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무역협정(FTA)은 세계무역기구(WTO)를 주축으로 한 다자간 협상과 함께 자유무역의 또 다른 전략 중 하나다. 이 체제에서 지역은 하나의 블록으로 묶였고, 특정 지역들을 전략적 협상 대상으로 활용하는 ‘다자간 합의-양자간 협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한국은 그 중심에 있던 나라였다. 노무현-이명박 정부가 잇따라 추진한 FTA는 세계화의 먹이사슬이 그만큼 촘촘해지고 있다는 것을 드러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핵심고리는 ‘금융의 헤게모니 강화’다. 또 1970년대 이후 세계경제 ‘구조개편’의 본질은 금융자본의 이해에 따라 하청체계를 재구조화하는 것이다.

위기의 신자유주의, 태평양으로 선회하다

구조는 항상 바뀌는 것이지만 언제나 그것을 추동하는 건 ‘위기’가 계기가 된다. 프랑스의 경제학자 제라르 뒤메닐과 도미니크 레비는 <신자유주의의 위기>에서 2007-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를 분석하면서 ‘대수축’(Great contraction)이라고 설명했다. 미국발 금융위기는 이른바 IT혁명이라는 기술진보의 효과로 이윤율이 상승하는 가운데 일어난 위기라는 점에서 ‘수익성 위기’가 아니고 이 때문에 대공황과는 구별된다. 하지만, 이 위기는 쌍둥이적자로 표현되듯 미국경제의 불균형과 함께 금융자본의 헤게모니를 위한 장치 붕괴로 이어져 신자유주의 체제가 통제할 수 없는 위기에 빠졌다는 게 이들의 진단이다.

금융세계화로 위기가 ‘세계화’하고 있고, 세계화된 위기는 하청체계를 세계적으로 다변화하고 있다. 미국만 보더라도 이 같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금융헤게모니를 억누르려 하고 있지만 쉽지 않다. 뒤메닐과 레비가 “어쨌든 새로운 세계 질서는 현재보다 더욱 다극적이 될 것”이라고 전망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미국이 태평양으로 선회한 시기, 미국이 한국 등 반주변부 국가에게 동시다발 FTA와 다자간 FTA를 유도하기 시작한 시점이 바로 ‘대수축’ 시기라는 점이다.

멕시코 칸쿤에서 카타르 도하까지, G20에서 G2까지 정부와 자본이 ‘세계화’를 추진하며 제시한 전망은 항상 ‘장밋빛’이었다. 한국의 경우 ‘농업을 포기하고 자동차를 얻는다’는 것을 강조하며 시민들을 설득했다. 그리고 WTO의 각종 협정과 FTA를 동시다발로 관철해 왔다. 특히 한미FTA 협상과정 당시, 광우병 쇠고기 담론을 중심으로 정부와 자본의 전망을 비판하는 작업이 이루어졌지만 이후 진행한 한-EU FTA 등은 ‘자동문’ 수준으로 타결됐다. 특히 우리는 2007-2008년 금융위기 이후 구조개편의 속도가 빨라진 것에 주목해야 한다.

눈앞에 다가온 게 TPP(Trans-Pacific Partnership, 환태평양 경제동반자 협정)이다. TPP는 쉽게 말해 ‘다자간 FTA’라고 할 수 있는데 미국 오바마 정부가 중국을 견제할 목적으로 ‘태평양으로의 선회’(Pivot to the Pacific) 전략으로 돌아선 뒤 주도하고 있다. TPP에는 현재 태평양 인접국 12개국이 참여 중이고 한국도 2013년 말 ‘관심표명’을 했다. 한국의 경우 미국과 중국의 관계, 동아시아의 특수성을 고려하면 TPP 참여가 늦춰질 가능성도 있으나, TPP에는 미국 중심의 정치적 군사적 목적이 있는 만큼 속도를 높여 논의에 참여할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 (이미지=TradeJustice New York Metro)

TPP 입장료, 한미FTA보다 비싸다

문제는 한국이 TPP에 참여한다 하더라도 입장료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12개국이 원하는 조건들을 들어줘야 한다. 쌀 관세율(또는 수입의무량) 변화가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TPP 문건을 보면, 미국의 요구수준은 대부분의 영역에서 한미FTA 이상이다. 지난 2012년 발효한 한미FTA의 효과를 따져보는 게 TPP가 한국사회에 미칠 영향을 가늠할 수 있는 잣대가 된다. 9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 8간담회실에서 열린 <한미FTA 발효 3년 평가 / TPP 전망> 토론회는 지난 3년을 평가하고 TPP를 전망하는 자리였다.

미국과 금융자본이 주도하는 세계화 전략은 ‘성장’을 목표로 했고 이는 한국 정부와 자본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1980년대 후반 관세율을 인하하고, 1997-1998년 IMF 구조조정을 경유하고, 2000년대 중반 이후 동시다발적으로 자유무역협정을 맺은 한국경제의 성장률은 어떨까. 1987년 이후 ‘저성장’ 경향은 부정할 수 없다. 2012년 이후에도 저성장은 계속됐고, 미국경제의 회복세 덕에 자동차 수출 등 대미수출이 늘긴 했지만 독일과 관계에서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FTA 효과’에 의문이 드는 대목이다.

