대사상의 핵에는 예술론과 정치론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술에는 현대 사회의 문제가 응축되어 있으며, 또한 정치적인 것과 직결되어 있는 면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술에는 현대사회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예술은 현대사회의 문제를 드러내는 질병이며, 한편으로는 그 질병을 극복할 치유제가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많은 비판적인 현대사상가들이 예술의 문제를 해명해야 할 난제로서 여겨왔다.

하여, 이 책에서 거론되는 현대 사상가들은, 헤겔, 맑스에서부터 루카치, 푸코, 고진, 단토, 번햄, 바티모, 바디우, 랑시에르, 벤야민, 가타리, 랏자라또, 비포, 부리요, 기 드보르, 바네겜, 네그리, 들뢰즈 아감벤 등 현재 한국 지성계에서 주목받는 거의 모든 이들이 망라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요즘 유행하듯이 이들 사상가들의 복잡한 이론을 간략하게 요약해서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주로 현대 사회에서 예술의 운명에 대한 현대사상가들의 논의들을 정리하고 비판한다. 그래서 ‘지적 대화를 위한 얕은 지식’을 위해 이 책을 펴든 사람들은 난감해질 수 있을 것이다. 조정환은 현대사상가들의 예술론을 그 예술론이 등장하게 된 사회적‧역사적 맥락 속에서 설명하면서, 그 이론이 함의하고 있는 핵심을 포착하여 해명하는 방식으로 서술한다. 그리고 어떤 예술론에 대해 비판할 경우, 그 예술론에 대한 충실한 설명을 먼저 서술하고 난 후 비판을 가한다. 이러한 진중함이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렇듯 이 책에는 현대 사상가들의 예술론이 백화점 진열장에 샘플을 늘어놓듯이 소개되는 것이 아니라, 집필자의 문제의식에 따라 그 이론들이 해명되고 비판된다. 그래서 ‘서양 이론 물신주의’를 비판하는 이들의 비판에 이 책은 해당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론 자체에 대한 피로감을 가진 사람들, 이론 특히 예술론이 지금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급박한 일들과 관련 없는 고담준론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책은 또 다른 사치스럽고 피곤한 담론을 펼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성 또는 사상은 근육과 같은 것이다. 강인한 근육은 더 큰 힘과 지구력을 형성한다. 조정환이 현대자본주의와 이 자본주의의 너머를 사유하기 위해 근본적으로 파고드는 이론을 사유하면서,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태에 접근하는 작업은 우리의 실천에 방향을 설정하고 그 실천이 지속적인 힘을 가질 수 있도록 지성의 근육을 키워나가는 일의 하나다.(물론 지성은 책에서만 얻을 수만 없으며, 책을 읽지 못하는 이도 현실의 경험과 여러 실천 속에서 강한 근육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부언해두자.) 여하튼, 현대사상의 예술론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면서도 비판적인 접근을 원하는 독자들은 이 책을 매우 흥미롭게 읽을 것이며 자신의 사유를 생성하고 깊게 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고 있는 사상가들에 대한 논의들에 대해 이 서평이 다시 정리하고 논평한다는 것은 필자로서는 힘에 겨운 일이다. 이 책의 핵심적인 내용과 문제의식에 대한 논의는 '교수신문'에 실린 저자의 글을 읽기를 권유하는 것으로 대신하겠다. 더구나 이 책에 대한 기사와 저자 인터뷰 등을 적잖이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내용의 골자는 파악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그래서 그보다는, 이 책에서 필자가 생각하기에 쟁점이 될 수 있는 부분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이 책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토론하고 싶은 문제가 몇 가지 있었다. 그래서 일종의 토론문처럼 이 서평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다.(서평 토론회에 제출하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 책 속으로 본격적으로 인도하는 1장 「신자유주의, 비물질노동, 그리고 예술의 운명」은 매우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이 장에서는 예전에 생각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담론이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정환은 68혁명의 열기와 연동된 아방가르드(플럭서스)의 ‘모든 사람은 예술가다’라는 슬로건을 어떻게 자본이 자신의 것으로 전용했는지, 그러한 전용이 산업자본주의의 인지자본주의로의 전화와 비물질노동의 확산과 결합되는지에 대해 밝히면서, 이를 푸코의 신자유주의 분석과 ‘자기의 테크놀로지’론과 연결시킨다. 이에 따르면, ‘모두가 예술가다’라는 슬로건이 신자유주의에 의해 전용될 때, 그 슬로건은 ‘모두가 자본가다’라는 말로 변형된다.

