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가 이완구 국무총리 후보자의 ‘언론압박’ 발언을 녹음까지하고도 ‘낙종’했다. 그것도 현장에 없던 KBS에 단독을 뺏겼다. 사연은 일부 알려진 것도 있고, 알려지지 않을 것도 있다.

한국일보 정치부의 한 기자는 지난달 27일 이완구 후보자와 김치찌개를 먹으며, 이완구 후보자의 ‘위대함’을 느꼈다. 그는 전화 한 통에 종합편성채널 프로그램 패널을 바꾼 것은 물론 언론사 인사에 개입한 사실을 천연덕스럽게 자랑했다. 당시는 이미 이 후보자의 부동산 투기 의혹이 나온 이후였다. 기자들을 상대로 압박성 발언을 한 뒤 이완구 후보자는 “흠이 있더라도 덮어 달라”고 노골적으로 부탁했다.

한국일보가 9일자 사설에서 지적한 대로 “노골적인 대(對)언론 협박으로 들릴 뿐만 아니라, 도덕성 하자를 감추려는 불순한 의도마저” 엿보였다. “거취에 대한 판단까지도 고민해야 할 사안”이었다. 그런데 김치찌개 회동에 참석한 중앙일보, 경향신문, 문화일보 기자들은 이완구 후보자의 문제적 발언을 보도하지 않았다. 기자들은 이완구 후보자 해명대로 “평소 친하게 지내던 기자들과 격의없이 대화하는 사적인 자리에서 답답한 마음에 사실관계를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가운데 나온 발언”인 점을 감안해 보도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순수하게 이해하면 그렇다.

회동 직후 한국일보 기자는 이완구 후보자의 발언을 일부 요약하고 녹취록을 붙여 편집국에 보고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이 기자와 정치부 데스크는 “이 후보자의 왜곡된 언론관이 문제가 있다고 보고 기사화 여부를 심각하게 검토”했으나 결국 기사는 쓰지 않았다. 이유를 두고 이런 저런 말이 나오고 있으나 복수의 한국일보 관계자들은 ‘사적 자리’라는 점을 미보도의 가장 큰 이유라고 말한다. 같은 이야기를 들은 다른 매체의 기자와 정치부 데스크들도 해당 발언을 기사로 쓰지 않았다.

하지만 녹취록을 입수한 KBS는 보도했다. 파장은 컸다. 취재윤리가 반대 논리로 제시됐다. 밥을 먹는 자리나,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녹취된 것을 보도하는 것이 타당하느냐는 문제제기였다. 한국일보 기자가 사적인 자리에서 상대의 동의를 받지 않고 대화를 녹음했고, 이를 야당에 건넨 것은 언론윤리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종편을 중심으로 제기됐다. 조선일보도 그 지점을 물고 늘어졌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국무총리 후보자와 기자들의 회동을 ‘사적인 자리’라고 할 수 있을까. 기자와 권력실세와의 만남은 어떻게 보더라도 ‘공적’이지, 사적이지 않다. 기자들은 취재원들이 “이건 기사에 ‘절대’ 쓰지 말라”며 넌지시 일러주는 말도 기사로 쓰는 경우가 많다. 그동안 언론의 '관행'에서도 이해가 안 된다. 밥 자리와 술자리에서 얻은 정보로 정국이 뒤집어진 사례는 굳이 예를 따로 들지 않더라도, 셀 수 없이 많다.

솔직해지자. 취재원과 기자가 ‘사석’을 이유로 암묵적으로 ‘오프 더 레코드’가 걸렸다고 해도 공적 가치가 있는 사안이면 ‘오프’를 깨고 기사를 써야 한다. 실제 KBS가 보도한 내용만 보더라도 이완구 후보자는 무시무시한 말을 했다. ‘언론은 내 손안에 있소이다!’ 수준이었다. 정치인 이완구의 허풍이든 아니든 그의 발언들은 대단한 보도가치가 있다는 것이 KBS 보도로 충분히 입증됐다. 한국일보 기자가 정치부 데스크를 통과하지 못한 소스를 새정치연합 의원실에게 제공하고 출처를 가려 ‘정치적 리스크’를 줄인 뒤 기사를 쓰려고 했던 것도 긍정적으로 이해하자면 그렇게라도 보도해야 한다는 발언의 ‘보도가치’ 때문이다.

물론, 한국일보 내부에는 “결과적으로 보도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안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당시 기자의 판단을 존중한다”는 기자들이 꽤 있었다. 하지만 어떤 이유를 붙이더라도 이번 ‘낙종’은 처음부터 끝까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회동에 참석한 기자들은 공직자 후보의 막말에 현장에서 대응하지도 않았고, ‘기사화하겠다’는 말도 못했고, 결국 단 한 줄의 기사를 쓰지 못했다. “흠이 좀 있더라도 덮어 달라”는 이완구 후보자의 부탁을 결과적으로 들어준 셈이다.

더구나 한국일보 편집국장과 다른 기자들은 KBS 보도 직후까지도 낙종 사실을 제대로 알지조차 못했다. 출입처 시스템에 길들여진 한국일보 정치부는 보도가치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채 다른 매체에 그걸 넘겨주는 걸 수수방관했다. 수수방관이 아니었다면 의도적 방관이었을 것이다. 다른 이유를 따져 볼 것도 없다. 출입처에 길들여져, 여당 원내대표 출신으로 청와대에 입성하는 ‘친박’ 정치인과의 내밀한 관계야말로 낙종의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한국일보의 한 기자는 이렇게 지적했다. “만약 우리가 녹취록을 공개하고 끈질기게 취재했다면 이완구 후보자를 더 궁지에 몰아넣었을 것”이라고.

더욱더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은 한국일보가 청문회 당일인 10일 1면에 ‘이완구 후보자 녹취록 공개파문 한국일보사 입장’을 게재했다는 점이다. 한국일보 기자들은 하나 같이 “KBS 보도 이후에야 우리 소스인지 알았다”며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할 대책이 필요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한국일보가 10일 게재해야 할 것은 ‘입장’이 아니라 녹취록 ‘전문’이었다. 더구나 이 입장은 새누리당과 조선일보가 취재윤리를 문제 삼은 지 불과 하루 만에 올라왔다. 한국일보의 이 같은 대응은 ‘언론압박 의혹을 취재윤리 문제로 물타기하는 효과’만 낳았다. 당장에 인사 청문회장에서 새누리당 의원들이 한국일보의 '입장'을 근거로 어떤 질의들을 했는지 살펴보면, 그 게재의 효과가 드러난다.

이완구 후보자의 막말은 도를 넘었다. 10일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들이 공개한 ‘추가 녹취록’에 따르면, 이 후보자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언론인들 내가 대학 총장도 만들어주고 교수도 만들어줬다. 내 친구도 대학 만든 놈들 있으니까”라고까지 말했다. 한겨레 기자에 대한 노골적인 거부감을 표현한 대목도 있다. 한국일보 관계자 말대로 이완구 후보자가 원래 “허풍이 심해 발언에 신빙성이 없다”면 이런 국무총리에게 국정을 맡기는 시민들만 더 불쌍해진다. 김치찌개 회동에 참석한 기자들이 녹취록을 공개하지 않은 탓에 시민들은 ‘허풍쟁이’ 국무총리를 맞이하게 되거나, 권언유착·정언유착의 대표선수를 정부의 최고 책임자로 보내야 할 상황이 됐다. 적어도 1월 27일부터 한국일보는 언론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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