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신문을 펼치든, TV를 켜든 간에 온통 세계 경제위기에 관한 기사들로 대홍수를 이룹니다. 예전 같았으면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 언론이 가장 비중 있게 다뤘을 미국 대선 관련 보도도 한쪽 구석으로 밀려날 정도니까요. 미 대선을 바라보는 일반 사람들의 시선도 “미국 너네가 불을 질렀으니 누가 대통령이 되든 빨리 어떻게 좀 해봐”하는 원망 섞인 반응 정도인 듯 합니다. 정말 세계 초강대국 미국의 위신이 말이 아니게 됐습니다. 물론 미국에 대한 전 세계인들의 신뢰가 바닥을 친 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요.

아무튼, 경제위기를 다룬 기사들에서는 위기와 대혼란의 원인과 책임에 대한 갖가지 분석들을 쏟아냅니다. 어떤 이는, 부실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탐욕에 눈이 멀어 무분별한 대출과 파생상품을 남발한 미국 월가의 금융기관들 때문이라고 하고, 또 어떤 이는 2000년 닷컴 버블 붕괴로 인한 경기침체를 막기 위해 초저금리 정책을 써서 부동산 거품을 마구 키웠던 앨런 그린스펀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에게 비난의 화살을 겨눕니다. 또 누구는 이게 다 미국 국민들이 힘자랑 밖에 할 줄 모르는(그렇다고 힘을 제대로 쓸 줄 아는 것도 아니었죠) 멍청한 대통령을 뽑아서 그렇다고도 합니다. 더욱 근본적으로는 70년대 말, 80년대 초 레이건과 대처가 주도한 신자유주의 세계화 때문에 시장에 대한 정부의 규제가 약해질 대로 약해져서 그런 거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번 경제위기가 ‘시장의 실패, 국가의 귀환’으로 귀결될 거라고도 하더군요.

▲ 동아일보 10월30일자 3면
그런데 이 지점에서 몇 가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경제 전문가도 아닌 제가 잘 모르고 하는 소리인지 몰라도, 시장자본주의가 본격화한 이래로, 아니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지배적인 체제로 자리 잡은 이래로 과연 시장이 ‘실패’하지 않은 적이 있었던 가요? 20%의 승자가 환호성을 지르는 사이 80%의 패자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단지 시장의 세례와 은총을 받는 과정에서 그냥 무시해도 좋을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였을 뿐이던가요? 그리고 오늘날 이 지구상에 만연하고 고질화된 빈곤, 환경파괴, 시장 주도권 다툼으로 인한 각종 분쟁과 전쟁, 양극화, 소외 등의 문제를 과연 그동안 시장이 ‘성공’적으로 해결해왔던가요?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서 ‘보이지 않는 손’(시장)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고 모두의 궁극적인 번영을 가져다 줄 거라는 맹목적인 시장 만능주의가 판쳤던 건 맞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보이는 손’(국가)은 저 구석에서 그냥 뒷짐만 지고 있었던가요?

아닙니다. 시장을 주도하는 자들이 더 많은 이윤을 뽑아내는 데 있어 걸리적거리는 세력이 있거나 골치아픈 문제가 생길 때마다 국가는 나서서 그걸 제거하고 처리하는 해결사이자 도우미 역할을 해왔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초국적 에너지 기업들과 민간 군사기업들에게 새로운 이윤의 활로를 뚫어주고 돈다발을 안겨주기 위해 벌어졌던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침공(물론 침공의 이유가 비단 경제적인 측면에만 있는 건 아니지만)을 들 수 있습니다. 국내적으로는, 재벌 총수의 불법적인 경영권 승계와 배임행위에 대해 국가가 나서서 사법, 행정, 입법 기구를 총동원해 깨끗이 세탁해준 삼성 이건희 사건이 먼저 떠오릅니다.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딕 체니 부통령,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 등이 모두 기업의 CEO 출신들이고, 과거 클린턴 행정부의 로버트 루빈 전 재무장관과 부시 행정부의 헨리 폴슨 현 재무장관을 비롯해 이미 시장 만능주의자들이 주요 국가들의 권력을 장악한 상태에서는 ‘시장의 실패, 국가의 귀환’이 아니라 ‘시장의 실패, 국가의 뒤치다꺼리, 다시 시장의 득세’라는 시나리오로 이어질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설사 오바마가 차기 미국 대통령이 된다 하더라도 말이죠).