신자유주의를 준비한 이론인 ‘인적자본론’에서 노동자는 자본에 적대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본 요소의 일부다. 노동자는 자기 자신의 자본가다. 노동자는 자신을 많이 쥐어짤수록 가치를 많이 생산할 것이며, 그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노동자는 자기 자신을 착취하면서 소득을 올리는 자본가다.) 특히 인지력을 사용해야 하는 비물질노동 체제에서는 노동자의 한정된 신체가 아니라 그의 지성과 창의력이 착취 또는 수탈 대상이 된다. 비물질노동자는 자신의 지성과 창의력을 채굴해가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자본가로서 많은 소득을 올리고자 한다. 물론 그 노동자의 비물질적 생산물은 더 큰 자본이 가져갈 것이다. 점차 비정규직화 되어 더 큰 자본과의 계약을 갱신해야 하는 그 ‘소자본가-노동자’는 자기 자신을 팔기 위해 자기 착취를 더욱 가동시켜야 한다.

이 ‘소자본가-노동자’가 바로 더 많은 소득을 위해 자기 자신을 관리하고 개발하는 경제인간이다. 그 노동자는 자본가처럼 시장의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나’라는 상품을 스스로 개발하고 생산하여 자본가라는 소비자에게 자신을 팔아야 한다. 인지자본주의 아래에서 자본은 어떤 노동자의 창조적인 능력을 산다. 이제 자본은 노동자에게 ‘예술가처럼 창의적으로 되라’라고 명령한다. 국가 역시 창조경제를 외치면서 자본의 요구를 제도화하고자 한다. 노동자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자신의 창조적‧예술적 능력을 쥐어짜기 위한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개발하지 못하면 시장에서 축출된다. 이렇게 하여 ‘모두가 예술가다’라는 슬로건에서의 ‘예술’은 자기를 개발하는 ‘기술’, 자본의 명령에 따른 ‘창조적 기술’로 변모된다. 사실, 축출의 불안 속에서, 개발되어야만 하는 그 창조성은 예술적 능력과 동일시될 수 없다. 조정환이 인용하고 있는 맑스에 따르면, 예술은 “직접적으로 자기본성의 작동에 의해 창조되어 직접적으로 향유되는 것”(103쪽)이다. 명령에 따른 창조성은 자기본성의 작동에 의한 것이 아니기에, 그 창조성은 영혼-‘자기본성의 작동’-을 제거한, 예술적 능력의 겉껍질일 뿐이다.

경제인간에서 예술인간으로의 이행이란, 이러한 자기개발을 통한 창조성의 기술에서 자기배려를 위한 자기 자신의 예술, 삶의 미학(푸코)으로의 이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의 쟁점이 있다. 그 쟁점이란 이러한 이행이 신자유주의 아래에서의 비물질적 노동 과정에 잠재해있는가 없는가이다. 조정환이 소개하고 있는 랏자라또와 비포의 의견 대립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된다. 랏자라또는 자본주의의 노동의 장에 예술이 혼입된다고 본다. 노동은 예술화되고 예술의 창작 과정 역시 가치 창출을 위한 노동으로 변형된다는 것이다. 특히 노동이 사회적 관계를 생산하고 미적 모델을 차용하여 행해지면서, 이러한 과정은 심화된다. 랏자라또는 이러한 비물질적 노동과정 자체가 협력적이고 예술적이게 되는 반면 자본주의 기업가는 비물질노동의 “생산의 능력들을 혁신하지도 못하고, 단지 비물질노동의 활동을 관리하고 조절하거나 그 과정을 통제할 과정을 말들어낼 수 있을 뿐”(168쪽)이라고 말한다고 한다. 랏자라또를 따르자면, 예술인간의 탄생은 인지자본주의 노동과정 자체에 내재해 있다.

