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개인적으로 유진룡 전 장관을 잘 모른다. 그나마 알고 있는 것이 조금이나마 있다면 19대 국회가 개원했던 2012년 봄부터, 지난해 여름까지 약 2년 여 동안 국회에서 일했던 덕분이다. 그것도 그가 수장으로 있던 문화체육관광부 해당 상임위 소속 야당 의원실에서 보좌진으로 일했기 때문에 단지 ‘업무적’ 이유로 조금 지켜봤을 뿐이다. 그가 장관이 될 당시 인사청문 과정에 참여했고 그가 장관으로 일하는 것들을 야당 의원실의 입장에서, 다분히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봐야 했다. 그리고 다소 갑작스러웠던 퇴장 과정도 함께했다. 우연히도 그의 퇴장에 이어 나 역시도 국회를 떠났기 때문에, 그 이후 그가 언론 등을 통해 구중궁궐 깊숙한 곳, 권력의 핵심이라 여겨지는 누군가들과 주고받은 일련의 실랑이에 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퇴임 이후 박근혜 대통령의 지시로 문화체육관광부 국·과장 교체가 이뤄졌었다는 주장을 해 큰 파문이 일었다. (연합뉴스)

개인이 아닌 한 시절의 대변하는 어떤 상징이 된 이름, 유진룡

따라서 이 글은 유진룡 전 장관에 대한 글이 아니다. 유진룡이란 이제 어떤 특정 개인을 넘어 그냥 한 시절, 혹은 그 시절을 대변하는 어떤 상징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것은 국가 문화행정에 있어서의 최소한의 합리성, 정상적 민주공화국 정부가 지켜야 할 마지막 상식, 우리가 흔히 “해도해도 너무 한다”라는 표현을 쓸 때의 ‘해도 해도 너무 하는, 그 어떤 것’의 마지막 한계라 하겠다. 그렇다, 돌이켜보니 유 전 장관은 마지노선이었다.

야당의원실의 보좌진으로서, 아니 그것 이전에 문화활동가, 혹은 문화정책연구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관점에 늘 동의했던 것은 아니었다. 때때로 함께 일하던 의원의 입을 통해 문제 제기를 하기도 했고 많은 경우는, 술자리 안주꺼리로 씹어대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매우 일상적인 심심치 않게 벌어지는 일들이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따라서 문화예술에 대한 관점이나 철학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기와 생각이나 입장이 다른 상대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그 누구도 오점없이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진룡 장관은, 백프로 장담할 순 없지만 최소한 내게는 합리적인 시장주의자로 비쳐졌다. 문화나 예술을 시장의 자율성을 기반으로 산업화하여 자생적으로 성장시키는 방안에 관심이 깊다는 점에서는 시장주의자였으나 그 과정에서 문화예술계 안팎의 다양한 의견을 수용하는 일련의 과정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합리적이고 유연한 면모가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예술 자생력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동의했지만 그것이 시장구조에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고 보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그가 주도하는 문화부 정책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가져왔다. 거칠게 얘기해서 그가 시장과 산업을 중심으로 문화를 바라보는 측면이 좀 더 강했다면 난 공공성에 기인한 사회의 책임이 좀 더 강조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입장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대화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고 본다. 방법적 차이는 있지만 결국 우리 공동체의 문화예술이 건강하게 성장하여 사회 구성원들의 삶이 풍요로워지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어떤 방식이 옳은 것인가의 문제는 치열한 실천과 토론을 통해 끊임없이 갱신되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합리적 시장주의자, 혹은 소통이 가능한 보수주의자의 면모가 누군가들에게는 굉장히 불편하게 느껴진 듯 하다. 사실 지난해 7월 최종적으로 그의 면직이 통보되기 이전에도 그의 자리가 불안하다는 뜬소문은 숱하게 들려왔다. 워낙 여의도 정치판이란 데가 이런저런 뜬 소문이 숱하게 돌아다니는 곳이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긴 했지만 본래 아니 뗀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는 법, 그가 장관으로 박근혜 정부 첫 문화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꽤 많은 업무적 성과를 내었고 특별한 과실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딘지도 알 수 없는 심연에서 그에 대한 불만과 불신의 씨그널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현실이 되었다.

