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에 ‘중도적 행보’로 가장 큰 정치적 이득을 본 사람은 단연 박근혜 대통령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경제민주화’와 ‘100% 대한민국’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인혁당 사건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로나마 사과를 하는 등 오늘날의 박근혜 대통령의 모습을 떠올릴 수 없을 정도의 중도화 전략으로 ‘재미’를 봤다.

안철수 새정치민주연합 전 대표 역시 이러한 중도적 이미지 정치의 수혜자이다. 안철수 전 대표는 대선후보로서 국민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동안 2012년 민주통합당과 새누리당 사이의 공간에서 ‘경제는 진보, 안보는 보수’라고 표현할 수 있는 행보를 통해 국민적 신뢰를 얻었다.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 선별적 복지와 보편적 복지의 사이에서 중도적 입장을 취한 것 역시 이런 행보의 연장선상이었다. 이를 통해 안철수 전 대표는 유력한 대권주자로서의 지위를 굳혀나갈 수 있었다.

최근 야권 유력 대권주자들의 모습을 보면 이런 ‘중도화’를 통한 이미지 전략에 상당한 무게를 놓고 움직이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지난 1일 삼일절을 맞아 충남 천안시 병천면에 있는 유관순 열사 추모각을 참배해 화제가 됐다. 소위 진보진영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정치인으로서는 드문 행보였다.

유관순 열사의 경우 가장 유명한 독립운동가 중 한 사람이라는 역사적 지위 때문에 논란에 시달리는 처지다. 한쪽에서는 ‘뉴라이트 사관’ 등에 의해 유관순 열사가 비하되고 있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고, 또다른 한쪽에서는 보수주의자들이 유관순 열사를 과도하게 애국주의적 국가주의적 마케팅에 이용하고 있다는 비판을 내놓는다. 문재인 대표는 유관순 열사를 추모하며 “윤봉길 열사, 김좌진 장군 등 지방의 독립운동 역사가 점점 잊혀가는 것 같다”면서 “유관순 열사는 작년에 (한국사) 고교 교과서에서 아예 빠졌는데, 출판사는 ‘지면이 부족했다’고 변명하고 있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낸 것은 이러한 맥락이 반영된 것이다.

▲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가 2일 오전 서울 은평구 성암교회 내 바오밥나무 카페에서 열린 경제정당의 길 간담회에서 박수를 치고 있다. (연합뉴스)

이 외에도 문재인 대표는 취임 직후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묘소를 참배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실제 참배에 나서는 등 중도적 지향의 파격적 행보를 반복하는 있는데 이는 2012년 대선의 전략전술에 대한 반성적 평가가 있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당시 문재인 대표를 중심으로 한 소위 당 내 친노그룹은 보수언론 등에 의해 ‘강경파’로 규정되면서 정치적 함정에 빠졌었다. 제1야당의 대선후보로서는 이례적일 정도로 진보적인 공약들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는 ‘중도’를 이미 선점하고 있었던 안철수 전 대표를 의식한 것이기도 했겠지만 다분히 ‘야권연대’를 염두에 둔 행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당시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나 정의당 심상정 원내대표 등을 지지하는 유권자층에게 호소력을 갖추기 위한 계산된 행보였던 측면도 다분했다.

그러나 이석기 의원 관련 사건이 벌어지고 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에 대한 해산을 결정하면서 더 이상 ‘야권연대’를 쉽게 말할 수 없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게다가 앞서 언급한대로 2012년 나름 진보적이었던 문재인 대표의 색깔로 2017년 재현될 보수진영 후보와의 1대 1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지에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문재인 대표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변화된 정치’를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 중도적, 통합적 행보를 연출할 수밖에 없게 된 셈이다.

문재인 대표의 이러한 행보는 일단 긍정적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일 여론조사 전문업체 리얼미터에 따르면 전국의 유권자 2500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문재인 대표는 차기 대권주자 지지도에서 27%를 얻어 8주째 1위를 놓치지 않고 있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11.8%, 새정치민주연합 소속 박원순 서울시장은 11.6%의 지지율을 각각 얻었는데, 이 둘의 지지율을 합쳐도 미치지 못할 만큼 문재인 대표에 대한 지지는 압도적이다. 이 조사는 전화면접(CATI) 및 자동응답(ARS) 방식으로 무선전화(50%)와 유선전화(50%) 병행 RDD 방법으로 조사했고, 응답률은 전화면접 방식은 17.5%, 자동응답 방식은 7.0%였다.

물론 야권의 중도화 전략이 늘 부딪히듯 문재인 대표의 이런 행보에 우려를 제기하는 목소리도 있다. 중도화에 따른 이미지 전략이 모든 사람, 모든 경유에 적절한 해결책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는 박원순 서울시장의 예다. 당선 직후 컨벤션효과에 의해 야권의 대권주자 중 지지율 1위를 얻기도 했던 박원순 시장은 이번 조사에서 김무성 대표에게도 밀렸다. 그간 박원순 시장은 지나치게 진보적인 행보를 거듭해 비판을 받은 게 아니라 오히려 서울인권헌장 논란 등에서 보듯 어설프게 중도화되고 있다는 지적에 노출됐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이러한 결과가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 고민이 필요하다.

▲ 박원순 서울시장인 1일 보신각에서 열린 3.1절 기념 타종행사에서 참석자들과 만세삼창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원순 시장의 경우 인권운동가 출신으로 근본적 차원에서 보수세력의 불신을 사고 있다. 박원순 시장의 국가관이나 안보관이 의심스럽다는 식의 흑색선전이 알게 모르게 커튼 뒤에서 횡행하고 있는 실정이며, 새누리당은 ‘박원순 저격 특위’에 준하는 기구까지 만들어 놓은 상황이다. 때문에 박원순 시장에 대한 중도화가 성공적으로 수행된다면 중도층에 안정감을 주는 결과로 이어지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오히려 속마음을 숨기고 있는 음험한 캐릭터라는 마타도어가 강화될 수도 있는 형국이다. 결국 이는 진보도 잃고 중도도 잃는 비극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박원순 시장의 입장에서는 본래 자기 색깔을 버리는 방식의 캠페인보다는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고 보여줄 수 있는 방식으로 야권 내의 지지층을 확고하게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

반면 문재인 대표의 경우 일단 이전 대선에서 야권 전체를 대변했던 후보였다는 점과 현재 제1야당 전체를 책임져야 하는 대표라는 점 등이 작용해 긍정적인 효과를 얻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 안주해서는 안되고 중도적 이미지 전략을 통해 무엇을 관철시킬 것인가를 직접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행보를 이어나가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소득주도 성장론’ 같은 이슈는 좋은 사례다. 단지 기계적으로 중도를 선택해 선거공학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겠다는 생각이 전부가 아니라 이를 통해 무엇을 하겠다는 점이 분명해야 ‘진정성’ 논란 등에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 벌써부터 보수언론이 “선거를 위한 전술적 용도”를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선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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