그러나 또 달리 자율주의의 이론적 구도 속에서 기호자본주의론을 펼치고 있는 비포는 랏자라또와는 반대의 결론을 내린다. 그에 따르면 영혼을 가동하여 기호를 재료로 기호를 생산하는 기호자본주의에서 노동은 극도의 피로 속에서 이루어진다. 게다가 기호로 대체한 인간관계는 더욱 피폐해진다. 68혁명이 주창한 탈규제, 아나키, 탈영토화 등은 자본이 포획하여 신경제의 원리가 되어버렸다. 그러한 원리에 종속된 노동자는 결국 부채의 압박 아래에서 자신의 영혼을 탕진하고 우울증과 무지, 자살로 이끌린다. 비포는 이러한 상황에서 진보주의, 미래주의는 거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포에게 예술인간은 이러한 기호자본주의 노동체제에서는 탄생할 수 없고, 비물질노동을 거부하고 자본관계로부터 분리되어 시적인 것의 자율, 사회적인 것의 자율이 이루어지는 자율적 치유지대를 형성해야 비로소 탄생할 수 있다.

조정환은 비포의 현대 자본주의 분석에서 많은 부분 받아들이면서도 그의 대안에 대해서는 비판하는 입장에 선다. 그에 따르면, 랏자라또, 네그리, 마라찌 등은 비물질노동의 거부가 아니라 “비물질노동이 갖는 특이한 변형과 창조의 능력을, 새로운 삶과 세계를 구축할 공통적인 것의 잠재적인 동시에 실재적인 지평으로 간주하면서, 비물질적 인지노동의 잠재력을 중심으로 코뮤니즘에 대한 사유를 전개”(176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포가 인간을 피폐하게 만드는 인지노동의 장치인 자동기계장치에서 벗어나 가속이 아니라 느림이 원리가 되는 지대(ZONE)의 구축, 시의 원리가 삶을 구성하는 지대의 구축을 대안으로 제시했다면, 다른 자율주의자들은 그 자동기계장치를 자본관계에서 분리하여 “공통적인 것을 생산할 장치로 전용”할 것을 주장하고 “예술의 진화 역시 별도의 자리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이 인지노동과 인지장치의 자본관계로부터의 분리와 해방이라는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177쪽)고 했다는 것이다. 물론 조정환은 ‘다른 자율주의자들’의 입장에 서 있다.