우리는 커다란 위기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흔히 “위기에서 교훈을 찾아 전화위복의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는 말들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현재 언론을 가득 메운 경제위기 관련 기사들을 보고 있자면, 과연 이 위기에서 교훈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정말로 있기나 한 건지 회의가 들곤 합니다. 그보다는 어떻게든 지금 이 상황을 모면해서 손실을 만회한 뒤, 예전과 같은 샴페인 파티를 다시 즐겨보자는 심산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듭니다.

그 까닭은 이렇습니다. 지금의 언론 기사들을 잘 들여다보면, 한편으로는 무분별한 자유화, 탈규제, 민영화, 금융 부문의 비대화 등 신자유주의 체제의 근본적인 문제점들을 지적하는 듯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경제면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 사회, 국제면까지 모두 벤 버냉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이나 헨리 폴슨 같은 미국 정부 당국자나 ‘리만 브러더스’(이명박 대통령과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 등의 입만 쳐다보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들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일희일비하고 비판하고 전망을 내보냅니다. 심지어 워렌 버핏 같은 국제적인 금융 투기꾼이 했다는 “모두가 욕심낼 때 두려워할 줄 알고, 모두가 두려워할 때 욕심을 낼 줄 알아야 한다”는 말 한마디를 놓고 ‘버핏 따라하기’가 맞느니 틀리느니 토론을 벌입니다.

▲ 조선일보 10월15일자 5면

물론, 2년 전에 이번 금융 위기를 정확히 예견했다는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나 그동안 금융 자본주의에 대해 꾸준히 비판해왔던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 등의 시각들도 실리긴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가입한 펀드가 4분의 1토막 나고, 주식이 휴짓조각이 될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귀에는 그런 얘기가 제대로 들어오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언론은 그분들의 고통만 크게 부각합니다. 그러니 빨리 제대로 된 대책을 내놔서 다시 예전처럼 파티를 하게 해달라는 거지요.

이는 제대로 된 교훈이 아닙니다. 우리가 교훈을 찾기 위해 정말로 주목해야 할 사람들은 지난 수십 년 간 신자유주의 체제로 인해 ‘바닥으로의 질주’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개방화, 민영화, 자유화, 고용 유연화, 규제철폐로 인한 고통과 폐해를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던 사람들 말입니다. ‘비교우위’니 ‘자유무역’이니 하는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논리를 들이대는 사람들이 강요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프로그램 때문에 멀쩡한 논밭을 갈아엎고 커피, 사탕수수, 담배 같은 이른바 ‘돈이 되는’ 농업으로 바꾼 뒤, 투기세력들의 농간으로 세계 식량가격이 폭등하자 꼼짝없이 굶어죽게 생긴 아이티, 캄보디아, 이집트, 필리핀, 라이베리아 등의 국민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은 비옥한 농토를 가진 덕분에 예전에는 적어도 끼니는 거르지 않았으나, 이제는 폭도와 식량난민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또한 수세기 동안 선조들이 사용해온 씨앗을 재배하기 위해 앞으로는 다국적기업에게 고가의 로열티를 지불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 아래서 다국적기업 카길의 본사 건물을 불태웠던 인도의 농민들도 있습니다. 하루 12시간씩 1년 내내 휴일도 없이 뼈빠지게 일하고도 문자 한 통으로 해고통지를 받아야 하는 한국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상수도 민영화로 과거보다 비싼 요금을 내고도 수시로 물 공급이 끊겨 고통받는 아르헨티나, 남아공, 필리핀 주민들이 있습니다. 민영화된 의료보험 시스템에서 제외돼 아무리 아파도 진통제로 버텨야하는 미국의 5천만 ‘신자유주의 난민’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시장의 실패’는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한 2008년 9월 14일에 갑자기 찾아온 게 아닙니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이 본격화된 2007년도 아닙니다. 우리가 100년 만의 대위기라고 호들갑 떨기 훨씬 전부터 이미 그들의 삶은 항상 위기였고, 시장 만능주의는 저주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고 언론이 신자유주의의 가장 큰, 그리고 진정한 피해자들에게 주목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들의 고통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들의 경험을 배우는 것이 다시는 우리가 이런 고통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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