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만 <트와일라잇>에 열광하라는 법은 없다. 중년층도 판타지를 향유할 권리가 있다는 걸 보여준 것이 소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열풍이었다. 서구에서는 소설을 흉내 내어 BDSM을 따라 하다가 수갑을 풀지 못해 소방관을 부르는 사건이 급증했다. 이전에는 빈도수가 많지 않던 일반인이 수갑에 끼인 사고가, 2012년 소설 출간 이후 급증했다는 해외 뉴스를 보면 아이들 못잖게 어른들도 판타지에 쉽게 경도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 완벽한 억만장자의 총애를 받는 21세기 버전 신데렐라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여기에 ‘19금’이라는 딱지가 붙는 건 두 남녀 관계가 플라토닉한 사랑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관계가 노골적으로 묘사되어서다.

소설에 비해 영상이 비교적 순화된 건 이 영화의 메가폰을 잡은 감독이 남성이 아니라 여성 감독인 덕일 게다. 남녀의 육체적인 교감이 에로틱하고 감각적으로 와 닿기보다 한 편의 MV를 보는 것처럼 유려하게 흐르는 데엔 샘 테일러 존슨 감독의 영상 취향이 반영된 듯하다. 아니 어쩌면 남녀의 육체적인 적나라함이 차지해야 할 자리를 MV같은 유려한 영상으로 대체한 건 여성 감독의 판타지적 전략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판타지를 자양분으로 삼은 영화다. 백마 탄 왕자가 지구인으로는 도저히 안 되겠는지 <트와일라잇>에서는 흡혈귀가, <별에서 온 그대>는 도민준이 백마 탄 왕자 역할을 담당한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백만장자도 부족해서 억만장자가 백마 탄 왕자가 되는데, 문제는 통상적인 판타지와는 달리 백마 탄 왕자가 찜한 신데렐라에게 요구하는 것이 BDSM(결박, 구속, 사도마조히즘 성행위)이란 점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영화는 유려한 영상으로 BDSM을 묘사한다. 변태적 가학 행위를 당하는 가운데서도 아나스타샤(다코타 존슨 분)는 고통스러운 얼굴이 아니라, 환희 가운데서 즐거운 고통을 추구하는 듯한 태도로 관객을 찾아온다.

실제 가학 행위라면 관절이 꺾이고 피가 튀는 등 무척이나 고통스럽겠지만, 영화는 아나스타샤의 육체에 그 흔한 멍자국 하나 드러내지 않는다. 사디즘과 마조히즘을 달달한 백마 탄 왕자 판타지, 신데렐라 콤플렉스라는 당의정으로 과대포장한 결과다.

이런 사디즘과 마조히즘을 크리스찬과 아나스타샤의 계약이라는 미명 아래 그럴 듯하게 포장하고 헬리콥터 투어와 명품 카 선물 공세로 무마하려 들지만, 이는 명백히 물질을 대가로 여성을 성 노예화하는 계략일 뿐이다.

억만장자 크리스찬(제이미 도넌 분)이 사디즘에 매달리는 이유가 어린 시절에 당한 정신적인 외상 때문이라는 걸 영화는 암시하지만, 정신적 외상을 극복하지 못하고 변태적인 관계에만 집착한다는 건 크리스찬이 외적으로는 어른이지만 정신적으로는 미성숙한 ‘어른 아이’라는 걸 보여준다.

아나스타샤 이전에도 크리스찬의 BDSM의 세계를 거쳐 간 여자가 15명이라고 하니, 영화에서 크리스찬이 ‘놀이터’라고 부르는 BDSM이 벌어지는 장소는 크리스찬의 쾌락을 위해 여자들이 고통을 당했을 희생의 장소임에 분명하다. 세련된 영상미로 관객을 유혹하려 든다 해도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돈을 빌미로 여성을 유혹하고 농락하는 억만장자의 여성 억압으로밖에 볼 수 없다.

크리스찬의 문제점은 하나 더 있다. 영화에서 그는 “사랑을 하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선언한다. BDSM의 대상인 여성은 크리스찬의 쾌락을 위해 그가 가하는 고통을 참아야 하는 ‘일회용 소모품’에 불과하다. 여성을 사랑하는 대상이 아니라, 즉 목적이 아니라 쾌락을 위한 소모품, 수단으로밖에 보지 못하는 크리스찬의 사고관을 관객은 우아하게 과대포장된 영상 뒤에서 읽어내고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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