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망신주기’위한 언론보도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논두렁 시계'라고 불린 스위스 산 피아제 명품시계였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가 이뤄졌을 당시, 권양숙 여사가 “(명품시계를)논두렁에 버렸다”고 검찰에 진술했다는 사실이 언론에 흘려져 엄청난 파문이 일었다. 인터넷에는 “봉하마을에 명품시계 찾으러 갑시다”라는 글들이 올라왔고, 노 전 대통령은 혐의 여부와 상관 없이 바로 조롱의 대상이 됐다. 그리고 며칠 뒤, 노 전 대통령은 사망했다.

▲ 2월 25일자 '경향신문' 1면 기사

하지만 이후 그런 진술이 없었음이 확인됐다. 그리고 사건으로부터 6년여가 흐른 지금, 이인규 당시 대검 중수부장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른바 '논두렁 시계'는 국정원이 만들어 언론에 흘렸다고 폭로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검찰조사 과정에서 명품시계 논란에 대해 ”시계 문제가 불거진 뒤 (권 여사가)바깥에 버렸다고 합디다“고 진술했다. ‘논두렁’은 명백히 각색된 내용이라는 얘기다. 그리고 그는 ”논두렁 얘기는 나오지도 않았다. 그런데, (국정원이) 말을 만들어 언론에 흘렸다“고 주장했다.

국정원의 농단에 놀아난 언론, 어땠나

이인규 당시 대검 중수부장의 증언은 가히 충격적이다. 국정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 검찰 수사에 개입한 것을 넘어 특정한 방향으로 여론을 유도하기 위해 공작까지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검찰 역시 국정원으로 인해 잘못된 내용이 보도됐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바로잡지 않은 셈이다. 언론은 국정원의 농단에 동참하거나 최소한 놀아났다는 뜻이기도 하다.

당시, 처음 ‘의혹’을 제기한 매체는 <연합뉴스>였다. <연합뉴스>는 2009년 3월 말, 박연차 회장이 명품 시계 구입에 관심이 많았다고 전하면서 “일각에서는 박 회장이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도 고가의 시계를 생일선물로 주는 등 ‘시계로비’를 벌인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됐다”고 보도했다. 해당 기사에 로비를 통해 박 회장이 어떤 것을 얻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 2009년 4월24일자 조선일보 기사

묻혀진 듯 했던 ‘명품시계’ 논란은 그 해 4월 22일 ‘검찰 관계자’에 의해 다시 회자되기 시작했다. 검찰 관계자는 언론을 통해 박연차 전 회장이 “2006년 9월 노무현 전 대통령 회갑을 맞아 명품 시계 2개를 대통령 부부에게 선물했다”는 진술을 받아냈다고 밝혔다. 이때, ‘스위스 P사 명품시계’와 ‘보석이 박혀 있어 개당 1억 원’짜리 라는 내용이 등장했다. 주목할 것은 검찰이 언론에 이런 내용을 슬쩍 흘린 시점이다.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당시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600만 달러를 수수한 혐의에 대해 조사를 받고 있었지만, 검찰은 구체적인 증거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수사 결과가 지지부진하며, ‘정황으로만 수사를 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던 시점에 ‘명품시계’가 언론에 흘려졌다.

검찰이 명품시계와 관련해 구체적 정보를 노출시킨 때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가 난관에 부딪혔을 때였고, 그 효과는 대단했다. 이후 명품시계에 대한 언론의 관심은 극에 달했다. <조선일보>는 4월 24일 <국내 매장에 5~6개뿐… 문재인 “망신주자는 거냐”>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그동안 ‘P’라고만 보도됐었던 시계가 ‘피아제’였다는 것을 명시하고, 같은 시계의 사진을 공개했다. 다분히 악의적인 노출이었다. 다른 언론들 역시 “135년 역사 스위스 피아제사 제품…30억 원 넘기도”와 같은 확인되지 않은 선정적 제목을 달아, 시계 관음증에 합류했다.

▲ 2009년 5월13일자 SBS 보도

방송사들 역시 동참했다. 5월 13일 SBS <8뉴스>는 <“시계, 논두렁에 버렸다”>는 제목으로 “노 전 대통령은 권 여사가 자기 몰래 시계를 받아 보관하다가 지난해, 박 전 회장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자 시계 두 개를 모두 봉하마을 논두렁에 버렸다고 진술한 것으로 확인됐다”며 “비싼 시계를 논두렁에 버린 이유에 대해서는 집에 가서 물어보겠다며 노 전 대통령이 답변을 피했다고 검찰은 밝혔다”고 전했다. 단독보도(▷링크)였다. YTN은 같은 날 “박연차 전 회장이 회갑선물로 준 1억 원짜리 명품시계 2개를 권양숙 여사가 버렸다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에서 진술했다”고 한 보도와 차이가 난다. SBS 보도에서는 ‘논두렁’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인규 당시 대검 중수부장의 말에 따르면, 국정원의 농단에 제대로 놀아난 보도에 해당되는 셈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보도되기 시작한 진실

물론, ‘명품시계’와 관련한 진실은 이미 오래 전에 드러났다. <한국일보>는 노 전 대통령 서거 직후인 2009년 5월 27일 <동창생들 “억대시계 본적도 없다고 억울해 해”> 기사를 통해 “노 전 대통령이 ‘논두렁에 버렸다’는 언론보도에 억울해했다”고 전했다.

▲ 5월27일자 한국일보 기사

해당 보도에 따르면, 시계를 받은 쪽은 노 전 대통령 형인 노건평 씨였다. 노 씨는 권양숙 여사에게 전화해 “회갑기념 선물인데 그냥 받아도 되지 않겠느냐”고 얘기했고, 권 여사는 “되돌려 주든지 형님이 가지시라”고 거절했다고 했다. 그러나 ‘명품시계’ 논란이 불거지자 권 여사는 노 전 대통령에게 경위를 설명하고 방도를 물었고 이 때 “논에 버렸다고 하든지”라고 말한 것이 와전됐다는 얘기다.

물론, 해당 보도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2009년 5월 23일) 이후에 나왔다. 노무현 전 대통령 부산상고 동기들은 “자존심이 강했던 노 전 대통령은 권 여사가 박 회장으로부터 돈을 받은 사실은 일부 시인했지만 시계는 정말 받지도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도덕성과 관련해 심적 부담을 크게 느꼈고 자살을 결심하는 데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 '심적 부담'은 바로 국정원이 주도한 '언론 플레이'의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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