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째 한국은행이 난타를 당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2일 지면에 이어 3일 지면에 ‘우물 안의 한은’이란 제목의 시리즈 기획기사를 연재했다. 한국은행이 전통적인 ‘물가안정’이라는 목표에서 벗어나 보다 적극적인 통화정책을 펴야 한다는 주장이 핵심이다. <조선일보>의 이러한 주장은 일정 부분 긍정적 취지를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현 시점에서 보다 세심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조선일보>는 3일1면 기사에서 “올 들어 수출·내수가 모두 감소하고, 물가가 0%대 중반으로 떨어지는 ‘3저(低)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 경제 회복을 위해서는 한계에 도달한 정부의 재정정책 이외에 한국은행이 적극적으로 나서 창의적인 통화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조선일보>는 이어 6면에 <‘물가 안정’ 집착 벗어나 미Fed(중앙은행)처럼 경제 살리기 팔 걷어붙여야>라는 제목의 기사를 배치했다. 여기서 <조선일보>는 2012년 5월 이후 물가상승률이 한국은행의 물가안정목표제가 규정하고 있는 기준 이하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 다른 국가의 중앙은행들이 디플레이션 극복 등을 위해 보다 적극적인 통화신용정책을 펴고 있다는 점, 돈을 풀더라도 돈이 돌지 않는 ‘유동성의 함정’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 등을 들어 한국은행의 적극적 행보를 주문했다.

<조선일보>는 또 6면 하단에 금리를 인하할 경우 가계부채 문제가 심각해질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을 배치하기도 했다. <조선일보>는 이 기사에서 “한은의 정책목표가 가계부채의 총량 관리가 아닌 가계 부채의 질을 개선하고 채무자의 상환능력을 높여주는 방향에 맞춰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면서 “채무자의 이자 부담을 줄이고 경기 활성화로 소득을 높일 기회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조선일보>는 또 금융감독원 등을 통한 미시 감독 강화에 대한 한국은행의 협조를 주문하면서 집값이 떨어질 경우 하우스푸어 등 채무자들과 금융회사의 부실이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도 내놓았다.

▲ 조선일보 3일자 6면.

종합적으로 볼 때, <조선일보>의 이번 기획은 정부의 경기부양책이 제대로 먹히지 않는 것에 대한 움직임으로 보인다. 정부는 수차례에 걸친 부동산 대책 발표를 통해 자산가격의 상승과 이를 통한 내수진작을 추동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실제로 확인된 경제지표들을 보면, 정부 대책의 ‘약발’이 먹히지 않는다는 것이 확인된다. 부동산 가격의 상승이 아니라 시장의 냉소적 반응이 늘어났고 전월세 시장 안정에도 실패했다. 수출, 내수가 감소하고 물가가 0%대 중반까지 하락하는 심각한 현상까지 나타났다. 특히 2월 소비자물가의 경우 0.5% 상승했는데 담뱃값 인상에 따른 0.58%가 포함돼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마이너스 물가를 기록한 것이라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물론 이러한 지적에 정부는 저물가의 근본적 원인은 유가하락에 있다는 입장이다. 국제유가 하락은 저물가 뿐만 아니라 세수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난 3일 국회예산정책처가 발간한 ‘경제동향&이슈’에 따르면 국제유가 하락 때문에 유류 관련 국세가 전년보다 1364억원 감소했을 것으로 추산했다. 그러나 유가하락이라는 측면을 고려해도 인플레이션 압력을 높일 필요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이에 대해 “최근 유가 하락은 공급 측면에서 기인한 것이므로 우리에게는 호재”라고 발언한 바 있는데 결국 공격적이고 선제적인 대응에 나서야 한다는 인식을 드러낸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이런 조건들과 더불어 역사적 맥락을 살펴봤을 때 <조선일보>의 주장대로 한국은행이 적극적인 통화신용정책에 나서야 할 당위가 없는 것은 아니다. 과거 한국은행은 물가안정이라는 목표의 쟁취를 위해 중앙은행 독립성을 최우선 가치로 여겨왔으나 세계적인 경제위기 속에서 중앙은행이 전통적인 역할에서 벗어나 목표의식을 갖고 대응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힘을 얻어온 것이 사실이다. 한국은행 역시 이 점을 잘 알기 때문에 그간 금리정책의 결정 등의 배경을 설명할 때 국제금융시장의 움직임이나 가계부채, 고용지표 등을 상세히 언급해왔다. 그러나 금리정책에 대한 이런 ‘고려’를 넘어 물가안정목표제나 준칙주의의 폐기 등이 필요하다는 지적까지 나온바 있다.