박하순 민주노총 정책위원은 “자유무역협정 체결 효과의 가장 중요한 지표는 역시 성장률이지만 한국의 2012년 이후 성장률이 신통치 않다는 것은 한미자유무역협정 체결 효과가 별반 없다는 이야기이거나, 혹은 최소한 자유무역협정 체결이 저성장을 극복하는 데 효과가 없었다는 것을 얘기해주고 있다”고 분석했다. 성장률이 둔화한 신자유주의나 수요부족으로 인한 불황시기에 체결되는 FTA는 경제의 크고 작은 구조조정을 요구하고, 이것이 부익부 빈익빈과 수요부족을 심화해 불황을 더 악화한다는 게 박하순 정책위원 분석이다.

뒤메닐과 레비의 표현대로 “신자유주의적 경향은 궁극적으로 상위 계급 ‘안전판’의 경제적 기초를 불안정화”했고, “이와 관련해 금융 규제뿐만 아니라 새로운 기업지배구조, 금융 부문의 재건, 새로운 정책들이 요구되고” 있는 상황을 만들었다. 이른바 ‘부유세’와 ‘소득주도성장론’을 두고 “근본적인 대안이 아니다”느니 하는 비판이 나오지만 시간이 갈수록 힘이 실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통상정책과 구조개혁은 신자유주의를 지양하는 게 아니라 ‘초신자유주의’를 위한 것인 게 많다. 한미FTA로 인한 취해진 개혁들은 여전히 ‘고삐 풀린 세계화’를 드러낸다.

▲ 9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 8간담회실에서 열린 <한미FTA 발효 3년 평가 / TPP 전망> 토론회는 TPP-FTA 대응 범국민대책위원회, 민변 국제통상위원회, 한 살림생협, 아이쿱생협, 김제당 노영민 부좌현 신정훈 오영식 원혜영 유성엽 전순옥 최규성 의원실이 공동 주최했다. (사진=미디어스)

누구를 위해 75개 제도가 바뀌었나

한국이 한미FTA를 위해 바꿨거나 바꿔야 할 법·제도는 무려 75개(법률 32개, 시행령 16개, 시행규칙 18개, 고시 9개)의 면면과 TPP 협상안을 보자. 우선 지적재산권. 남희섭 오픈넷 이사에 따르면, FTA 체결을 전후로 저작권법은 비친고죄가 확대되는 등 대폭 강화됐다. 자유청년연합 부대표가 가수 김장훈씨를 저작권법 위반으로 고발한 것, 문화체육관광부가 대학가 불법복제 서적 단속을 강화한 것, 저작권 경찰이 생긴 것, 스트리밍 매장 음악에까지 저작권을 적용한 법원 판결 등이 한미FTA 영향이다. 지난 3일에는 허가와 특허를 연계해 이에 대한 권리를 강화하는 약사법 개정법 또한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그런데 TPP는 한미FTA보다 강화된 조건을 달고 있다. 남희섭 이사는 “심각한 문제는 TPP”라며 “유출된 협상문안을 보면 헐리우드와 제약사의 이해를 편향적으로 반영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TPP는 네이버, 다음과 같은 포털이나 웹하드 사이트가 저작권자에게 이용자의 개인정보를 넘겨줄 수 있도록 적극 협조하는 것을 권장한다”며 “(TPP 협상안은) ‘세계의 약국’으로 불리는 인도 특허법 무력화 조항 또한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밖에도 그는 “TPP 협상문은 협정 당사국의 경제적 이해, 국제관계 또는 국방이나 안보에 해를 끼치는 영업비밀 침해 행위를 형사처벌하도록 정하고 있다”며 탐사보도나 내부고발 또한 위축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보건의료는 한미FTA 발효 이후 가장 급변하고 있는 분야다.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은 “한미FTA는 공공성이 강한 사회서비스분야의 민영화와 상업화를 초래하는 협정”이라며 “일단 한 번 민영화/영리화되면 다시 되돌릴 수 없는 법, 제도적 환경을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실제로 2014년과 2015년 상반기까지 FTA 3년차에 진행된 병원 영리자회사 허용, 경제자유구역 영리병원 규제완화, 원격의료와 같은 신의료기술 및 의약품 규제완화, 임상시험 규제완화, 의료부분의 민영화는 거의 모두 한미FTA 와 직간접적인 연관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TPP에 가입하면 이 같은 의료영리화 흐름이 강화된다는 게 우석균 정책위원장 설명이다. 그는 “2013년 11월 13일 위키리크스가 유출한 95쪽의 TPP지적재산권 챕터에 따르면 (의료부문 영리화 흐름은) 한미FTA보다 강화”됐다며 치료방법 특허, 바이오신약 자료독점권 연장, 인도특허법의 진보적 조항의 규제 등을 지적했다. 그는 “TPP로 의약품, 담배, 알코올, 식품 등에서 공적 역할이 줄어 부정적인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호주 공중보건협회 건강영향평가팀의 보고서(2015년 2월)를 인용하며 “공적건강보험의 보장성 강화가 곧 보험회사 상품에 대한 규제강화나 간접수용으로 TPP 위반이 될 가능성이 더 커진다”고 설명했다.