필자는 이 부분이 토론이 필요한 쟁점이라고 생각하는데, 필자로서는 아무래도 인지노동의 현재 양상은 삶과 협력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인지노동을 사보타주하고 치유지대를 만드는 것이 대안이라는 비포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조정환의 생각대로, 인지장치는 공통적인 것을 생산하는 장치로 전용될 수 있으며, 전용되는 것을 실제로 많이 보아왔다. 특히 ‘촛불집회’에서 이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지력이 인지노동으로부터 해방되지 않는다면, 그러한 예술적 창조성, 공통적인 것을 창출하는 창조성은 발산되기 힘들지 않겠는가? 다시 말하면, 예술인간은 영혼을 파괴하고 삶을 소진시키는 노동과정 바깥에서 탄생할 수 있지 않을까? 예술인간의 탄생 장소는 인지노동으로부터 탈주한 곳에서 이루어지는 공통적인 것의 생성의 장에서 형성되는 것 아닐까? 조정환이 다중-예술의 전범으로 들고 있는 촛불집회나 세계에서 일어난 각종 점거운동은 바로 그러한 장소, 신자유주의 체제에 저항하는 장소가 생성되면서 이루어졌다. 이 장소에서 다중은 예술인간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조정환은 자신을 자기 자신의 기술자로 만들어야 하는 인지노동 과정 자체에서 그러한 예술인간의 잠재성이 형성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예술인간의 잠재성 역시 그 인지노동체제에서 탈주하면서 삶정치적인 투쟁을 벌이는 미시적 과정 속에서 형성되는 것은 아닐까? 경제인간에서 예술인간으로의 전화는 현재의 인지노동체제와의 어떤 단절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물론 비물질노동의 경향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지배 아래에 있는 현재의 비물질노동의 코뮤니즘적인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노동은 더욱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전환을 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 전환은 저절로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탈주와 삶정치적인 투쟁 속에서 조금씩 또는 급격하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쟁점은 ‘누구나가 예술가’인 시대에서, 조정환은 “아방가르드적 혁명적 예술가의 역할은 자본에게 소유되어 있는 예술수단을 훔쳐 다중에게 돌려주는 스파이가 되는 것이다. 이것만이, 예술능력에 대한 권력의 포획을 넘어서는 기초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352쪽)고 주장하는 부분이다. 이 주장은 근대 이후 예술 개념이 예술가라는 “전문성을 중심으로 구축되어 왔”으며 “이것은 실질적으로 다중의 예술적 능력을 압류하는 방법이었고 정치에서의 대의제, 철학에서의 보편주의, 의료에서의 병원중심체제 등등의 발생과 궤를 같이 한 것이었다”(351쪽)는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그 인식은 예술가는 정치에서의 대의제가 재현에 기초한 것과 마찬가지로, 스펙타클 체제의 기술자들로 배치되어 “다중을 구경꾼, 관객, 소비자로 만드는 한에서 자신을 예술가로 생산”하면서 “실재, 즉 리얼한 것으로부터 멀어지거나 리얼한 것의 물구나무 세우기, 즉 재현을 통해 작업한다”(352쪽)는 판단과 이어진다. 조정환은 혁명적 예술가는 이러한 예술가이기를 거부하는 예술가여야 하며, 스파이가 되어 다중-예술가로의 존재이전을 성취하면서 “실재와 지금과는 다른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 스파이로서의 예술가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는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필자로서는 대부분의 예술가-‘성공’하지 못한 예술가, 아직 수업을 받고 있는 예술가 등-는 프레카리아트로 전락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정환도 말했듯이 예술가는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과정에 투입되고 있으며, 그의 예술작업은 노동이 되고 있다. 인지노동자의 노동과 예술가의 예술은 자본에 종속되어 모두 그 창조력이 갈취당하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다수의 예술가들은 인지노동자와 함께 다중의 일부로서 생각되는 것이다. 그들이 사회와 분리된 예술제도 속에서 활동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예술제도 역시 자본과 같이 기업화되고 있다고 할 때, 그들은 일종의 ‘기업-제도’와의 일시적 계약 관계를 통해 예술제도와 연결된다.(‘예술원’ 회원은 그에 해당되지 않겠지만.) 이들은 자신의 예술 활동이 이러한 제도에 묶이는 것을 갑갑해 하지만, 프레카리아트로서 먹고 살기 위해 묶이지 않을 수도 없다. 이 상황에서 탈주하기 위해서라도, 예술가들은 다중의 일부로서 저항 공간에 열렬하게 참여하여 자신의 예술적 능력을 발랄하게 발산하고, 한편으로 대안공간을 조직하기 위해 열심이지 않나 생각된다.(조정환의 ‘스파이 행위’는 이를 가리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그들은 예술의 장 역시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저항의 장으로 전용 또는 활용하려고 한다는 것도 덧붙여두고 싶다.

