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위원장 현병철, 이하 인권위)가 흔들린다. 보수정부 이후 제 역활을 못 한다는 비판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최근에는 임계점을 지나 아예 무용론까지 제기되고 있다. ‘ICC 등급 보류’ 판정에 이어 ‘대북전단 살포는 표현의 자유’라고 결정하더니, UN 인권규약 이행실태 보고서에는 세월호 참사, 언론 자유 위축, 통합진보당 해산 등 박근혜 정부에 불리한 사안들을 아예 삭제해 보고한 것으로 드러났다.

국가인권위의 이러한 파행은 독단적 인선 절차를 통해 무자격 인사들이 대거 인권위에 포진하게 된 것이 근원적 문제라는 지적이 높다. 실제, UN 인권규약 이행실태 보고서 삭제 배후는 박근혜 대선 캠프에서 요직을 지냈던 유영하 상임위원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극우적 행보를 보였던 기독교 인사를 임명하고, 뉴라이트 성향의 법조인까지 인권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를 견제해야 할 야당마저도 시원치 않다는 점이다. 정부여당과 마찬가지로 인권위원을 임명함에 있어 야당도 독단적 인선 절차를 밟아 논란이 되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2일(어제) 의원총회를 열어 ‘야당몫’의 인권위 상임위원으로 이경숙 전 한국여성단체연합 대표를 추천하기로 의결했다. 이 과정에서 인권활동가들은 인선위원 선정과 자격기준 등 인선절차 마련을 위한 면담을 수차례 요청했지만 거부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 국가인권위제자리찾기공동행동과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소수자인권위원회는 3일 오전11시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새정치민주연합의 불투명한 인권위원 인선에 대해 규탄했다ⓒ미디어스

국가인권위제자리찾기공동행동과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소수자인권위원회는 3일 오전11시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새정치민주연합이 투명한 인선절차나 기준 없이 인권위 상임위원을 정했다”며 “인선위원에는 외부 인사가 없었을 뿐 아니라, 공개적이고 투명한 자격기준도 없었다”고 비판했다. 또한 “‘인권위원을 공모했다’는 것만으로 면피가 되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국회는 이날 오후 3시 본회의에서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이경숙) 선출안>을 처리할 계획이다. 기자회견 사회를 본 명숙 인권운동사랑방 명숙 활동가는 “국회 의결이라는 것이 형식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며 “여야 몫에 따라 그냥 자동적으로 처리된다. 이 자체도 문제”라면서 “시민사회 면담을 거부한 채 인권위원을 임명하려는 새정치민주연합은 ICC권고 이행의지가 없는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명숙 활동가는 “ICC가 인권위에 대한 등급을 보류한 이유는 투명한 인선을 하라는 것 때문”이라며 “야당조차 이렇게 밀실인사를 한다면 국제사회 망신일 뿐 아니라, 국회가 인권위를 제대로 세울 의지가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새정치민주연합이 내정한 이경숙 씨는 청와대와 새누리당 인선에 비하면 자격이 없다고 이야기할 수 없으나 문제는 투명한 인선절차 없이 결정을 누가 인정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제1야당마저 ICC 권고 이행 의지가 없다는 것에 분노를 느낀다”고 말했다. 앞서, 국제조정위원회(ICC)는 인권위에 대한 등급을 두 차례 보류하면서 인권위원 후보자 선정과 자격심사에 대해 문제를 지적한 바 있다.

국제민주연대 나현필 활동가는 “현병철 위원장이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인권위는 전 세계 모범이라는 칭찬까지 받았었다”며 “그러나 이명박·박근혜 정부 들어 인권위 여당 몫에 부적격 인사가 계속되면서 ICC 등급보류까지 이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나 활동가는 “시민사회는 등급보류라는 국제사회가 내려준 판단을 기회삼아 제대로 된 인권위원을 뽑아달라고 요구해왔지만, 어이없게도 새정치민주연합이 상임위원 인선을 이렇게(밀실·독단)해버렸다”고 개탄했다. 그는 “그동안 새정치민주연합은 현 정부와 여당을 공격에 인권위 문제를 자주 언급했다. 앞으로 청와대와 여당의 인권위원 선임에 있어서 제대로 된 비판을 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장애인차별철폐연대 문애린 활동가는 “새정치민주연합은 공모를 했다고 하지만 자기 당 홈페이지에만 공고를 냈다”며 “그마저 사실상 생색내기용”이라고 지적했다. 문 활동가는 “또한 ‘기준에 따랐다’고 주장하지만 어떤 기준인지는 알 길이 없다. 과연 투명하게 뽑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민변 소수자위인권위원회 김동현 변호사는 “인권위는 인권침해로부터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특성상 시민사회와 협치가 매우 중요하다”면서 “인권위원 선출에 대한 것은 국회의 재량권의 문제가 아니라, 헌법으로부터 나온 의무라고 해석하는 게 옳다”고 강조했다. 이어, “새정치민주연합이 현병철 체제의 인권위와 무엇이 다른가”고 비판했다. 이경숙 내정자는 오는 7일 임기가 끝나는 '야당 몫' 장명숙 인권위 상임위원의 후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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