▲ 유진룡 전 장관은 참여정부와도 불화했고, 박근혜 정부와도 불화했다. 이런 그이지만 많은 문화행정가들은 "그가 유능한 관료였다"고 평가한다. 이 역설은 그의 퇴장 이후 문화행정의 상식이 붕괴되고 있단 점으로 입증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딱히 경질될 사유가 없었던, 그 합리적 시장주의자의 퇴장

당초 그의 장관 임명이 약간은 의외였던 것과 마찬가지로(개각 당시, 그는 박근혜의 사람으로 분류되지 않았었다), 그의 퇴장도 너무 갑작스러워서 당황스럽기조차 했다. 물론 앞서 언급한 ‘불만의 씨그널’이 떠돌아다니고 있기는 했지만 딱히 경질될 사유가 너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유 전 장관도 박 대통령에 대한 존중과 신뢰를 늘 강조했고 야당의 공격으로부터 대통령을 보호하려는 태도를 보여왔기 때문이다.(사실 국무위원이라면 너무 당연한 일이긴 하다.) 각종 뜬소문에도 불구하고 대통령과 유 전 장관의 관계가 불편해 보이지는 않았었다. 언론을 통해 알려진 사실들이 맞다면, 그가 퇴장하게 된 계기는 세월호 시국에서의 국무회의 석상의 발언이 권력의 역린을 강하게 자극한 탓이 맞는 것 같다. 객관적으로 봐도 그가 박근혜 정부의 이념적 메신저는 아니었을지언정 매우 유능하고 성실한 관료이긴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가 퇴장하고, 최소한의 합리적 상식의 방파제가 붕괴된 자리에 이제 몰상식과 이념편향의 폭주가 거침없이 시작되고 있다. 최근 문화부는 ‘2015년도 우수도서(세종도서) 선정사업 심사 기준’을 발표했는데 문학분야 우수도서 선정기준에 ‘특정 이념에 치우치지 않는 순수문학 작품’, ‘인문학 등 지식 정보화 시대에 부응하며 국가경쟁력 강화에 기여하는 도서’ 항목이 들어가 있다. 낡디낡고 케케묵은, 이제 문학계와 독서계에서는 아무런 이슈도 되지 않는 ‘순수-참여’의 낡은 이분법을 다시 들이대겠다는 것이다. 거기 하나 더 갖다붙인 ‘국가경쟁력 강화에 기여하는 도서’란 표현은 더욱 가관이다. 딱 잘라, 솔직히 말하자면 문학이나 인문학 도서는 국가경쟁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니, 도움이 될 필요도 없는 책이다. 국가경쟁력에는 도움이 안되어도 인간이 인간적인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그것(국가경쟁력)보다 훨씬 더 많은 도움을 주는 것들을 담은 책들이다. 상식의 붕괴는 이것 뿐만이 아니다.

그에 이어 문화부는 ‘2015 문학분야 장관 상장 심사결과’에서 그동안 줄곧 문화부 장관 상장이 수여돼온 ‘전태일청소년문학상’과 ‘근로자문화예술제’ 중 문학 부문을 수여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내부 기준을 강화해 문학인 기념과 문학 창작이 주가 아니거나, 타 부처 소관 행사를 제외하기로 했다는 게 문화부의 궁색한 설명이지만 누구도 그 얘기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당장 조금 민망할지언정 조금이라도 구중궁궐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들은 하지 않겠다는 부처의 굳은 의지가 엿보일 뿐이다.

그의 퇴장 이후, 붕괴되고 있는 문화행정의 기초적 상식들

이런 분위기는 단지 중앙정부 차원에서만 벌어지고 있지 않다. 이미 너무 많이 알려진 부산시의 부산국제영화제 조직흔들기는 물론이고 각 지역 문화재단의 인적구성에 대한 흔들기도 가속도가 붙고 있다. 최근 속칭 진보 예술단체 출신인 인천문화재단의 모 본부장이 하루아침에 별다른 사유도 없이 평 팀원으로 강등되었다. 짜르는 것은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으니 알아서 나가라는 공갈인 것이다. 이에 관해 “지난 이명박 정부에서 민예총 등 진보예술단체의 정리(무력화)가 이뤄졌는데 여전히 문화예술계 좌파들이 각 지역문화재단에서 정리 안된 채 활동하고 있는 것이 문제”라는 말이 구중궁궐 모처에서 거론되었다는 듣기 험악한 소문도 돌아다닌다. 뭐 개인적으로 이런 술자리 뜬소문을 신뢰하진 않지만 이런 유언비어가 나돌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문화계는 급속히 경직되어가고 있다는 반증이다.