▲ (이미지=노동건강연대)

쇠고기 문제 재발 가능성 99.9%

가장 위험한 것은 ‘쌀’과 ‘쇠고기’다. 장경호 농업농민정책연구소 ‘녀름’ 부소장은 “한국이 TPP 가입의 대가로 미국에 바쳐야 하는 조공 물품으로 예상되는 첫 번째는 현행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위생검역조건을 철폐하거나 대폭 완화하는 것”이라며 “두 번째는 미국산 쌀에 대한 수입을 늘려야 하는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또한 “미국산 GMO(유전자 조작 생물) 농식품과 유기농식품의 수입 증대”도 우려했다. 이는 한미FTA 협상 때부터 미국이 끈질기게 요구한 것 중 하나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 같은 법과 제도를 조율하는 구조개편의 주체 또한 달라진다는 점이다. 민변 국제통상위원회의 송기호 변호사는 “TPP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규제 정합성’”이라고 지적했다. 한미FTA 등에서는 기업의 국제중재 회부권이 투자영역에 대해서만 미치는데 TPP는 이와 달리 “정부가 이해관계자와 정보교환, 대화를 포함한 성공적 협력에 이바지할 여러 정책 수단을 강구해야 하며, 새로운 규제를 심사하고 중앙 정부 차원에서 조정을 촉진하는 중앙 정부 차원의 조정 기구를 둘 것”을 규정했기 때문이다. 송기호 변호사는 “이러한 새로운 규정은 국가의 규제권 전반에서 국가의 정책 주권을 제약하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IMF의 주문을 받아들인 김대중 정부, 동북아 금융허브론을 주창한 노무현 정부, 한미FTA를 추진한 이명박 정부에 이어 오는 4월 TPP 참여를 위해 군불을 때고 있는 박근혜 정부까지 정부의 주장은 “무역 및 투자자유화가 성장 및 고용 증대에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민주노총 박하순 정책위원은 “정부 주장을 뒷받침하는 이론은 비교우위론과 직접투자론”이라며 “자유화를 통해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산업에 집중하고 열위에 있는 산업을 포기하면 보다 많은 성장을 가져온다는 것이 비교우위론이고, 직접투자론은 외국인직접투자는 반드시 생산 및 고용증대를 가져온다는 이론”이라고 설명했다.

FTA 효과? 없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정부의 주장과 전망은 틀렸다. 박하순 정책위원은 “오늘날 구조적 위기의 시기에 ‘포기된 비교열위’의 산업에서 발생하는 실업자들이 비교우위의 산업에서 일자리를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오늘날의 투자는 대부분 포트폴리오 투자이고, 직접투자(5~6% 수준)라 할지라도 포트폴리오 투자와 다를 바 없는 자본계정에서의 금융투기일 뿐 실물투자 증대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라고 지적했다.

박근혜 정부는 역대 정부와 똑같은 주장과 전망으로 TPP 가입을 서두르고 있다. 주제준 TPP FTA 대응 범국민대책회의 정책팀장은 TPP의 양축인 미국과 일본은 5일 실무협상을 재개했고 4~5월 미일 정상회담에서 타결을 선언할 것으로 예측했는데, “미일 등 TPP 협상 타결 직후 참여선언을 하겠다”던 한국도 속도를 높일 수 있게 된다. 산업부는 지난 2월 TPP 전략포럼을 출범시킨 바 있다. 주제준 팀장은 “TPP는 사실상 한일FTA 효과 수준”이고 “정부의 GDP 상승효과 주장은 허구”라며 TPP 가입 움직임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2007-2008년 찾아온 금융위기는 미국뿐 아니라 그리스, 스페인에도 ‘지금과 같은 방식의 신자유주의는 안 된다’는 교훈을 줬다. 한국은 정반대로 가고 있다. 한국에서 그 동안 여러 차례 허구적인 주장이 먹혀들었던 이유는 역설적으로 고소득층과 중산층의 금융소득 때문이다. 금융세계화의 과실은 금융자본과 고소득층이 대부분 영유하고 있으나, 정부는 중산층을 투자자로 만들면서(‘투자의 사회화’)로 불만을 봉합했다. 박근혜 정부는 지금도 일부 정책을 역주행하고 있다. 협상까지 포함하면 한미FTA에 속아넘어간 시간은 십 년 가까이 된다. 그리고 지금 TPP에 또 다시 넘어갈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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