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당의 진로에 대한 이런 저런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 정동영 상임 고문이 탈당해 ‘국민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건설을 촉구하는 모임(이하 국민모임)’에 합류하고 정의당 천호선 대표가 신년기자회견을 통해 진보정치세력의 재편에 나서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이른바 '진보 결집'에 대한 논의는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을 반영해 <한겨레>는 지난 26일부터 28일 까지의 지면에 진보정치 관련 기획기사를 3일간 배치했다. 진보정치의 과거, 현재, 미래를 짚은 기사들이다. <한겨레>는 26일자 1면, 8면, 9면에 우선 진보정치의 과거를 돌아보는 내용의 기사를 배치했다. 여기서 진보정치의 과거란 민주노동당이다. 물론 민주노동당 이전에도 진보정당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운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소한 현재 진보정치의 성과는 2000년대 초기 민주노동당의 선전에서 직접적으로 비롯된 측면이 크다. 그렇기 때문에 진보정치의 오늘과 미래에 대해 말하려면 민주노동당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 한겨레 26일자 8면.

<한겨레>는 26일 지면에서 민주노동당으로 대표되는 진보정치의 과거를 다뤘다. <한겨레>의 기사에서 민주노동당의 역사는 “종북 논란과 패권다툼에 발목잡힌 15년”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한겨레>의 이날 기사는 민주노동당이 2004년 국회의원 10석을 확보하며 원내에 진출한 순간 위기가 잉태됐다고 평가하고 있다. 권력이 된 당권과 공직추천권을 두고 대중운동세력의 유력한 두 정파인 ‘자주파’와 ‘평등파’가 격돌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고질적 파벌갈등이 2007년에 이르면 민주노동당이 분당돼 진보신당이 출현하는 비극으로 이어졌다는 게 <한겨레> 기사의 맥락이다.

<한겨레>의 이러한 평가는 대부분 맞는 이야기다. 하지만 <한겨레>가 주목하지 않은 부분이 오히려 위기의 더 큰 원인이었다는 평가를 내릴 수도 있다. <한겨레>는 위기의 원인을 권력을 둘러싼 패권다툼으로 짚고 있으나 그 이면에는 ‘노선’의 문제라는 보다 근본적 차원의 갈등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권력의 ‘단맛’을 보기 전인 2004년 이전에도 민주노동당에 참여한 정파들은 이미 국지적인 내전을 치르고 있는 상태였다. 보궐선거와 지방선거에 출마할 후보들을 두고 벌어진 극단적 파벌대립과 지구당 장악을 위한 패권적 행태 등은 이미 당시부터 현실적 문제로 다뤄지고 있었다. 2001년 소위 ‘군자산의 약속’을 통한 자주파들의 집단 입당과 이를 통한 조직장악 기도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소위 ‘좌파’로 분류되는 일부 정파 역시 이러한 혼란상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2002년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당 내 자주파 일부 인사들이 자당 소속인 권영길 후보를 지지하지 않고 여당 소속인 노무현 후보를 지지한 것은 이러한 노선 갈등을 심화시킨 대표적인 사례다. 자주파 일부 인사들의 이러한 행위 역시 권력과 이득의 문제가 아니라 노선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패권주의’로 표현되는 2004년 이후 당권경쟁의 맥락 역시 자주파들이 자신의 조직노선을 충실히 따른 결과이다. 자주파들이 당시 당 강령의 ‘사회주의의 이상과 원칙’이라는 대목을 ‘진보적 민주주의’로 바꾸려고 시도한 것이나 당시 사실상 여당인 열린우리당과의 관계 설정에 있어서 자주파 소속 사무총장이 ‘2중대’ 역할을 자처한 것, 원내진출의 성과로 얻은 역량을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에 올인한 것 등으로 대립이 격화됐다는 점 등을 상기하면 이 당시 패권다툼의 원인이 단지 원내진출의 성과를 차지하기 위한 암투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평등파들이 자주파들에게 완전히 당의 주도권을 빼앗김으로써 평등파들이 ‘더 이상 이 당에서는 우리의 노선을 실현할 수 없게 됐다’고 좌절한 게 2007년 분당사태의 한 원인이 됐다고 볼 수도 있다. <한겨레>의 기획은 이러한 측면을 충분히 짚지 못하고 있다.