요컨대, ‘스파이’ 개념은 인지자본주의 이전의 근대적 예술가 상에 기초한 것이 아닌지 생각되는 것이다. 그 개념은 예술가를 자본과 다중 사이에 있는 매개적 존재-자본에 의해 다중으로부터 갈취되어 분리된 예술수단과 능력을 다중에게 되돌려주는 존재-로서 자리매김하는 것 같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다수의 예술가는 이미 예술로 노동을 하고 있는 프레카리아트 인지노동자로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들이 촛불집회에 참여하여 자신의 예술적 능력을 통해 다중의 총체적 예술-촛불집회-에 공통적인 것을 더할 때에는, 다른 다중과 마찬가지로 다중의 일부로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견이 이 시대에서 예술가가 ‘다중-예술가’로 그 존재를 이전해야 한다는 조정환의 주장에 대한 이견은 아니다. 그러나 예술가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다중-되기’를 통해 다중으로 현실화되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인지노동자들 역시 자본에 의해 갈취되고 자본의 소유가 되어버린 자신의 인지력을 자본에 저항하고 공통적인 것을 생산하는 능력으로 전환시킴으로써 ‘다중-되기’의 과정에 들어설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쟁점은 이 책의 마지막 장에 전개된 ‘리얼리즘론’에 대한 것이다. 이 리얼리즘론은 ‘스파이로서의 예술가’론에서 제출된, 예술가는 “실재와 지금과는 다른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다”는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사유를 진행한 결과물일 것이다. 이 논의를 담은 「삶미학과 리얼리즘」은 들뢰즈의 이미지-시뮬라크르론에 기초하여 심화된 실재 개념을 바탕으로, 기존의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을 재평가하면서 ‘내재적 리얼리즘’을 제시하고 있다. 조정환은 알다시피 1980년대 말 <노동해방문학> 등을 통해 의식(세계관) 규정적인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노동계급의 해방을 목적으로 한 ‘급진적 리얼리즘’을 제창한 바 있었는데, <노동해방문학> 시절로부터 20년이 더 지난 지금 이 「삶미학과 리얼리즘」은 그와는 완전히 쇄신된 리얼리즘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이 글은 필자에게도 큰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이 글은 문학에 대한 글을 주로 쓰고 있는 필자에게도 여러모로 관심이 가는 글이었다. 특히 한국에서의 리얼리즘-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의 논쟁에서 “리얼리즘의 연속적 패배는 모든 임의적 가정들(세계관)의 제약을 붕괴시키는 리얼리티의 장대한 승리의 과정이다”(361쪽)라는 평가는 놀라운 것이었다. 그래도 조정환은 예전에 크게 봐서 리얼리즘 진영에 속해 있었던 평론가였다. 하지만 논쟁에서의 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의 승리를 리얼리티의 승리로 해석하고 있었던 것이고, 이에 어떤 발상의 거대한 전환 같은 것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리얼리즘의 정당한 대안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그 두 이념 역시 전통적 리얼리즘과는 다른 미학체계로 리얼리티를 임의의 가정들 아래로 종속시켰다고 본다. 그래서 심화된 실재를 통해 재구성된 리얼리티가 이러한 미학체계에서도 온전히 다루어질 수 없었다는 것이다.

조정환에 따르면 1930년대 리얼리즘 논쟁은 “리얼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리얼인가를 둘러싼 논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은 “리얼리즘은 경험적인 것의 초월적 재현(초월주의)인가 초월적인 것의 선험적(초월론적)인 것에의 개방인가라는 문제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 그의 평가다. 전자인 초월적 재현은 리얼리즘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극단적으로 나가면 초월적인 지도자나 수령의 마음을 전형화하는-으로의 발전과 관련된다. “리얼리즘의 한계를 지적하고, 나아가 선험적(초월론적)인 것들의 리얼리티(실재성)를 드러내고자 한”(371쪽) 시도는 초현실주의를 비롯한 모더니즘 조류로 표출되어 나왔다. 그러나 이 후자는 결국 “사적인 삶의 의식적‧무의식적 경험사실들을 선험적(초월론적) 평면 위에 재현하고자 했다”는 한계를 가진다. 그래서 리얼리티를 둘러싼 논쟁은 “공적인 삶과 사적인 삶의 제도적 분리와 이중화의 자연스러운 결과”(376쪽)라고 설명된다. 하지만 이 분리접속이 와해되는 현대의 역사적 과정에서는 내재적 리얼리즘이 제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리얼리즘은 “선험적(초월론적인 것)을 순수한 내재성의 평면으로 전환시키고 모든 사건들과 사실들을 그 내재성의 평면 안에서의 생성, 구성, 개체화로 전환시키는 것을 가능케 할 조건을 구축하는 운동”(377쪽)이다. 그의 말을 좀 더 들어보자.

