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주민등록번호까지 인터넷에 떠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행정편의를 위해 그냥 참으라고 한다. 정보통신 강국 한국의 민낯이다.

약 1년 전, 사회 전체가 KB국민·농협·롯데 등 카드사들의 개인정보 유출로 떠들석했다. 전 국민의 주민등록번호가 유출됐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라는 전문가들의 설명이 잇따랐다. 당황한 정부는 당시 모든 것을 바꿀 것 같은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결과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초라하다. 주민등록번호체제는 그대로 유지하고 유출된 번호 역시 매우 제한적으로 바꿔주겠다고 결정했을 뿐이다. 국회는 1년이 지나서야 주민등록 개편 관련 법 개정안 논의에 들어가려 하고 있다.

27일 국회에서는 새정치민주연합 진선미·정청래·민병두 의원과 진보네트워크센터 공동주최로 <개인정보 유출사고 1년, 주민등록번호제도 개편 논의 검토 및 비판> 토론회가 개최됐다. 사회를 맡은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토론회에 앞서 간통죄 위헌판결을 언급하며 “‘국가가 어느 정도까지 개인생활에 개입해야 하는가’에 대한 60년이 넘는 싸움에서 성적자기결정권을 보호해야한다는 결정을 내렸다”며 “주민등록번호 개편도 같은 물음이 제기되고 있는 사안”이라고 설명했다.

▲ 27일 국회에서는 새정치민주연합 진선미·정청래·민병두 의원과 진보네트워크센터 공동주최로 '개인정보 유출사고 1년, 주민등록번호제도 개편 논의 검토 및 비판' 토론회가 개최됐다ⓒ미디어스

한상희 교수는 “국가가 관리자 지위로서 국민들에게 일련번호를 부여하고 생활이나 행동, 생각을 통제·관리하는 것이 주민등록번호”라며 “이제 ‘나는 자유인이다’라고 선언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헌법재판소가 개인들의 성적자기결정권을 보호하는 판결을 했듯, 정부와 국회도 개인의 정보자기결정권을 인정하는 내용으로 주민등록체제를 개편해야한다는 지적이다.

“언론들은 주민등록번호 변경할 수 있을 것처럼 보도했는데, 사실은”

발제를 맡은 신훈민 변호사는 “얼마 전 대통령 주민등록번호가 인터넷에 노출돼 있다는 사실이 보도됐다”며 “지난 1년 간 정부는 무엇을 한 것인지 의문”이라며 말문을 열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주민번호는 13년 전 국내 모 리조트의 이용객 명단에 포함돼 유출된 바 있다. (▷링크) 카드사 개인정보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논란이 커지자 지난 해 1월, 박 대통령은 “한번 유출되면 2~3차 피해 위험성이 있으니 다른 대안을 검토하라”라고 지시했다. 그 후, 주민등록번호 제도 개편에 착수한 안전행정부는 지난 12월 △현 주민등록번호체계 유지 및 △주민등록번호 제한적 변경 허용을 담은 <주민등록법 일부개정안>을 국무회의에서 의결하고 국회에 제출했다.

신훈민 변호사는 “언론들은 안행부의 보도자료를 그대로 받아서 유출된 주민등록번호를 변경할 수 있는 것처럼 보도했다”며 “하지만 요건이 엄격해 사실상 변경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관련기사 : “죽을 정도 아니면…” 주민번호 변경 기준에 논란)

<주민등록법 개정안>(정부입법)에 따르면, 주민등록번호 변경이 가능한 사례는 ‘주민등록번호가 유출로 인해 생명·신체에 위해 또는 재산에 대한 중대한 피해를 입거나 입을 우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사람’과 ‘성폭력 관련 피해자로서 주민등록번호의 유출로 피해를 입거나 입을 우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사람’으로 한정된다. 특히, 변경 절차 또한 시장·군수·구청장에 신청하고 행정자치부에서 설치된 ‘주민등록번호변경위원회’에서 심사를 거쳐 과반수 출석과 과반수 찬성으로 결정하도록 해 까다롭다.

신훈민 변호사는 “‘유출된 주민등록번호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인터넷상에 주민등록번호가 유출되면 회수할 수 없다는 전제 하에서 출발해야 한다”며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의 1차적 책임은 정부”라고 지적했다. 신 변호사는 “40년 이상 유지된 주민등록번호 제도를 급격하게 바꾸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주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논의(목적별 번호 도입)를 중단해서도 또한 실효성 없는 개정안을 통과시켜서도 안 된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발제자였던 이혜정 변호사(법무법인 동화)는 “‘생명·신체에 대한 위해’와 ‘재산에 대한 중대한 피해’라는 요건은 기준이 모호할 뿐 아니라, (변경에 대한)예측가능성도 떨어진다”며 “또한 성폭력 피해자의 경우 2차 피해의 우려도 발생할 수 있어 세밀한 관리 절차가 요구된다”고 지적했다. 이 변호사는 “주민등록번호 변경의 필요성은 유출에 따른 국민 불안감을 해소하고 향후 피해를 예방하는데 그 의미가 있다”고 강조한 뒤, “이 같은 현실적인 측면을 도외시한 개정안은 국회 논의과정에서 수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검경, 주민번호 변경 허용에 대한 우려 공식적으로 표명”

이날 토론회에 참여한 패널들은 현 주민등록번호에 대한 전면적인 개편과 목적별 번호로의 변경이 필요하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무엇보다 안행부가 구성했던 ‘주민등록번호 개선연구 자문회의’에 참여했던 김기중 변호사는 자문회의가 주민등록체계에 대한 전면적인 개편을 요구했다고 말했다.

김기중 변호사(법무법인 양재)는 “자문위원들 다수가 비용이나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주민번호에 대한 전면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이야기를 해서 놀랐다”며 “내부적으로 구체적인 안까지 제시했었는데, 마지막 회의에서 갑자기 사실상 아무런 변경을 하지 않겠다고 했던게 납득이 안 간다”고 밝혔다. 검경은 ‘신분세탁’의 우려를 제기하며 주민등록번호 변경 허용에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김 변호사는 “신분세탁의 우려가 있다면, 그것은 또 다른 논의를 통해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설명했다. 개인정보 유출로 인한 국민들의 불안감 해소와 신분세탁 우려는 별개의 문제로 다뤄야 한다는 주장이다.

국가인권위원회 김원규 사무관은 “인권위의 입장은 줄곧 ‘주민등록번호는 행정업무에 한정해서 써라’, ‘다른 영역에서는 목적별 식별 체계를 도입하라’, ‘주민등록번호의 목적 외 사용을 금지하라’였다”며 “주민등록번호의 목적 외 사용을 금지하지 않으면 현행대로 하는 것이 더 편하니 다른 공공영역에서 목적별 자기체계를 도입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국회 입법조사처 심우민 조사관은 고의적인 개인정보 유출 사고와 관련해 “사용가치가 없어야 벌어지지 않는다”며 “그런데 우리나라는 거꾸로 가고 있다”고 꼬집었다. 심 조사관은 ‘마이핀’에 대해서도 “정부는 지금의 주민번호처럼 생년월일로 안 돼 있기 때문에 별로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주민등록번호는)사용가치가 높기 때문에 유출 및 악용가능성은 언제든지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안행위 행정자치부 주민과 김종한 과장은 “<주민등록법 개정안>에 따르면, 주민등록번호 변경 허용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들 예측하시는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김 과장은 “주민등록번호 변경을 허용하게 되면 큰 혼란이나 예측하지 못했던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제한적으로 하면서 추이를 지켜보자는 측면이 컸다”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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