그런데 한국은행 역할의 변화를 요구하는 이런 주장들이 과연 <조선일보>가 주장하는 것처럼 ‘금리인하’의 결정으로 이뤄질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리적 구멍이 있다고 평가할 수 밖에 없다. 우선, 이미 기준금리 2.0%의 현 상황에 대해서는 ‘전시금리’라는 표현까지 나오고 있다는 걸 간과해서는 안된다. 지난해 말 한국은행이 2.0%로 기준금리를 인하한 것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수준으로 금리를 맞추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둘째로 여전히 회자되고 있는 가계부채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 문제다. 금리인하는 가계부채의 총량을 늘리는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매우 크다. <조선일보>는 이러한 지적에도 경기가 회복되면 가계부채의 질을 좋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그건 일종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게다가 이런 주장은 경기가 회복되지 않는 한 금리를 영원히 내려야 한다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될 수밖에 없다.

박정희 시대에 재무부 장관과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맡아 큰 역할을 한 남덕우 전 부총리는 1994년에 남긴 글을 통해 중앙은행의 형태를 크게 다섯가지로 나누었다. 첫째는 정부로부터 거의 완전히 독립돼있는 독일연방은행(Bundesbank)과 같은 형태이며, 둘째는 미국의 연방준비은행(FRB)처럼 정부 내에서 독립돼있는 준독립형, 셋째는 뉴질랜드준비은행처럼 정부가 제시하는 특정 목표에 대해 책임을 지는 계약형, 넷째는 정부가 지휘명령권을 갖고 있는 일본은행과 같은 정부재량형, 다섯째는 한국은행과 같은 정부종속형이다.

물론 이러한 구분은 1994년이라는 시점을 고려해야 의미가 있는데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교리와 정부정책에 대한 불신 속에서 한국은행 독립성이 보다 강력하게 보장되는 형태로 개혁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남덕우 전 부총리가 한국은행을 ‘정부종속형’으로 분류한 것은 한국은행의 통화신용정책이 ‘재무부 남대문출장소’로 불릴만큼 정부정책에 종속돼있었다는 점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해야 한다. 한국은행법의 개정 등으로 1997년 이후 독립성이 제고됐다고는 하지만 한국은행의 통화신용정책은 이후에도 정부에 종속적인 형태로 귀결되기 일쑤였다. 이주열 총재의 전임인 2010년 4월 취임한 김중수 총재 시절에도 정부에 독립적이지 못한 한국은행의 정책결정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25일 오전 서울 소공동 한국은행 본점에서 열린 경제동향간담회에 참석해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런 상황을 간과하고 단지 ‘금리인하’만 외치는 것은 결국 세 가지 정도의 문제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그 첫째는 <조선일보>의 기사가 정부 부양책의 효과를 뒷받침하고 재계의 민원을 들어주기 위해 작성됐다는 의심을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중앙은행 체제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가 아니라 단지 ‘금리인하’를 결정하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처럼 몰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취임 이후 정부 관계자들과 신경전을 벌여온 이주열 총재 체제의 한국은행을 ‘길들이기’ 하려는 시도로도 읽힐 수 있다는 점이다. 한국은행 총재 자리에는 대개 경제관료 출신이나 대통령 경제수석 등을 지낸 유력인사가 오르기 마련인데 이주열 총재는 한국은행 출신으로 정부의 통제(?)에서 다소 멀어져 있다. 셋째는 결국 <조선일보>의 문제제기를 선의로 받아들이고 대안을 마련하려면 중앙은행 체제의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변화가 불가피한데 이는 현 시기에 사실상 불가능한 과제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자신의 저서에서 독특한 중앙은행론을 내놓은 바 있다. 현재 무자본 특수법인인 한국은행의 형태를 유지하되 금융통화위원회를 한국은행 내부에 두는 것이 아니라 정부기구화 해야 된다는 게 그것이다. 강만수 전 장관의 주장은 주요한 통화신용정책을 결정하는 금융통화위원회와 대당하는 미국의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정부기구이며 실제 통화를 공급하는 각 주의 연방준비은행이 정부로부터 독립돼있다는 데에서 착안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그 자체로 어느 정도의 당위가 있지만 수십년간 이어온 체제를 뒤집어야 한다는 점에서 비현실적인 측면이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유사한 관점에서 한국은행의 근본적 역할과 이를 둘러싼 구조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중앙은행이 더 적극적이고 강력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장에 긍정적으로 평가할 부분이 있다고 할 때 한국은행에 그러한 역할을 주문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뒷받침 할 수 있는 조건들을 마련해주는 게 상식이기 때문이다. 이런 복잡한 문제에는 눈을 감고 쉬운 주장만 되풀이하는 것은 실패를 반복할 뿐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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