점점 비물질화하고 비가시화하는 생산, 유통, 소비의 체제에서 다중은 어떤 원본도 없는 시뮬라크르들로 나타나며 다중의 세계는 이 시뮬라크르들의 광적 운동으로 나타난다. (중 략) 내재적 리얼리즘은 초월적/선험적(초월론적) 세계에서 추방된 이 순수 존재들의 시뮬라크르 리얼리티를 모든 것을 새로 일굴 잠재력으로 규정하고 그것들의 분산, 공명, 합체, 공생으로부터 분출한 새로운 장치, 새로운 개체성, 새로운 사실의 아상블라주의 권리들을 천명하는 시학이다. 그것은 새로운 의식주체를 구성하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의식주체를 다중의 광적 역량과 감각리듬에 복종하는 기관으로 재배치하는 것이다.(377쪽)

이에 따르면, 내재적 리얼리즘의 제기는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분리의 와해와 인지자본주의의 형성, 그리고 이 시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집단주체성인 다중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다중의 모습은 “시뮬라크르들의 광적 운동으로 나타”나며, 이 “광적 역량과 감각리듬에 복종하는 기관”인 ‘내재적 리얼리스트’의 의식 주체는 ‘내재적 리얼리즘’의 ‘시학’을 통해 ‘시뮬라크르들’의 리얼리티, 즉 “그것들의 분산, 공명, 합체, 공생으로부터 분출한 새로운 장치, 새로운 개체성, 새로운 사실의 아상블라주”의 권리를 천명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토론할 문제가 떠오른다. ‘내재적 리얼리즘’이 ‘시뮬라크르(이미지)-실재’의 내재성이라는 존재론을 나타낼 수 있다는 점에서 조정환의 생각을 담을 수 있는 적실한 개념이라고도 생각된다. 그런데 ‘리얼리즘’이라는 말 자체가 시학이라기보다는 미학의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필자뿐일까? ‘리얼리즘’은 아무래도 ‘재현’을 떠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시학(poetics)이 ‘poiesis’ 즉 제작을 어원으로 한다고 할 때, ‘리얼리즘’이란 말은 제작과정을 사상한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갈무리> 출판사 홈페이지에 실린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조정환은 “삶과 생명에 대한 깊은 주의야말로 정치의 개념을 혁신할 수 있는 대안적 평면으로 생각되었”는데 “이것이 정치미학에서 정치시학으로의 전환의 경험”이라고 말하면서, “미학이 재현론에 어떤 형태로든 문을 열어두고 있다면, ‘poiesis’, 즉 표현, 제작, 창조로서의 시학은 재현론적 사고를 뒤집어 그 무게 중심을 역전시키는 것으로서 정치에 대한 새로운 개념과 접근하거나 심지어 일치하는 개념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는 네그리가 “신체의 표현 속에서 도구의 영유領有를 실현하는 인간의 조건은, 사실 (아름다운 것을 생산하는 작용으로부터 분리된) 어떤 미학적 담론이 존속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으며, “매우 특이한 예술적 포이에시스로서의, 혹은 행위 내에서 아름다운 것의 실천을 표현하는 작용으로서의 시학만이 존재하고 주어지며 존속할 수 있다”(<예술과 다중>, 155-156쪽)고 말한 바와 공명한다. 그런데 ‘생산 작용’보다는 재현 과정을 연상시키는 ‘리얼리즘’ 개념과 이 ‘시학’ 개념과는 상충되는 것은 아닌지 여전히 의문인 것이다.