지금 세상을 돌아보라. 그리고 문화예술계를 보라. 어리고 순수한 예술가들과 음험한 좌파예술가들이 양립하고 있는, 어린아이 동화 속 같은 동네가 결코 아니다. 문화예술계도 아프리카 정글의 생태계만큼 복잡하고 다양하다. 미에 대한 가치기준도 제각각이고 문화적인 것에 대한 접근방식도 헤아릴 수 없을만큼 복잡다단하다. 여기에 보수니 진보니 하는 이분법적 잣대를 들이댄다한들 쉽게 재단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별로 인정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 혹시라도 정권 차원에서 문화예술계 좌파 척결을 원한다고 해도 그것은 이룰 수 없는 꿈이다. 왜냐하면 좌파의 범위를 지나치게 너무 넓게 잡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다른 입장을 얘기하면 다 좌파란 식이니 말이다.

아니 이것은 문화예술계 뿐만이 아니다. 우리 사회는 이제 그렇게 간단한 이념적 스펙트럼으로 구성된 사회가 아니다. 저 쪽에서는 다 비슷한 진보인 것 같게 보지만 서로 생각도 다르고 친하지도 않다. 친노 성향도 있고, 친노 성향도 보수적이라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 친북 성향도 있지만 북한 정권에 극도로 비판적인 사회주의자도 많이 있다. 사민주의자도 있지만 사민주의를 개량주의라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 자본주의건 맑스주의건 모두 화석에너지에 의존하는 사회발전론에 의거하고 있다하여 싸잡아 비판하는 근본주의적 환경주의자들도 있다. 이런 게 세상인 거다. 100명의 사람이 있으면 100명의 생각이 존재한다. 현실적으로 사회에 위협적인 집단이 아니라면 누구든 자신의 입장을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그런데 이런 복잡함을 단순화시키고 선긋기를 하는 것은 사실상 무의미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획책한다. 왜냐하면 그런 배제의 과정을 통해 권력을 독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흔히 ‘독재’이며 이념의 통제다.

진보예술단체의 정리가 이뤄졌는데 여전히 문화예술계 좌파들이 문제라는 그 문제적 인식

다시, 유진룡 전 장관은 마지노선이었다. 그런데 단지 우리를 위한 마지노선이 아니라 그들을 위한 마지노선이기도 했다. 누군가 어떤 선을 넘어설 때는, 피아를 막론한 출혈을 감수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부단한 각오가 필요하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그런 각오를 끌어낼만한 상식적으로 보편타당하게 용인될만한 확신과 근거, 명분이 필요하다. 싸움을 통해 얻어지는 보잘 것 없는 과실은 소수의 당사자 몇 명에게 돌아가지만 그 피해는 그 바닥의 생태계를 구성하고 있는 전체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과거 고전시대의 통치자들이 최치원 같은 당대의 글쟁이들을 동원해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과 같은 선전포고문을 대단한 명문으로 작성한 것은 바로 그런 까닭이다. 우리가 이런 민폐를 끼쳐가며 싸움을 벌이는데는 이러이러한 불가피한 까닭이 있으니 제발 봐달라, 는 최소한의 예의갖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과연 지금 이 시기가 문화예술계에 몰상식하고 편향적인 이념몰이를 시작할만한 보편타당한 명분이 어디 있을까? 그럼에도 그들은 천둥벌거숭이처럼 겁 없이 금을 밟고 나섰다. 그 참혹한 결과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누군가 져야 할 것이다.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길로 천천히, 그러나 가속도가 점점 붙으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런 쟁투가, 그 결과와 상관없이 힘들게 문화예술판을 지키고 있는 구성원들에게 큰 상처를 남길 것이란 게 불 보듯 뻔히 보인다. 게다가 문화를 누려야 할 대중들에게 아무런 것도 남기지 못할 것이란 것도 분명하다. 이제 그만 멈춰달라는, 소용없는 하소연도 하고 싶지 않다. 우리에게, 또 다른 차원의 결의가 필요한 시간이 된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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