▲ 한겨레 27일 8면.

<한겨레>는 27일 8면, 9면에 진보정치의 현재를 진단하는 기사를 배치했다. 특히 8면 기사는 2012년 총선 당시 진보정당을 지지했던 유권자 7명을 인터뷰해 무엇이 문제인지를 돌아보자는 취지로 보이는데 이들은 진보정당이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실력을 갖춰야 하고 종북 프레임을 극복해야 하며 입장이 다른 상대에 대해 유연한 태도를 보여야 하고 세밀한 실행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등의 진단이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목소리들은 유권자들의 가공되지 않은 날 것의 생각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있고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진단이 9면 기사의 진보정당 재편 논의의 소개로 이어지면서 진보정치가 직면하고 있는 과제는 백화점식 나열에 비슷한 것에 그치게 된다.

진보정당을 지지했던 유권자들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방법은 제각기 다르다. 진보정당이 사회를 바꿀 실력을 갖추기 위해 필요한 것은 사회운동 전반의 성장과 진보정당에 불리하게 설계돼있는 선거제도 자체의 변화이다. 진보정치가 종북 프레임을 극복하고 패권적 태도 역시 버리기 위해 필요한 것은 낡은 사상들과 결별하는 것이다. 진보정치 활동가들이 세밀한 실행력을 갖추기 위해 필요한 것은 스스로 현안에 대한 전문성을 제고하고 이를 위한 물적 조건들의 지원이 가능하도록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여기서 필요한 것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진보정당 재편 논의가 이러한 것들을 충족시킬 수 있는지 여부가 논해졌어야 하는데, <한겨레>의 기사에서 이런 문제의식은 충분히 찾아볼 수 없다.

▲ 한겨레 28일 7면.

<한겨레>는 28일 지면에서 진보정치의 미래에 대해 다뤘는데 이 역시 다소 부족해보이긴 마찬가지다. <한겨레>는 이날 6면에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과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의 대담기사를 배치했는데 이들의 대담 내용은 거의 ‘장님 코끼리 만지기’에 가깝다. “진보정치인들 중에는 ‘싸가지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자기들만 정의의 투사인 양 우쭐대는 못된 습성부터 버려야 한다”는 남재희 전 장관의 마지막 언급은 당혹스럽다. <한겨레>는 이어 7면에 전문가 10인이 말하는 진보정당이 나아갈 길에 대한 조언을 종합해 다뤘는데 이 역시 이전 기획기사들에서 시사한 문제의식의 동어반복이나 “일반 국민의 눈높이로 모든 것을 고쳐야 한다”는 식의 안이한 조언으로 점철돼있어 문제다. 진보정치의 ‘독자노선’을 버리고 제1야당으로 건너 간 인사가 “독자노선을 걸으려면 지금이라도 젊은 세력을 키워야 한다”라고 조언하는 대목에선 고개를 갸우뚱 하게 된다.

진보정치의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고민하기 위해서는 차라리 무너진 진보정치의 일선에서 아직도 고민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전면에 배치해줬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드는 기획이다. 과거의 문제가 뭐였다고 생각하는지, 구태를 극복할 의지는 있는지, 미래를 어떻게 설계하고 있는지를 다양하게 물어보았더라면 더 내실있는 기사가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진보정당의 재편 논의가 실질적으로 진행되는 국면에서 이러한 형태의 기획이 성사되기는 어려웠을 거라고 짐작한다. 그렇더라도 이제 진보정치에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 상황에서 <한겨레>가 이러한 용기있는 기획기사를 배치한 것 만큼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여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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