필자는 <1920년대 한국 근대시의 전위성 연구>라는 논문에서,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을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회통’(최원식)을 통해 넘어서려는 다소 나이브한 시도에 대해,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대립을 ‘예술의 정치화’라는 급진성을 내포하고 있는 아방가르드 개념을 통해 돌파해야 한다는 생각을 맞세워보려고 한 적이 있다. 조정환의 이 책은 인지자본주의 시대에서의 ‘예술의 정치화’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 깊이 탐구하고 있으며, 혁명적 아방가르드 예술가가 어떠한 일을 해야 하는지 제시-스파이로서의 예술가-하고 있어서, 그 덕분에 필자는 몇 걸음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었다. 또한 한편으로는 내재적 리얼리즘 개념과 아방가르드 개념의 관계가 궁금하기도 했다. 또한 이 내재적 리얼리즘은 혁명적 아방가르드 예술가의 ‘시학’ 또는 혁명적 아방가르드 예술의 미학인 것인지 궁금했다. 이는 ‘내재적 리얼리즘’에 대한 이론적 논의가 깊이 있게 전개되었지만, 그에 반해 그 예시가 뒷받침되지 않는 면이 있어서, ‘내재적 리얼리즘’의 실감을 잘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들뢰즈의 <시네마>에 언급되는 영화들이 그 예시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만약 앞으로 기회가 있다면 ‘내재적 리얼리즘’의 실제 예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마지막으로 「후기: 정치시학으로의 길」을 매우 인상 깊게 읽었다는 것을 밝혀두고 싶다. 저자가 1980년대 대학원 통학 시절의 철학과 미학 연구에서부터 <노동해방문학>의 ‘정치미학’을 거쳐 현재 ‘정치시학’을 제안하기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사상적 노정을 밝히고 있는 이 글을 통해, 한 투사로서의 사상가가 헤쳐나간 사유의 길을 볼 수 있었다. 이와 함께 <세월호가족대책위원회>에 대한 논의도 마음을 깊이 움직였다. 이 논의는 <가대위>가 부패한 한국의 모든 지배기구에 대항하여 싸웠음을 인상 깊게 서술하고 있다. 조정환은 “<가대위>는 그 어떤 예술가 개인이나 집단도 수행하지 못한, 또 수행할 수 없는 독특한 예술실천을 통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새로운 삶, 새로운 시간, 새로운 관계가 무엇이어야 할 것인가에 관해, 전업적 작가들이, 아니 우리 사회 전체가 다시 숙고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면서 “나는 이것이 2014년에 팽목항을 주요 무대로 전개된 다중예술의 한 사례이며 예술가-다중과 다중의 예술의지가 신자유주의적 비참의 똥거름 속에서 피어나고 있다는 증거”(389쪽)라고 말한다. 이 말에 동의한다. 아니,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예술인간의 탄생> 맨 뒷부분에 실려 있는 이 말을 통해, 이 책의 핵심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술가는 다중의 예술능력과 예술의지에 접촉하고 이에 정동될 때 자신을 구원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과 함께.

<예술인간의 탄생>은 남해 바다에서 유영을 하다가 갑작스럽게 이 세상을 떠난 ‘만화인간 정성용의 예술적 삶과 영혼’에 바쳐진 책이다. 필자는 <다중지성의 정원>에서 정성용의 앳된 얼굴을 두 세 번 본 일이 있다. 비록 짤막한 대화밖에 나누지 못했지만, 인상에 남는 마주침이었다. 필자도 그 ‘만화인간’을 기억하면서 이 글을 닫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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